top of page
메세지.png
@nunnuneenune
눈눈이이

두어번 접힌 종잇조각을 펼치자 한 글자가 성의 없게 휘갈겨져 있었다. ‘금.’ 까랑까랑한 부장의 목소리에 흩날리는 글씨체에서 눈길을 뗐다.

“자, 다들 쪽지 하나씩 뽑았지? 그럼 이제 같은 요일 당번 찾아가자.”

열댓명 사이에서 자기처럼 툭 튀어나온, 비슷한 눈높이의 선배와 가장 먼저 눈이 마주쳤다. 시원시원한 생김새와 걸맞게 곧바로 “금요일?” 하고 물어왔다. 자기 짝을 찾느라 웅성웅성한 가운데에서도 귀에 바로 꽂히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 바로 찾았네.”

한 발 내딛기도 전에 선배가 먼저 다가왔다. 급히 아까 자기소개 때 들었을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굵은 붓으로 쓰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름이 직선적인 인상과 잘 어울렸던지라 다행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너 이름이 뭐더라?“

”기상호요.“

“아, 맞다. 내 이름은,”

“박…병찬 맞죠?”

“어엉. 1학기 잘 부탁한다.”

“저두 잘 부탁드립니다.”

간단한 통성명을 마치자 정적이 흘렀다. 고등학생 형은 뭔가 포스가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는데 병찬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뭐, 뭐고. 일진이가. 도서부가 아니라 위장 일진 동아리였나. 다른 선배들은 착해 보이는데 잘못 찍혔는갑다…. 하씨, 희차이 말대로 눈 착하게 뜰걸. 오만 생각을 하느라 얼어붙은 상호 앞으로 한 발짝 다가온 병찬이 자신과 상호 머리 위로 손을 휘저었다. 혼자서 뭔가 가늠하더니 뒤늦게 곤란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서는 사과를 건넸다. 미안, 미안.

“근데 너 키가 나랑 비슷한 것 같은데. 186? 187?”

“187 센치요.”

“그럼 점심 때 같이 농구 좀 하자. 같이 하던 3학년들이 졸업해서 수가 좀 모자라거든.”

“농구요?”

만만해 보이는 도서부 활동이나 하려고 들어왔건만 난데없이 무서운 선배한테 반강제로 스카우트 당할 판이었다. 할지 말지 결정도 못 했는데 선배의 거침없는 기세에 말려버렸다. 상호는 병찬이 내민 휴대폰에 얌전히 자신의 번호를 눌렀다. 키 큰 친구 더 없냐는 말에 삥뜯기는 듯한, 그런 수치스러운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갓 중학교를 졸업한 빠른 연생은 빠르게 절친을 헌납했다. 한 명 있긴 한데요. 걔는 키 몇인데? 183이요. 오, 그럼 내일 걔도 데리고 나와.

다행히 진짜 농구가 목적이었던 질 좋은 형이었다. 다른 형들도 한 성질 머리할 것 같은 첫인상과 달리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한 명은 첫인상 그대로 여전히 무서웠지만. 점심을 후딱 해치우고 금요일에는 도서실로, 나머지 요일에는 농구코트로 뛰어나갔다. 몸치라며 형들한테 구박받기도 했어도 어차피 점심시간에 한 판 하는 농구, 재밌으면 장땡이었다. 물론 매점 내기라도 걸었다 치면 눈치를 살살 보긴 했다. 아무튼 상호는 나름 고정멤버에 학교 이름을 딴 팀명까지 갖춘 점심 농구가 꽤 마음에 들었다. 순조로운 새 학기였다.

 

***

 

새로운 학교 건물과 사람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4월. 대놓고 밀어주는 방송부와 달리 구색 갖추기로 만든 건지 신권도 잘 안 들어오고 별관 한 구석에 박힌 도서실은 찾는 사람 없기로 유명했다. 그날도 상호는 도서실에 몇 없는 만화책이나 한가로이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문득 입구 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더니 병찬이 형이 아니라 희찬이였다. 터덜터덜 들어온 희찬이 데스크에 팔을 걸쳤다. 둘 다 인사는 생략했다.

“정희차이 웬일?”

“내 뭐. 병찬햄은?”

“뭔 볼일 있다고 오늘 좀 늦는다네.”

“암만 봐도 고급인력 낭비다. 상호 니 혼자 있어도 될 것 같은데.”

“시비 틀려고 여기까지 행차했나. 준수형은? 너까지 빠지면 오늘 지상 4명이잖아.”

“상철이나 성인이가 대신 들어가겠지.”

무덤덤하게 대꾸한 희찬은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물었다. 병찬이 형 자리이긴 하지만 형 성격상 괜찮다고 할 것 같아 그러라고 했다. 희찬이 데스크를 끼고 돌아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상호는 페이지를 한 장 넘기며 물었다.

“그래서 진짜 니 왜 온 건데.”

좀체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옆을 쳐다봤더니 희찬이 답지 않게 우물거리고 있었다. 상호의 눈길을 눈치챈 희찬이 겨우 입을 열었다. 상호….

“나 사랑에 빠진 것 같다….”

“뭐? 니 지금 사랑이라 했나?”

질색하는 상호를 무시하고 희찬은 친절히 제 짝사랑 상대까지 알려주었다. 니네 반 반장이라는 말에 단단해 보이는 똥머리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말도 잘 붙이고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애였다. 성격은 희차이랑 비슷한 거 같기도 한데….

 

“반장이 아깝다.”

“아, 왜 그라는데.”

“1반이면서 층도 다른 우리 반 애한테 언제 반한 거고.”

같은 학교인데 그게 뭔 상관이냐며 희찬이 핀잔을 놓았다. 그 와중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래 좋나…. 희찬은 자신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는지 헛기침하며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저번에 교무실 앞에서 부딪힐 뻔해서 길 비켜주는데 계속 방향이 겹쳐가지고, 그럴 때 있잖아. 그런데 걔가 갑자기 빵 터지더니 자기가 가만히 있을 테니 얼른 지나가라는데 좀 귀엽더라.”

“니 금사빠가?”

“아니거든. 그때는 걍 귀엽다 정도였다. 그 후로 마주칠 때마다 인사하고 얘기 나누다보니 애가 잘 웃고, 근데 은근 똑부러져서 자기 할 말은 잘하고. 암튼 그래 됐다….”

“맞나….”

“걔 볼 때마다 근질근질해서 죽겠다.”

“근질근질은 뭔데. 드럽다.”

“아니, 여기가 간지럽다고.”

희찬은 가슴팍을 쳐댔다. 무슨 소리인지 알면서도 상호는 처음 듣는 절친의 사랑 이야기가 낯간지러워 모른 체 그럼 씻어라, 하고 대꾸했다. 그렇게 투닥투닥하길 몇 분 지나지 않아 병찬이 도서실에 들어섰다.

“도서실에서는 정숙. 너네 싸우는 소리 밖에까지 다 들린다.”

“병찬햄, 안녕하세요!”

“희찬이는 도서부도 아닌데 왜 거기 들어가 있어. 나와라~”

“넵!”

희찬의 씩씩한 대답에 병찬이 짐짓 엄하게 지었던 표정을 풀었다.

“장난이지. 사람도 없는데 걍 거기 있어. 내가 의자 갖고 올게.”

병찬이 의자 가지러 도서실 창고 안으로 사라지자 희찬이 상호에게만 보이게 엄지를 빼꼼 들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병찬이 형 멋있지. 금방 간이의자를 들고 온 병찬이 자리를 잡았다. 턱을 괴면서 상호와 똑같은 첫마디를 건넸다.

“그래서 희찬이는 도서실에 웬일?”

“아, 저도 책 좀 읽으러 올 수 있잖아요. 다들 왜 그래요.”

“책 읽으러 온 애가 도서부원 꼬셔서 떠들고나 있으니 하는 말이지.”

“헤헤, 사실 그게 목적이었어요.”

“얼마나 대단한 얘기를 하려고 농구도 땡땡이치고, 어?”

아까 부끄러워하던 희찬의 스탠드를 보아 비밀인가 싶어 상호는 희찬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희찬이는 술술 털어놓았다. 입이 풀린 모양이었다. 병찬은 흥미롭다는 듯 간간이 호응하며 경청했다. 덕분에 아까보다 길게 제 첫사랑 스토리를 푼 희찬은 진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이제 병찬햄 첫사랑 얘기해주세요.”

“첫사랑 기준이 뭔데?”

“가슴이 찌르르하거나…. 사실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첫사랑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음, 없는 것 같은데?”

“네? 햄 나이가 몇인데 첫사랑이 없어요. 거짓말이죠?!”

“이 녀석이, 없다면 없는 거지. 상호는?”

“저두 없는 것 같아요.”

“아, 재미없어.”

맥 빠진 소리를 내던 희찬은 의자에 축 늘어졌다. 하지만 금방 기운을 차리고 주변에서 주워들은 첫사랑이나 연애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병찬은 빼지 않고 1학년의 가십거리에 어울려주었다. 딱히 관심 없는 남의 이야기라 상호는 그저 가만히 듣기만 했다. 평소 장난기만 가득한 희찬이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같이 농담 따먹기나 하던 절친이 저 혼자 미지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들뜬 꼴이 보기 싫어 괜히 희찬의 마른 옆구리를 푹 찔렀다.

 

***

 

오늘은 도서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으레 매년 하는 진로 상담은 오늘따라 숨이 막혔다. 성적은 그럭저럭 나오지만 하고 싶은 것도, 잘 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진로 얘기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피하고 싶은 주제였다. 삼 년 금방 지나가니 지금부터 잘 고민하라는 선생님의 조언이 작년과 다르게 무겁게 다가왔다. 중학교 때야 아직 먼 얘기라 한 귀로 흘렸지만 지금은 형들이랑도 자주 어울려서 그런가 진로가 확고한 사람들이 주변에 꽤 있어 제 처지가 심란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봐도 뭐 해 먹고 살아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성적 맞춰서 대학 가믄 안 되나…. 딱히 시원한 해답이 나오지 않은 고민을 끌어안고 도서실에 도착했다. 책을 읽고 있던 병찬이 상호를 맞이해 주었다.

“상호 왔어? 상담은 잘 했고?”

“그냥 뭐…. 잘 모르겠다니까 선생님이 삼 년 금방 가니까 잘 생각해보래요.”

“그렇긴 해. 기말고사도 금방이다, 상호야.”

“으엑.”

병찬은 힘 빠지는 소리로 웃더니 금방 책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어쩐지 오늘은 이 형이나 자기나 조금 우울한 날인 것 같았다. 상호는 의자에 늘어져 그 모습을 잠자코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3학년 형들 중 병찬이 형이 지망하는 과나 대학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가끔 모르는 문제 물어보면 바로 가르쳐주는 걸 보면 이 형도 적당히 하는 것 같은데.

“형은 무슨 과 갈 거예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네? 형 3학년이잖아요. 나보다 형이 더 큰일 난 거 아녜요?”

“어떻게든 되겠지.”

병찬은 책에서 눈길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퉁명스러운 모습에 괜히 심통이 났다. 하긴 병찬이 형 정도면 무슨 고민이 있겠어. 누가 누구 걱정을. 스스로 기름을 붓는 격인 건 알지만 한번 삐딱선을 탄 마음은 걷잡을 수 없었다. 결국 입 밖으로 심술 아닌 심술이 튀어나왔다.

 

“형은 잘생기고 성격 좋고. 뭘 해도 잘 살 것 같아요.”

“그건 아무도 모르지.”

아까보다 조금 차가운 어투에 움찔했다. 아 넵,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갔지만 분위기가 한껏 불편해졌다. 도서부 활동 중에는 휴대폰 사용도 금지, 그렇다고 형을 따라 책 읽을 기분도 아니라 멍하니 있었다. 지나가는 이들도 별로 없어 사람 구경은 커녕 지는 햇빛에 둥둥 떠다니는 먼지가 눈요기의 전부였다. 불편함보다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가방을 뒤져 요즘 잘 갖고 노는 캠코더를 꺼내 들었다. 저번 주 주말, 삼촌이 선물이라며 느닷없이 건네준 캠코더. 실은 장비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쓰던 걸 처리하는 것이었지만 고가의 장난감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캠코더는 휴대폰이 아니니까…. 혼자 합리화를 끝내고 캠코더의 전원을 키자 병찬은 흘끗 보더니 아무 말도 얹지 않았다. 무언의 허락이라고 퉁치고 상호는 조용히 일어서 저녁 해가 비스듬히 들어오는 도서실 풍경을 화면에 담았다. 입구서부터 책장 사이를 홀로 누비는데 영 재미가 없었다. 어제 다은햄이랑 희찬이 찍을 때는 유튜버 흉내 내줘서 재밌었는데. 아까의 불편했던 대화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데스크로 돌아갔다. 책을 읽고 있는 피사체를 담자 그제야 좀 찍을 맛이 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가 찍고 있는 걸 알면서도 묵묵히 활자만 응시하는 저 형 고집도 어지간히 셌다. 결국 상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병찬이 형.”

병찬이 고개를 들었다. 화면을 통해보는 데도 직접 눈이 마주치는 기분이었다.

“뭐라도 해봐요.”

“뭐?”

“가만히 책만 읽는 건 재미없잖아요.”

뻔뻔한 요구에 무시할 줄 알았던 병찬은 의외로 음, 하고 뭔가를 고민했다. 평소에 사진 찍을 때는 빼지 않던 사람도 영상은 좀 어색한가 싶었다. 그냥 읽고 있는 책이라도 소개해달라고 하려던 찰나, 병찬이 실소를 터트렸다. 난데없는 웃음에 상호가 의아해하기도 전에 병찬은 말을 이었다.

—부럽다. 그런 생각으로도 계속 농구 할 수 있어서.

웹툰을 기반으로 한 영화의 한 대사였다. 최근 재미들인 농구와 관련된 컨텐츠를 섭렵하고 있는 중 마침 개봉한 영화. 당연히 개봉 첫날 희찬이랑 야자도 땡땡이치고 보러 갔었다. 단번에 인생 영화에 등극했다. 그리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참지 못하고 개멋있다고 주접을 떨었던 그 캐릭터. 인생 영화의 최애지만 상호는 단연코 말할 수 있었다. 실제로는 바로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친구들이랑 장난치듯 하는 성대모사 수준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실사화에 상호는 입도 다물지 못했다.

—되게 짜증 나네.

연기인 줄 알면서도 살짝 숙인 얼굴의 굳은 미간이 진짜 같아 쫄렸다.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시선이 딱 마주쳤다. 움찔 놀랐으나 이제 됐냐고 물어보는 병찬은 제가 아는 형이었다. 와….

“대박! 형도 그 영화 봤어요? 아니, 이게 아니라. 형 방금 실사화한 거 같았어요!”

“오바하지 마. 하도 너희가 재밌다길래 한 번 봤어.”

“진심인데. 저 소름 돋았어요. 제가 잘 모르긴 해도 형 잘생겨서 카메라도 잘 받고, 배우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거 완전 대한민국 연예계 개손해,”

“잘생겼다고 배우 해야 되면 준수가 해야지.”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와, 이게 진짜 연기…? 미쳤는데요? 형 뭐 따로 준비하는 거 있어요?”

“없어. 적당히 하고 이제 그만 자리에 앉아라.”

“형 진짜 진지하게,”

“그만.”

“넵.”

 

그렇게 상호의 주접 해프닝으로 넘어갈 줄 알았던 일은 다음 주 방과 후에 다시 이어졌다. 진로 상담 시즌이라 기씨에 이어 박 씨의 차례가 왔고 병찬은 저번 주 상호와 비슷한 기분으로 도서실에 오던 중이었다. 불편한 자리에 뻐근해진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하면서 걷는 도중 평소와 다르게 복도에 인기척 아닌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상한 기시감에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도서실로 향하는데 아까부터 들릴 듯 말 듯 한 말소리는 점차 또렷해졌다. 병찬은 도서실 부근에서야 알아차렸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제 목소리였다. 저번 주 카메라 렌즈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내뱉었던 대사. 병찬은 도서실 입구 사각지대에 멈추어 섰다. 데스크 안쪽, 반복해서 재생되는 자신의 목소리가 민망했다.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좋아할 정도였나 싶어 약간 싱숭생숭했다. 뒤섞이는 감정 속에서 병찬은 마음을 다잡고 아무렇지 않은 척 들어섰다.

“복도에 형 목소리 울린다, 상호야.”

상호가 황급히 인사를 하더니 제 발 저린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옆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반복해서 볼 정도야? 안 질려? 타박하려고 한 질문이라기보다 순수하게 궁금했다.

“어, 그냥 또 보고 싶어가….”

솔직한 대답에 헛웃음이 나왔다. 몇 줄 안 되는 그 대사가 뭐라고, 그것도 제 기분 상할까 봐 혼자 몰래 보고 있는 모습에 저번 주에 까칠하게 대한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상호는 조심히 살피더니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울상을 지었다. 형이 싫으면 삭제할게요…. 흐음.

애초에 녹화하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 건 무의식이 시킨 제 의지였을 테고 또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는데 삭제하라고 할 만큼 병찬은 쌀쌀한 성정이 되지 못했다. 어릴 때 그만둔 이후로 처음 받아보는 감상이 솔직히 달갑기도 했다.

“됐어. 그래도 민망하니까 너만 봐.”

“넵!”

바로 기운을 차린 모습이 어이없어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평소 같으면 피하면서 ‘아, 형!’ 하고 짜증을 부릴 타이밍이었는데 끝까지 거센 손길을 받아냈다. 웬일이래. 손을 거두자 상호가 씩 웃었다. 아이고, 저 표정은.

“그런데…. 그다음 대사도 해주면 안 돼요?”

“형이 아주 그냥 편하지?”

그래도 진짜 팬처럼 좋아하는 모습에 병찬은 마음이 동했다. 어차피 혼자 볼 텐데 안 될 것도 없지 않을까. 기운 차린 상호의 생떼와 이런저런 자기 설득의 끝에 병찬은 알았다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상호가 “잠시만요!” 하고 시작도 안 했는데 컷을 외쳤다.

“그럼, 체육관에서 제대로 찍을까요? 어차피 이제 문 닫을 시간인데….”

“…그래, 아주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그 후로 상호는 정말로 하고 싶은 걸 다 했다. 종종 영화 속 유명한 명장면 연기를 요구하는 것도 모자라서 심할 때는 책 속의 인상 깊었던 장면도 구현해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래도 개인기 자판기처럼 이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배경이 학교나 비스무리한 건물일 때는 비슷한 장소를 끌고 가기도 하고 얼추 소품 등을 챙겨 오기도 했다. 가끔은 자기 나름의 인물 분석도 해와 조언을 하는 등 꽤 진심을 다했다. 병찬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의아했지만 결과물이 의외로 꽤 마음에 들었던지라 성실하게 아마추어 촬영에 어울려줬다. 어느새 금요일 방과 후 도서부 활동은 촬영 회의, 리허설 시간으로 변질되었고 점점 커지는 의욕에 따라 주말에는 로케 촬영도 나가기 시작했다.

상호는 달랑 캠코더 하나 들고 촬영을 얼기설기 진행했다. 생각했던 이미지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골목 여기저기를 누비고, 잘 찍었다고 생각해서 돌려보면 지나가던 행인이 뭐하나 기웃거리는 게 찍혀 있는 등 정말 맨 땅에 헤딩이었다. 초여름 즈음부터는 낮부터 돌아다니느라 땀에 푹 젖은 꼴을 피할 수 없었다. 병찬은 적나라한 제 모습에 질리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한 생고생으로 단순히 치부할 정도는 아니었다. 병찬은 이러나저러나 둘의 비공식 동아리 비스름한 활동이 사실 꽤 마음에 들었다. 지나가던 어르신이 뭐하냐고 물어와 단편 영화에 도전하고 있다고 얼버무렸더니 자기 젊은 적 모습이 떠오른다며 아이스크림이나 캔 음료 등을 사주시기도 했고, 처음에는 어색했던 ‘뭐 찍나 본데?’ 하는 소리도 점차 익숙해지는 것도 괜스레 좋았다.

그리고 땀에 절은 모습이 오히려 현실적이라며 치켜세워주는 엄지나, 작은 화면 속 제 모습을 꼼꼼히 모니터링하는 진지한 눈매나, 자기 성에 차는 샷을 찍으면 나오는 그 환한 웃음이라던가. 반짝반짝한 그 얼굴은 초여름에도 이만한 고생을 할 만큼 보람 있는 것이었다.

농구코트 위 구박데기 막내의 나만 아는 얼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병찬은 방금 냉장고에서 꺼내든 포카리를 볼에 갖다 댔다. 뭐지? 이 무슨 드라마 F4 주인공이 할법한 생각은? 나 더위 먹었나? 자기 몫의 음료수를 고르던 상호와 냉장고 유리로 눈이 마주쳤다. 상호가 바로 뒤돌아 눈썹을 늘어뜨리며 미안함을 표했다.

“햄. 오늘 진짜 더웠죠? 고생했어요.”

“뭘…. 너도 같이 고생했지.”

“그럼 아이스크림도 먹을까요?”

금방 신이 나 아이스크림 냉동고를 뒤지는 상호를 보며 병찬은 몰래 한숨을 삼켰다. 진부하게 여겼던 로맨스 시나리오였는데 클리셰가 클리셰인 이유가 있었다. 근데 나만 알고 싶은 게 인간이면 당연한 거 아닌가? 잡생각에 빠지려던 순간 상호가 말을 걸어 정신을 차렸다. 어, 나는 너랑 똑같은 거.

아이스크림 때문인지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갈증이 났다. 병찬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냉수를 찾았다. 하지만 골이 아프도록 냉수를 들이켜도 열기가 가라앉지 않아 영 곤란했다. 벌써 이렇게 덥다니. 올해 여름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열심히 찍어놓고 둘만 보기에는 아까워 상호는 병찬에게 유튜브에라도 올려볼까 물어보기도 했다. 유튜브에 올리면 썸네일 어그로를 끌지 않고도 적지 않은 관심을 받을 것 같았다. 요즘은 캐스팅이 어떤 식으로 들어올지 모르니깐. 하지만 병찬의 거절로 공들여 찍은 영상들은 상호의 노트북 드라이브에만 머물러야 했다. 솔직히 저만 독차지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주연 한 명에 연출 한 명, 둘만의 단편 영상이 드라이브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

 

희찬은 교과서나 체육복 등을 핑계로 10반까지 종종 올라오고 점차 상호를 끼지 않고도 반장을 먼저 찾는 일이 많아졌다. 엎어져 자다가 제 앞에서 둘이 대화하는 소리에 깬 적도 있었다. 그제야 체육복 찾는 절친의 속이 훤히 보였다. 사물함에서 있으니 알아서 꺼내 가라고 하자 상호의 퉁명스러운 태도는 개의치 않은 듯 고맙다며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이 가증스러웠다. 왜 저래. 오바하며 어깨를 털어냈다. 그러나 둘은 이미 교실 뒤편으로 간 뒤였다.

그렇게 희찬의 첫사랑은 순조롭게 흘러가는 줄 알았으나 본인은 또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야자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희찬이 놀이터 좀 들리자고 말했다. 입에 단내나도록 떠들고도 할 말이 남거나 아님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운 날 종종 그래왔기에 상호는 별 생각 없이 엉, 하고 대꾸했다. 밤의 놀이터는 언제나처럼 한가했다. 둘은 그네를 열심히 타다가 삐걱하는 소리에 슬쩍 일어섰다. 다음으로 오랜만에 정글짐에서 일대일 경도를 하다가 어릴 때와 달리 팔다리가 걸려 한참을 고생했다.

평소에도 생산성 있는 짓을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오늘따라 할 말은 있는데 빙빙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정글짐에서 겨우 빠져나오고 이럴 거면 이만 집에 가자고 하자 희찬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제야 푸념을 놀어놓았다.

반장이랑 친해지긴 했는데 어떻게 썸으로 넘어가야 할 지 모르겠다고. 이러다가 한 명의 남사친으로 남을 판이라고. 상호가 보기에는 충분히 썸으로 보였지만 열심히 들어주었다. 애초에 여자애들 대하는 건 희찬이 더 나았기에 할 말이 없기도 했다. 희찬도 딱히 기대한 건 아닌지 포커스를 바꿨다.

“그런데 상호 니는 관심 있는 애 없나?”

“없다.”

“진짜로? 주말마다 바쁘다길래 나 몰래 썸이라도 타나 했지.”

“아…. 병찬햄이랑 뭐 좀 할게 있어서.”

“도서부? 한가해 보이던데 주말에까지 할게 있드나?”

“으응, 나도 꿀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그렇게 넘어가는 줄 알았던 연애 얘기는 희찬이 다시 청춘 어쩌고를 논하면서 고등학교 때 연애 좀 해봐야 하는데, 한탄으로 이어졌다. 무덤덤한 상호의 반응에 희찬은 다은햄이랑 애니 얘기나 하지 말고 로맨스 드라마나 영화도 좀 보면서 연애 세포 키우라고 쿠사리를 줬다. 난데없는 시비에 발끈하기 직전, 멍! 구름이와 산책 나온 희찬이네 누나와 마주쳤다. 안부 인사를 나무다 보니 둘의 밤 산책에 따라나서게 되었다. 뭐, 구름이는 귀여우니까….

씻고 나와 침대에 늘어지기 전 문득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 방에 짬처리 된 누나의 책 중 순정만화를 두어 권 꺼내 들었다. 하지만 절반도 보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정희차이는 이런 오글거리는 걸 반장이랑 하고 싶은 건가…. 그래도 썸타고 연애하게 될 때까지 계속 한 소리 들을 것 같아 대충 호응이라도 해주기 위해 로맨스물 쳐돌이인 누나에게 SOS를 쳤다.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는 방에 쳐들어와 니 갑자기 뭐냐고, 니 연애하냐고 캐물었다. 희찬이 사정을 팔고 나서야 취조에서 풀려났다. 옆에 딱 앉혀놓고 자기 넷플 계정으로 이것저것 한참을 추천을 하고도 모자랐는지 자정에 고봉밥마냥 꾹꾹 눌러 담은 추천리스트를 보내주었다. 신났네, 신났어.

 

***

 

주말에 나갈 때마다 부모님은 놀러 나가는 줄로 알기에 최대한 덜 눈치 보기 위해서 촬영 전날에는 얌전히 집에 박혀 공부하는 루틴이 잡혔다. 탈탈 돌아가는 선풍기에 의지해 최대한 엉덩이를 붙여 보았지만 땀이 삐질 나오는 더위에 일찍이 집중력이 한풀 꺾여버렸다. 마침 나머지 가족들도 다 외출한 터라 눈치 보지 않고 쉬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의자를 뒤로 재끼며 휴대폰 잠금화면을 풀었다. 가장 먼저 그새 밀린 카톡이 눈에 띄었다. 태초 단톡은 무시하고, 희차이 쌉소리는 구름이 사진을 보낸 성의를 봐서 답장 좀 해주고, 병찬햄 갠톡에는 답장을 두어마디 남긴 후 유튜브로 들어갔다. 평일 내내 누나가 자기가 추천한 거 봤냐고 하도 쪼아대기에 대충 결말포함 요약 버전을 보고 짧은 후기를 남겼다. 그럼 묻지도 않은 자기 감상평을 한 귀로 흘려보내면 끝. 공부하랴, 촬영 계획 세우랴, 그 와중에 영화 독후감까지. 희찬이와 누나에게 휘둘려버린 그날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래도 알고리즘에 뜬 취향의 몇몇 영화 유튜버들 구독한 후로 짧게나마 식견을 기를 수 있는 건 꽤 괜찮았다.

오늘도 알고리즘은 열일했다. 콜바넴? 온갖 수식어를 갖다 붙여 극찬하고, 또 첫사랑 영화라는 키워드에 바로 썸네일을 클릭했다. 운 좋게 광고 없이 바로 재생되었다. 같은 여름임에도 화면 너머 저쪽은 산뜻해 보였다. 재밌을지 어떨지 몰라도 일단 눈은 즐거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호는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설마하던 순간 상호는 영상을 멈추고 스크롤을 내려보았다. 제법 긴 수상 이력을 후루룩 넘기고 보니 댓글 창도 칭찬 일색이었다. 동성애. 이 세 글자에 백과사전 같은 정의 외에는 별 생각 갖지 않고 잘 살고 있던 대한민국 청소년 기상호에게 명작 퀴어 영화가 훅 다가와 머릿속을 휘저어놓았다. 이 새로운 충격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헤아릴 여력조차 없었다. 그러니까 댓글 반응을 보면 막 나쁜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공공연하게 떠벌릴만한 것도 아닌 듯한 괜한 거부감. 복잡한 머리와 달리 손은 다시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는 이성의 한 조각과 어쩐지 계속 보고 싶다는 본능의 한 덩어리 중 누가 이겼는지 스스로도 알 길은 없었다.

“하아….”

다 보고나니 더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병찬햄이 떠오르는지, 미친 것 같았다. 누구에게 변명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한참을 변명거리를 찾았다. 결국 자기 주변에서 가장 어른스러운—유급생이라 실제로 나이가 많기도 한— 형이라 그런 것이라고 합리화를 했다.

“요즘 자주 어울려서 그런갑다….”

 

얄궂게도 바로 다음 날 종일 머리를 복잡하게 한 장본인을 만나야 했다. 시험 기간이라 딱 한 컷만 찍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기로 한 날이었다. 문제는 핫클립으로 뜬 모 드라마의 고백 장면을 찍을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안 해본 장르 도전, 그리고 주변에서 난리 난 드라마라는 별것도 아닌 이유로 골랐었다. 이렇게 얼굴만 봐도 싱숭생숭하게 될 줄 모르고. 형이 자기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마주하기가 껄끄러웠다. 하지만 벌써 저 앞에 병찬이 보였다.

“마, 많이 기다렸어요?”

“덕분에 땀 벌써 이만큼 났다, 상호야.”

“근데 저 제시간에 도착한 건데….”

“아이고, 덥다 더워.”

병찬은 오바하듯이 셔츠 자락을 펄럭거렸다. 이제 상호가 찡찡거릴 타이밍이었는데 입만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음? 평소의 티키타카를 기대했건만 어쩐지 갈구는 뉘앙스가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장난이라고 어깨를 툭 쳤다. 상호가 아하하, 웃으며 슬쩍 피했다.

촬영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티 나게 어색하게 대하는 상호가 마음에 걸려서인지, 많이 안 해본 간지러운 연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유독 어려웠다. 괜히 연애를 멀리해온 지난 시간이 아주 조금 아쉬웠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 컷의 연속이었다. 이러다 도서관 자리마저 다 놓칠 것 같아 오늘은 이만 접을까, 제안하려던 찰나에 상호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고 선수를 쳤다.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지만 역시 상호가 마음에 들어 하는 장면이 나왔으면 해서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병찬은 아직도 미지의 감정선이 잡힐 듯 말 듯 아른거리는 상태였다. 햄, 병찬햄.

“너무 완벽하게 보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응?”

“계획에 없던 고백이니까 서툴고 불안한 느낌으로…. 사실 처음은 다 그런 거잖아요. 그리고 서로 그런 모습도 좋아서 시작되는 거고. 지금은 그냥 멋있어 보이기만 해서 그런가. 아, 그니까 제 말은,”

진지하게 말을 꺼내놓고 혼자 부끄러워져 얼버무리는 꼴이 조금 웃겼다. 근데 희찬이가 이런 얘기할 때 별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이 녀석 의외로 사랑에 대한 정의가 꽤나 구체적이시다. 이거 찍는다고 공부 좀 해왔나? 아님, 내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었나?

“상호 몰랐는데 연애 고수인가 봐?”

“뭐래요…. 이번에 안 되면 그냥 접어요.”

“그래, 그래.”

병찬은 눈을 감고 최대한 잡생각을 떨쳤다. 상호의 조언은 의외로 항상 도움이 되었던지라 모솔의 동아줄이라도 잡아봐야 했다. 서툴고 불안한, 그런 멋없는 모습도 좋아해 주는. 말로 정의를 내려주니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이 과분한 감정은 오히려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 다시 눈을 뜨니, 상호와 눈이 마주쳤다. 햇빛을 받은 연갈색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신뢰로 가득했다. 저 눈빛이 부담스럽다기보다 어떻게 매번 저토록 잘할 거라고 믿을 수 있는지 신기했다. 몇초나 흘렀을까, 바라보기만 하자 의아해하는 것 같아 그냥 웃어줬다. 그러자 영문도 모르면서 바보같이 따라서 입꼬리를 올린다. 그래, 나는 저 웃음이 보고 싶어서, 응?

“준비됐어요?”

어라. 문득 아지랑이 같던 감정이 또렷해졌다.

“그럼 찍을게요. 하나둘,”

액션 사인과 함께 갑자기 목이 탔다. 마지막임을 기억해내고 마른침을 삼켜가며 애써 대사를 이어갔다. 몇번이고 되풀이 했던 익숙한 대사가 더듬더듬 튀어 나갔다. 가만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더위지만 이와 상관없이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널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마지막 대사는 끝맺지도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시선 처리도 엉망이었다. 그저 기억나는 건 연갈색 눈동자뿐이었다. 상호가 멍한 표정으로 캠코더를 내렸다. 컷 사인은 없었다.

“진짜 엉망이지.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이제서야 무슨 짓을 저질렀나 싶어졌다. 병찬은 이마를 문지르며 시야를 가렸다. 마음이 복잡해 상호를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원 장면이라는 거리가 멀긴 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저는 햄이 한 연기가 더 좋은데요? 근데 갑자기 어떻게 이렇게 달라져요? 진짜 천재다, 천재.”

“그래도 못 쓸 거 같은데….”

“그킨 해요. 오늘은 이만하죠.”

“이 녀석이 형 헷갈리게. 칭찬이야 욕이야?”

병찬은 그제야 상호를 쳐다봤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헤드락이라도 걸었을 텐데 그럴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를 어쩐다….

 

상호는 집중하려 애쓰며 애꿎은 펜만 돌렸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딴 생각에 빠져버리고 펜까지 놓쳤다. 어딘가 부산스러운 시험 기간의 도서관에서 뭐 하나 떨어지는 소리는 그닥 주목을 끄는 일도 아니지만 누가 볼세라 허둥지둥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 괜히 머리를 매만지며 허리를 일으켜 세우는데 대각선 자리의 병찬과 눈이 마주쳤다. 병찬이 먼저 고개를 돌려 상호도 다시 교과서를 쳐다봤으나 여전히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마지막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가슴 속이 뭔가 뭉친 것마냥 몽글거렸다.

한참을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만 끄적이다 결국 인정했다. 조금, 아니 많이 설렜다. 어제 풀버전을 찾아본 걸 후회했다. 자꾸 병찬 쪽으로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최후의 방안으로 얼굴을 교과서에 처박았다. 누군가로 가득 찬 머릿속에 병찬햄보고 잘생겼다는 반 친구들의 평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 솔찌 그 얼굴 보고 설레는 것도 이상한 건 아이지. 준수햄처럼 입이라도 험하던가, 저 햄은 완벽해서 문제다. 아니 가끔 뭐, 허술한 부분도 있긴 한데…. 하씨, 인간미까지 있네. 그래, 이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저 유죄인간 탓이다.

에어컨 냉기에 몸은 으슬으슬한데 목 위로는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냉방병인가? 여름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

 

여름방학. 설레는 네글자는 반강제 보충수업으로 퇴색되어 버렸지만 상호는 이에 투덜거릴 틈조차 없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병찬과 찍은 영상들을 돌려보다가 살짝 아쉬운 부분이 눈에 들어와 색감 보정이나 잡음제거 등을 조금씩 건들다 보니 개미지옥 같은 편집에 빠져버렸다. 저녁 먹고 이런저런 툴을 건드리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되어있었다. 방학이라고 너무 늦게 자지마라, 눈 나빠진다, 키 안 큰다는 등 식구들에게 잔소리를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형도 고등학교 때 매번 밤새웠지만 군대 갈 때까지 컸고 누나도 맨날 불 끄고 휴대폰 하지만 최근까지도 양쪽 눈 모두 1.0 이상 나왔다. 둘을 옆에서 지켜본 목격자로서 혈육의 듣기 싫은 잔소리 대신 진한 피를 믿기로 했다.

사실 왜 이렇게까지 매달리나, 스스로 물어봐도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얼른 완성해 병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낮에는 꾸벅꾸벅 보충수업을 듣고 밤에는 성실하게 편집에 매달린 결과, 방학이 절반 정도 지났을 무렵에 나름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왔다. 창밖을 보니 건물들이 푸르스름한 레이어를 한두겹 덮어씌어진 것처럼 보였다. 기지개를 쭈욱 피고 노트북을 덮었다.

 

느지막이 학교를 가는 길, 상호는 병찬에게 보충수업 끝나면 도서실로 오라는 문자를 하나 남겼다. 역시 잠은 밤에 자야 하는지 쪽잠을 자고 왔는데도 영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이미 지각한 김에 보충수업은 재끼고 도서실로 방향을 틀었다. 반납함 뒤에 얄팍하게 숨겨진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섰다.

별관은 중앙제어 하에 있어 에어컨은 언감생심이었다. 다행히 도서실은 환기가 잘 되는 편이라 그리 무덥지는 않았다. 겨울에는 그만큼 추울 테지만. 창문을 활짝 열어 들이치는 바람으로 땀을 식혔다. 그래도 부족하기에 옆의 선풍기 줄을 잡아당겼다. 없는 것보단 나은 기계적인 바람이 더해졌다. 어느 정도 한숨을 돌렸으니 가방을 풀고 잠시 멍을 때렸다. 눈치 볼 선생님도 없겠다, 상호는 테이블에 스르륵 엎드렸다. 볼에 서늘한 나무 표면이 닿자 절로 기분 좋은 한숨이 나왔다. 까무룩 잠이 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얕은 잠을 이어가던 중 목덜미 부근에 산산한 바람이 느껴졌다. 맺힌 줄도 몰랐던 목덜미의 땀이 식어갔다. 오랜만에 맛보는 시원한 낮잠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점차 몽롱한 정신이 깨기 시작했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기 전 감긴 눈꺼풀 아래 눈동자를 굴리며 피곤기를 몰아냈다. 눈을 뜨자 정면에 병찬이 보였다. 턱을 괴고 노오란 파일철로 부채질을 하고 있는. 어, 햄…. 상호가 몸을 슬 들어 올리자 병찬이 졸리면 더 자도 괜찮다면 어깨를 도닥였다. 언제 온 건지, 몇 분을 자고 있었는지 궁금함을 뒤로 하고 슬며시 밀어오는 병찬의 손에 못 이기는 척 다시 책상에 몸을 기댔다. 아무리 선배 앞이라도 이 주간 모자랐던 잠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럼 십 분만, 웅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다시금 산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얕은 잠을 가르고 창밖의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보충수업이 끝나고도 학교에 남아서 돌아다니는 무리가 떠드는 소리 위를 쨍쨍한 매미 소리가 덮었다. 올해 여름이 그렇게 더울 거라더니 유독 시끄러웠다. 귓전을 때리는 소리에 언젠가 들어본 상식이 떠올랐다. 온도에 따라 매미 소리가 다르다던데. 그럼 온난화가 계속되면 새로운 음역대 발견? 사실 이쯤에서 어느 정도 잠은 다 깨긴 했지만 간만의 여유에 몸은 이미 테이블과 한 몸이 되었다. 눈을 감은 채 이런저런 잡생각 중 불현듯 미간이 꾸욱 눌렸다. 코나 볼을 콕콕 건드는 게 심심한 모양이었다. 얼굴 여기저기를 가만가만 매만지는 손길이 어쩐지 싫지는 않았다.

“기상호.”

깨우기 위해 이름을 불렀다기 보다는 단어를 읊조리는 듯한 어투였다. 그래도 슬슬 일어날까 고민을 하던 중 입술이 눌리는 생소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눈을 떠버렸다. 모로 보이는 시야에서도 병찬의 눈이 크게 트이는 것이 보였다. 뒤늦게나마 대답을 했다.

“에…?”

입술이 어정쩡하게 눌린 상태라 맹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째 묘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한 번 더 대답을 하려는데 병찬이 살짝 벌린 이 사이로 손가락을 쑥 집어넣었다. 갑작스레 혀에 닿은 짠 기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인상 쓰며 으퉤퉤, 뱉는 시늉을 하자 병찬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잠 다 깼지?”

“참 곱게도 깨우시네요. 햄 몇살인데 이런 유치한,”

“형 아직 생일 안 지나서 20살인데?”

“헐. 진짜 유치해.”

병찬은 게슴츠레 노려보는 눈빛을 무시하고 도서실에 부른 이유를 물었더니 다행히 아까의 수상한 해프닝을 넘어갈 수 있었다. 그게 말이죠. 상호는 가방에서 투박한 노트북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잽싸게 치고는 병찬에게 화면을 들이밀었다. 왼쪽에 가지런하게 나열된 아이콘들과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파일들. 여전히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뭐야?”

“그 가운데 파일 클릭해봐요.”

나름 구역 별로 정리한 건지 정중앙에는 동영상 파일 하나만이 있었다. 패드 위로 손가락을 놀려 커서를 옮겼다. ‘단편 모음_진짜진짜끝6.mov’ 이건가? 클릭하자마자 화면에 익숙한 체육관이 먼저, 그리고 제 모습이 나타났다. 그동안 모니터링은 했어도 괜히 미련이 남을까 다시 찾아보지는 않았었다. 체육관 장면 이후로 짤막하게 찍은 클립들부터 꽤 정성들여 찍은 컷들까지 하나하나 지나갔다. 그저 이어 붙인 날것의 영상은 아니었다. 원작 장면의 배경음악은 기본이고 색감이나 그 외 디테일에서 최대한 비슷하게 따려하려고 노력한 티가 나는 편집이었다. 우리끼리 재해석한 것은 그것에 맞게. 기말 이후 점심시간에 코트에도 잘 안 나오고 어쩌다 마주치면 매가리가 없길래 걱정했었는데….

엉망으로 찍은 마지막 컷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까지? 상호의 성의를 봐서 눈을 가늘게 뜨고 겨우 끝까지 지켜봤다. 바로 첫 영상이 나왔던 것처럼 아웃트로도 없었다. 댕강 뜬 검은 화면에 상호와 제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편집된 21분짜리 영상 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간의 일들도 같이 스쳐 지나갔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어 말을 고르던 와중 상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디 올리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찍은 게 아까워서 좀 편집해봤어요.”

상호가 눈가를 긁적이며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쫌 엉성하긴 해도 모아보니 꽤 괜찮죠?”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짙은 다크써클이 마음에 콕 박혔다. 굳이 저밖에 안 나오는 영상들을 모아다 고생했을 상호에게 미안하고도 고마웠다. 아까워서 만들었다며, 엉성하다고 깎아내리긴 해도 누구를 위해 만들었는지 뻔히 보였다. 병찬은 얼마 전에 받은 문자를 떠올렸다. 망설이긴 했지만, 덕분에 마음을 다잡을 계기가 되었다.

“고생했다, 상호야.”

네가 담아주는 내 모습을 믿어보고 싶다. 그 확신에 찬, 빛나던 네 눈을 믿어보고 싶다.

“화면으로 본 내 모습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어.”

“네? 본판이 워낙 좋아서 보정할 것도 별로 없던데요, 뭐.”

“그런 것치고 다크써클이 심한데? 보충수업에서도 너 맨날 잤지?”

“…내일부터 다시 성실모드 드가면 돼요. 몰아서 200%로.”

감동의 순간은 얼마 가지 않고 또 금방 놀려대는 병찬이 얄미웠지만 이 가벼운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병찬이 킥킥거리다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그러고 보니 이때 좀 어이없었는데.”

“에, 뭐가요.”

“너무 뻔뻔해서. 이어서 해달란 것도 모자라서 체육관까지 끌고 갔잖아.”

“그런 것치고 햄도 열심히 했으면서. 대사도 술술 나오고. 어어, 사실 좀 기대했던 거 아니에요?”

“뭐래…. 내가 형이니까 너 맞춰준 거지.”

그렇게 둘만의 시사회가 시작되었다. 일일이 스페이스 바를 누르며 한 명이 한마디 하면 두마디가 이어지고 하다 보니 아까보다 배로 시간이 들었다. 상호의 생고생 비하인드를 들으며 호쾌하게 웃다가도 다시 화면을 쳐다보는 병찬의 눈빛은 꽤 진지했다. 질리도록 본 영상 대신 병찬의 반응을 훔쳐보던 상호는 문득 그동안 본 모습 중에서 가장 반짝반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래 매달렸나보다. 졸린 눈을 비비다 영상 한번 날리고, 늦잠 자다 등짝을 얻어 맞고, 그 외 기타 등등 현타오던 순간들이 저 눈빛에 단번에 묻혔다. 역시 완성하길 잘했다. 그나저나 햄은 진짜 배우 해야 할 것 같은데. 아이돌도 아니고 지금부터라도 준비하면 안 되나? 삼십 대에도 스크린 데뷔한 사람 있던데. 너무 내 욕심인가. 영상에 영 집중하지 못 하는데 뜬금없는 풍경 장면에서 병찬이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이때 뭔 일 있었지? 상호가 기억을 더듬는데 병찬은 딴소리를 했다.

 

"상호야, 너 전에 편집 배운 적 있어?”

“어, 그냥 옆집 삼촌한테서 간단한 자막 작업 정도 배운 적은 있어요. 본격적으로 해본 건 이게 처음이라서 유튜브 보면서 따라 하거나 삼촌한테 쫌 물어보면서 했고.”

“진짜? 가끔 생각했던 건데 상호 연출 쪽 재능 있는 거 같아.”

“네?”

“연기 조언해주는 거나 소품 디테일하게 챙기는 거나 의외로 잘하잖아.”

“의외로요?”

칭찬 같지 않은 칭찬에 눈을 흘기자 눈 이쁘게 뜨라며 꿀밤을 얻어맞았다. 아! 외마디 비명에 병 주고 약 준다고 병찬이 이마를 문질러줬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맞아서 그런가 진짜 개아팠다. 눈물이 찔끔 나오려는데 당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아무렇게나 찍을 줄 알았더니 매번 화면 구성이 나아지는 게 기본적으로 찍을 줄 아는 감각 있는 것 같고. 이거 편집한 거 보니까 음향이나 미술 쪽도 나름 확고한 기준으로 구현하려는 게 보여서. 물론 아마추어 티가 없진 않은데 그래도 어디 공모전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퀄리티인 것 같아.”

음, 사실 나도 이쪽 분야는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병찬이 말을 흐리며 이마에서 손을 떼고 시선을 틀었다. 딸깍, 영상이 다시 재생되었다. 상호는 아직도 아린 이마를 매만졌다. 맞은 부분에 열감이 느껴졌다. 이거 붓는 거 아냐? 하지만 아까만큼 마냥 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배알도 없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참기 위해 입술을 꾹 말아야 했다. 몇 번이고 들었던 병찬의 목소리와 쏴, 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도서실을 울렸다.

 

***

 

상호는 샤워 후 노곤한 몸을 바로 침대에 내던졌다. 오랜만에 일찍 자고 싶었지만 병찬이 무심하게 내뱉은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힘들어도 재밌긴 했지. 병찬이 일을 크게 벌리고 싶어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상대역을 생략한 채로 병찬 혼자서 이끌거나 각색했어야 했다. 제대로 만든다면,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솔직히 두어번 있었다. 게다가 3학년인 병찬이 2학기부터는 이만큼 시간을 내줄 수 없을 것 같아 내심 아쉬웠다. 하지만 새로운 길이 보이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밤이지만 분명 작업하고 있을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신호음이 두어번 울리기도 전에 삼촌이 전화를 받았다.

“어, 호야. 이 밤에 무슨 일이고.”

“삼촌, 내 물어볼 거 있는데 지금 괜찮나?”

 

 

같은 시각, 병찬은 휴대폰을 앞에 두고 애꿎은 입술만 뜯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결연하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마음 바뀌면 연락 달라는 메시지 밑으로 형식적인 안부 인사만 오간 흔적만이 남았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제 발로 찾아가게 되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마침표까지 찍은 결심이지만 쉽사리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다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빈 복도에 울려 퍼지던 제 목소리, 우물쭈물하면서도 솔직한 대답. 그 얼굴을 떠올리니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그땐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심호흡 후 한 글자씩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너무 늦은 시간인가? 하지만 지금 마음 먹은 김에 해치우고 싶었다.

[선생님 늦은 밤 연락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제안주신 거 말인데요.]

 

***

 

운동장 한켠으로 향하며 상호는 농구코트 위 사람 수를 빠르게 헤아렸다. 2학기 들어서 얼굴을 보기 힘들 줄 알았던 3학년 형들은 예상했던 것과 달리 몸이 찌뿌둥하다며 공을 튀기러 나왔다. 몇몇은 고삼이 여유 있냐고 장난치기도 했지만 손위 형제의 고삼 시절을 두 번이나 겪은 상호는 말을 아꼈다. 대신 세레모니할 때 조금 더 치대는 식으로 나름의 응원을 전했다.

도서부 사정은 조금 달랐다. 3학년은 공식적인 동아리 활동에서 완전히 빠지고 나머지 학년이 주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번 짝도 새로이 정했다. 데면데면하게 인사만 나눴던 인선이였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몇 번 말 나누니 병찬보다는 독서 취향이 비슷해서 생각보다 둘만 있는 시간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서실로 가는 길, 어쩐지 자꾸 창밖을 쳐다보게 되었다.

오늘은 혼자 방과 후 도서실을 지키는 날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그런가 만화책도 눈에 안 들어왔다. 어차피 혼자 있는 마당에 도서실 규칙은 유명무실이니 휴대폰을 꺼냈다. 괜히 카톡 창을 뒤적거리다 반장과 연애를 시작한 후로 개꼴값을 떠는 희찬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희차이 뭐하노. 당연히 답장은 없었다. 주르륵 내리다 보니 병찬햄과의 마지막 카톡이 보였다. 개학하기 일주일 전쯤이었다.

[햄]

[2학기부터는]

[짤막하게 찍는 것도 좀 힘들겠죠?]

[응..]

[좀 바빠질듯]

[ㅠ고삼 화이팅이요]

[상호도 3학년 때 고생 안 하려면 지금 열심히 해]

[울 누나랑 똑같은 말하네요]

[ㅡㅡ]

[ㅋㅋ얼른 자]

[또 다크서클 생길라]

[넵]

[햄두요]

이전까지는 영화나 드라마 이야기 말고도 종종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었었는데 어째 단출하게 끝나버린 그날의 대화. 그 이후로 별다른 연락을 하지도, 오지도 않았다.

 

 

병찬은 개학한 후 3일이 지나고 목요일에나 코트에 얼굴을 보였다. 상호가 진짜 오랜만이네요 햄, 하고 인사를 건네자 그러게, 하고 씩 웃는 게 끝이었다. 아쉬움에 뭐라도 말을 더 붙여볼라 하니 다른 3학년 형들이 재촉해 몸도 다 못 풀고 얼른 제 자리로 찾아갔다. 타박을 귓등으로 흘리며 반대편 코트로 시선을 돌리자 병찬과 눈이 마주쳤다. 입을 벙긋 거리길래 눈을 찌푸려가며 입 모양을 읽으려다 선공권이 뺏긴 줄도 모르고 멀뚱히 서 있는다고 또 한소리 얻어먹었다.

간만에 치열했던 한 판을 끝내자 점심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마무리하려던 찰나 초원이 매점빵을 걸고 한 판 더 콜했으나 반응이 시원찮아 보이자 쫄을 외쳤다. 9월이지만 아직 남아있는 여름의 열기가 코트 위로 아른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기어는 남고딩의 코어를 건드렸고 누군가가 하복 셔츠를 벗어재꼈다. 땀 뻘뻘 흘리면서 꿋꿋하게 2:2를 진행하는 넷을 두고 나머지는 그늘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상호는 손부채질을 하고 있는 병찬에게 슬쩍 다가갔다.

“햄, 아까 뭐라고 한 거예요?”

“뭐가?”

“시작하기 전에 뭐라 했잖아요.”

병찬은 과장되게 눈을 굴리며 떠올리려고 애쓰는 척을 하더니 기억 안 난다며 속없이 웃었다. 더 따져 묻기에 애매해져 덕분에 욕 얻어먹었다며 툴툴거렸다. 곁에 있던 태영이 상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쭈, 상호야. 지금 우리 병찬이 형 탓하니?”

“진짜 병찬햄이 먼저 헷갈리게 했어요.”

“내가 봤는데 걍 님이 얼 타고 있었음.”

“헐. 다은햄은 제 편들어야죠.”

“오늘 자유투 던지는 꼬라지 보니까 일단 님 잘못임.”

어느새 누가 패배의 원인인지 시끌시끌하게 다투는 와중 예비종이 울렸다. 바닥에 대충 던져둔 셔츠 주인들이 다가와 무슨 얘기하냐고 물었다. 희찬이 범인잡기 중이라고 하자 준수가 픽 웃으며 한 마디 거들었다.

“원래 찔리는 놈들이 말이 많아.”

열심히 떠들던 둘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내기에서 이겨 기분 좋아진 태성이 까까 사줄 테니 기분 풀라며 입술 삐죽 내민 후배를 달랬다. 금세 히히거리는 상호 옆에서 희찬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요!”

“마, 니가 오늘 꿈자리 좋다고 해놓고 졌잖아.”

“와, 걍 사주기 싫다 해요. 은재 누나는 햄 그러는 거 알아요?”

“…너는 진짜 국물도 없는 줄 알아라.”

둘이 계속 투닥거리자 준수가 정신 사납다며 자신의 몫을 희찬에게 넘겼다. 이젠 상철과 성인이 조르기 시작했다. 결국 초원이 니네들 이따 쉬는 시간에 재깍 안 나오면 무효라고 엄포를 놓고서야 일단락되었다.

다음 쉬는 시간에 초원과 성훈은 태성을 따라 나온 다른 2학년들에게도 뜯길 뻔했으나 병찬이 맡아준 덕분에 지갑 사정을 조금이나마 지킬 수 있었다. 상호와 희찬이 폴라포를 하나씩 입에 물고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병찬이 다가왔다. 한 손에는 방금 깐 비비빅이 들려있었다. 뒤의 2학년 형들도 같은 걸 보아하니 메뉴 통일 압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호는 2학기도 금요일 담당?”

“네. 내일부터 김인…. 아, 김인선이랑 하게 됐는데 별로 얘기 안 해봐서 좀 어색할 것 같아요.”

“그럼 형 놀러 갈까?”

“제가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다음 주쯤에 저 혼자 하는데 그때 와요. 옆에서 공부해도 되니까.”

“기상호 별관에 혼자 있음 무서울 거 같대요~”

“진짜? 그게 더 애 같다, 상호야….”

“아, 정희찬이 먼저 겁줬다구요. 쟤가 어디서 이상한 괴담 알아와가지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희찬이 아기상어 노래를 불러댔다. ‘귀여운’ 부분을 개사해서 무궁무진하게 상호를 놀리는 데에 쓰이는 그 노래는 2절에 3절까지 날이 갈수록 버전업을 했다. 먹금을 하려고 상호는 안 들리는 척 했으나 병찬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하, 형아가 꼭 가줘야겠네.”

“햄까지 왜 그래요….”

“이 행님도 종종 놀러 가줄게.”

“이럴 때만 행님이지….”

한두 번 받는 애 취급도 아닌데 괜히 민망했다. 장난기 어린 시선들을 무시하고 단물을 쪽 빨아먹어 밍밍해진 얼음을 부러 와그작 씹어먹었다. 급하게 얼음을 씹어 삼킨 탓에 골이 찡해 머리를 부여잡았다. 통증은 금방 가셨지만 감았다 뜬 눈에 소리 없이 슬 올라간 병찬의 입꼬리가 제일 먼저 보였다. 천천히 먹으라는 말에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넵. 오랜만에 본 얼굴인데 오늘따라 바보 같은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 입 다물고 얌전히 남은 얼음쪼가리를 녹여 먹었다.

합심해서 노래를 따라 부를 때는 언제고 형들은 어느새 저들끼리 투닥거리고 있었다. 길쭉길쭉하니 찍으면 꽤 화면발을 잘 받을 것 같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만 보면 청소년물의 진지한 질풍노도의 한 장면이었다. 실상은 아직 한 여름 날씨에 팥붕이냐 슈붕이냐 취향 무시 발언이 난무하는 현장이었지만. 병찬이 쏘아 올린 비비빅을 화면 너머로 관전하던 중 병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상호, 요즘도 뭐 찍는 거 있어?”

“아뇨. 그냥 이것저것 찍는 거예요, 연습 삼아.”

“아, 그래?”

삼촌에게서 카톡이 와 일단 녹화를 끊었다. 답장을 보내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쉬는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마침 성훈이 이만 들어가자고 정리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터는 동안에 병찬은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

 

“햄, 병찬햄. 슬슬 교실 가죠.”

“어? 어어. 가야지.”

상호는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이목을 끄는 거대한 무리에서 두어발짝 떨어져 뒤따라갔다. 또 쓰잘데기 없는 주제로 시끌벅적한 것이 아까 장면에 이어 붙이면 그럴듯할 것 같아 다시 카메라를 켰다. 이번에는 얼마 가지 않아 희찬에게 걸려 모두의 주목을 끌었다. 초상권 침해라며 야유를 받았다. 와중에 브이로그 찍듯이 희찬이 오늘 매점빵 주인공을 끌고 와 초원과 성훈이 머쓱하게 카메라에 대고 인사를 했다. 이를 자연스럽게 이어 받은 다은이 2학년 아이스크림 통일의 권위자라며 병찬을 소개했다. 에라 모르겠다, 상호는 왼편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병찬은 남의 일인 양 관망하고 있다가 퍼뜩 입에서 막대를 빼냈다. 막대에는 잇자국이 잔뜩 나 있었다.

“하하, 얻어먹은 녀석들이 말이 많네요. 비비빅 참맛을 모르다니, 아직 많이 부족한 친구들입니다.”

“와. 진짜 꼰대, 아니 할배입맛임.”

“다들 맛있게 잘 먹어놓고 이런다. 그치, 상호야?”

“네?”

병찬은 갑작스레 멘트를 토스 받아 얼떨떨해하는 상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내 돌려 잡았다. 그러고 쭉 뻗어 모두에게 마무리인사를 시켰다. 앞서가던 녀석들이 야유를 할 때는 언제고 자기들은 안 나온다며 불만을 내뱉었지만 병찬은 가볍게 무시하고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대꾸했다. 후면 렌즈라 누가 나오고 안 나오지 알 수가 없기에 모두가 병찬과 상호 쪽으로 들러붙기 시작했다. 상호는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며 뒤를 체크하는데 병찬이 앞을 쳐다보라며 어깨를 꽉 붙잡았다.

“이제 수업에 들어가야 해서 이만 여기서 끊겠습니다. 안녕~”

병찬은 이상적인 마무리 멘트를 쳐놓고도 카메라를 끄지 않고 상호를 쳐다봤다. 뭘 바라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상호는 일단 마지막 말을 따라 했다. 아, 안녕히 계세요. 나름 목도 꾸벅 숙였다. 병찬은 으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뒤에서는 안녕, 근데 이거 뭐 하는 거예요, 좋아요와 구독 등을 외치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겹쳐 들려왔다. 어수선함 속에서 드디어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아, 이런 것도 재밌네.”

“그쵸. 가끔 다은햄이랑 희차이랑 유튜버 놀이하는데 재밌어요. 근데 햄은 왜케 잘해요? 혹시 이것도 연기?”

“뭐? 여기서 연기할 게 뭐가 있다고. 그냥 분위기 맞추는 거지.”

“오….”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헉, 누군가의 짧은 외마디와 함께 학년별로 찢어져 다들 제 건물을 향해 뛰어갔다.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 다행히 간발의 차로 선생님보다 일찍 들어갈 수 있었다. 교무실 바로 옆 반인 희찬의 사정은 좀 다르겠지만…. 아무튼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교과서를 찾아 서랍 속을 뒤적거렸다.

지각을 겨우 모면해서인지 선생님과 눈이 자주 마주치길래 반강제로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상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까 병찬이 휴대폰을 들었을 때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떠올라 바로 갤러리에 들어가 마지막 영상을 재생했다. 역시나 병찬과 제 얼굴만이 제대로 나왔다. 나머지 사람들은 키가 크기도 하지만 병찬이 어정쩡하게 든 탓에 다들 앵글에서 묘하게 다 벗어났다. 단톡에 올리려다 3학년 형들 몇몇이 빠지기도 했고 또 야유나 받을 것 같아 관뒀다.

 

 

……. 왁자지껄한 매점 영상을 다 봤더니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도서실이 더욱 고요하게 느껴졌다. 희찬의 답장은 여전히 없었다. 지 필요할 때만 찾고, 매정한 놈. 너도 결국은 우정보다 사랑이냐. 사실 놀러 온다던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하지만 빈말에 기대를 걸었다 실망하고 싶지 않아 상호는 일부러 만만한 희찬을 두배로 원망했다. 같은 말인데도 무게감이 다른 이유는 한 구석에 밀어 넣고 외면했다.

어찌저찌 무료한 시간의 끝은 다 와 갔다. 구닥다리 수기 장부에 반납과 대출 칸에 각각 ∅ 표시를 하고 다음에는 노트북을 가져와 영상 정리라도 할까 아니면 삼촌이 알려준 강의라도 몰래 들을까, 같은 불성실하면서도 생산적인 방안을 궁리했다. 마지막까지 공평하게 흘러가는 초침을 바라보며 오늘 석식 메뉴를 떠올렸다. 뛰어갈지 말지 고민하던 중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정희찬, 밥 먹을 때만 찾냐? 그래도 동아리 활동이 끝나기 전에 답했으니 정상 참작을 고려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희찬은 끝까지 매정했다. 사실 별 상관없는 희찬의 답장보다 훨씬 나았다. 기대감을 애써 외면해서까지 기다렸던,

[상호]

[도서실?]

네! 반가운 마음에 육성으로 대답이 튀어나올 뻔했다. 얼른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꼭 쥐었다. 읽음 표시로 바로 바뀌었지만 혹여나 놓칠까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 지금이라도 갈까?]

[네네]

[가봣자 5분이ㄱ]

[ㅋㅋ상호 많이 심심했구나]

[엄청요ㅠㅠ]

[사실 별관이야]

[곧 도착]

퍼뜩 고개를 드니 저 문 너머 조용한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그러나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듯했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에 맞춰 속이 널뛰는 기분이었다. 으음. 명치 언저리를 누르며 갑작스레 이상한 속을 달래는 중 반가운 손님이 들어섰다. 상호야, 형 왔다.

 

“햄!”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상담이 길어져서, 미안. 근데 왜 그래? 체했어?”

병찬이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 걱정하는 저 얼굴을 보니 내심 서운했던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이게 누나가 말한 얼굴 공격?

 

“체한 건 아니고 그냥 갑자기 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깐. 음, 보건실은 닫았을 거고….”

“에, 보건실 진짜 오바예요. 별거 아닌데.”

“일단 손 줘 봐. 체하거나 속 안 좋을 때 여기 지압하면 된다고 들었어.”

대답할 틈도 없이 병찬은 손을 낚아채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눌렀다. 아윽, 신음이 절로 나왔다. 아프다고 찡찡거려도 봐주지 않아 결국 꾀병을 부린 건 아니지만 괜찮아졌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병찬은 미심쩍은 듯 쳐다봤으나 상호의 열변에 마지못해 손을 한번 꽉 쥐고는 놓아줬다. 얼른 얼얼한 손을 부여잡고 병찬이 쥐어짠 혈 자리 위를 살살 문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찬이 엄살 부리지 말라며 한 소리했다. 엄살 아니거든요. 욱하는 마음에 말이 불퉁하게 나갔다. 병찬은 제 손을 꾹 눌러 보더니 이게 아프냐고 한 소리 했다.

“아니, 자기가 누르니깐 그렇죠. 햄. 손 줘보세요.”

순순히 내민 손을 잡고 아까 그 부분을 꾸욱 눌렀다. 병찬은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릴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기가 생겨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다해 눌렀지만 병찬은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이 햄이 진짜. 결국 먼저 팔에 힘이 달린 상호가 나가떨어졌다. 때아닌 힘자랑은 병찬의 승리로 끝났다. 질린 눈으로 쳐다보자 병찬이 헛기침을 했다.

“솔직히 좀 참았죠?”

“….”

어? 자기도 유치했다는 자각이 있나 본데? 막내로 산지 약 어언 16년, 상호는 나이 차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를 파고들었다.

 

“햄, 지금 좀 창피해요?”

병찬이 반대쪽으로 얼굴을 피했지만 슬쩍 보이는 볼이 붉었다. 오랜만의 승기를 놓칠세라 냉큼 따라붙어 입을 놀렸다.

“후배 이겨 먹으려고 이 악물고 참는 사람이 있다? 아무것도 안 걸려 있는데 굳이? 하긴 밥을 몇그릇을 더 먹으셨는데 아무렴 이기셔야죠.”

 

“알겠으니까 그만….”

“히히, 넵.”

보기 드문 병찬이 쩔쩔 매는 모습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기에 입에 지퍼를 채웠다. 물론 과장되게 합, 소리를 내면서. 병찬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만 흘리고 말았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티키타카를 시작으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떠들었다.

 

최세종의 새로운 컨텐츠인 도장 깨기를 같이 보던 중 병찬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이고. 상호가 의아하게 쳐다보니 병찬이 시계를 가리켰다.

“석식시간 끝나간다, 상호야.”

병찬의 손가락 끝을 보니 급식소 가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헐, 진짜. 매점 가서 뭐라도 후딱 사 먹을까요?”

“그래야겠다. 너무 오래 붙잡아뒀나? 내가 사줄게.”

오예~ 병찬의 말버릇을 따라 하며 얼른 자리를 정리했다. 병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섰다. 기상호 자꾸 형 놀린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게 혼내려는 건 아닌 것 같아 모른 척 뻗댔다. 아아, 제가 언제요.

 

불량스러운 소스 맛 범벅인 햄버거로 대충 떼운 후 포카리로 입가심했다. 배가 애매하게 차긴 했지만 병찬이 되새김질 하는 소처럼 우물우물 씹는 모습을 보니 부족하다고 보챌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병찬이 먼저 매점에서 뭘 사 먹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튼 깨작깨작 편식하는 희찬과 다른 타입의 맛대가리 없게 먹는 유형이었다.

“좀 더 먹지. 안 모자라?”

“됐어요. 입맛이 없어서.”

“봐봐. 아까 속 덜 풀린 거 맞지? 손 내놔. 다시 눌러줄게.”

“아, 좀! 그러는 햄도 별로 안 먹었잖아요.”

“난 불량식품은 많이 못 먹겠더라.”

“역시 울 학교 최고 연장자.”

기막혀 하는 얼굴 위로 어쩐지 빠직 마크가 보이는 것 같아 황급히 손을 뒤로 감췄다. 이거 백 퍼 멍든다. 말을 돌리기 위해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나저나 햄 내일 뭐 해요?”

“음, 볼일이 있어서 서울 가려고.”

“서울요? 입시설명회 같은 거요?”

“음…. 뭐, 비슷해.”

어물쩍 넘어가려는 걸 보니 병찬에게도 입시는 불편한 주제인가 싶었다. 고삼은 고삼이구나. 주말에 바빠질 거라고 언질을 줬으니 뭘 바라고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괜스레 마음이 헛헛해졌다. 병찬햄없는 도서부 활동은 재미도 없고, 점심시간에나 가끔 다 같이 볼 테고.

 

“근데 왜? 주말에 뭐하게?”

“뭐 안 해요. 그냥 물어봤어요.”

“음…. 그러면,”

“어? 상호. 뱅찬햄이랑 있었나.”

“정희찬! 니 왜 폰 안 보는데.”

딱 보아하니 여태 반장과 같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희찬은 종알종알 익숙한 불평을 무시하고 반장에게 병찬을 소개했다. 얼마 말 섞지도 않고 병찬이 1학기 초반에 얘기한 첫사랑 그 친구냐고 아는 체했다. 희찬이 당황해하는 기색을 놓치지 않고 병찬은 혹시 비밀이었냐며 입을 헙, 막고는 미안해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희찬이 부끄러워하는 구석을 콕콕 쑤시는 게 상호 눈에도 보였다. 결국 반장이 이제 곧 야자시간이라며 요령 좋게 해산시키려 했다. 오, 희찬이 여자친구 잘 사귀었네. 이 햄이 진짜 오늘따라 아저씨같이 왜 이래. 희찬에게 등 떠밀려 쫓겨나면서도 병찬이 꿋꿋하게 눈을 찡긋거렸다.

“상호야, 형 간다~ 희찬이 여자친구도 안녕~”

“아! 병찬햄! 빨랑 가요!”

멀어져가는 병찬과 희찬을 지켜보다 상호는 대신 사과를 건넸다.

“반장, 미안. 저 햄이 원래 저래 심술맞은 사람은 아인데.”

“괜찮아~ 너네랑 친하니까 장난친 거겠지.”

“그런가….”

“사실 의외로 좀 유치하긴 하더라. 뭔가 좀 어려운 선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병찬햄이 그런 이미지인가? 틈만 나면 제게 실없는 장난을 치는 편인지라 이런 평판이 되려 낯설었다. 그렇다고 곧장 반박하자니 제게도 병찬의 첫인상은 그런 편이었던 것 같고. 병찬의 이미지에 고찰 아닌 고찰을 한다고 가만히 있었더니 반장이 굳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아, 내 말은 저런 모습이 훨씬 좋다구. 뭔 말인지 알지?”

“그래서 니가 정희찬이랑 잘 맞나보다.”

“무슨 의미지?”

퍽, 한 대 얻어맞은 팔이 살짝 얼얼했다. 악! 반장이 사람 때려도 되는 거? 됐고, 너 빠른이라매. 누나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냐? 아오, 정희찬도 틈만 나면 행님거리더니 이제 쌍으로 피곤하게 굴겠네. 그놈의 빠른 논쟁은 예비 종소리 덕분에 멈추었다.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희찬을 두고 10반 동급생은 반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란히 계단을 올라가던 중 반장이 점심시간 농구 얘기로 꺼냈다. 얼마나 재밌길래 희찬이나 너나 점심시간마다 꼬박꼬박 코트로 달려 나가는지 궁금해서 몇 번 지켜봤다고.

“운동장만 빙빙 도는 것보단 재밌지.”

“밥 먹고 바로 뛰면 배 아프잖아.”

“별로.”

무심한 대답에 반장이 흘겨봤다. 다년간 누나에게 얻어맞은 눈치로 옆으로 슬쩍 비켜 걸었다. 발을 따라 입에서도 반사적으로 변명이 튀어나왔다. 가끔 아팠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좀 참으면 금방 괜찮더라…. 얌전히 꼬리를 말자 반장은 한 번 봐주기로 했는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아무튼 룰 몰라도 재밌어 보이더라.”

“맞나.”

“슉슉 피해서 골 넣을 때는 좀 멋있기도 하고.”

슉슉 피해서? 저렴한 해설에 살짝 아리까리하지만 몇몇 순간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공이 유독 손에 착착 달라붙었던 그날인가?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낯간지럽기도 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저보다 잘하는 형들 플레이도 봤을 테니 최소한의 겸손을 떨었다.

“그래도 내는 아직 못 들어가는 게 태반이다.”

“응, 상호 너는 좀 그렇더라.”

주어 없는 칭찬에 된통 당했다. 잘난 체 안 하길 잘 했다. 들키지는 않았겠지만 머쓱한 마음에 애꿎은 입술만 말아 물었다.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반장은 자기 할 말만 이어갔다.

“저번에 날씨 좋을 때 희찬이 보여주려고 찍은 게 있는데. 잠깐만 기다려봐.“

옆에서 맨날 보는 정희찬 플레이야 별로 안 궁금하지만 어쩐지 따를 수 밖에 없는 익숙한 오오라에 얌전히 멈추어 섰다. 얘도 동생 있나? 누구처럼 이래라저래라. 제가 쫄보인 건 생각 안 하고 상호는 한국 사회의 억울한 유교 순리만 탓했다. 내가 이래 된 거는 다 형누나 말 잘 들으라고 세뇌당한 탓이다. 머릿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자니 이번에는 멍때리지 말라며 또 한 소리 들었다. 멍때린 거 아니거든, 반박하는 와중에 익숙한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예상과 달리 희찬의 야심찬 플레이가 아니라 리바운드를 따는 상훈햄과 아쉬워하며 백코트 하는 희찬의 모습이 재생되었다. 상훈의 패스를 받은 병찬이 곧바로 속공에 들어가지 않는 걸 보아하니 후반 부분인 듯했다. 그럼에도 여유만만한 미소가, 음. 역시 병찬햄. 코트 위에서 보면 엄청 얄미운데 이렇게 보니 엄청 멋있다. 가끔 코트 옆에서 서성거리는 누나들이 내심 이해가 갔다.

결국 저희 팀이 한 골 먹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멈추었다. 그런데도 딱히 기분 나쁘지 않았다. 반장 말대로 뛰고 있는 모두가 즐거워 보여서. 세레모니하던 조형팀이나 투닥거리던 저희 팀이나 그 순간일 뿐 멈춰버린 화면 속 시선들은 한 곳으로 모여있었다. 주황색 공, 학교 소유인지 아니면 햄들 중 누구 개인 공인지 아무튼 매번 들고나오는 사람이 달라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보기만 해도 텅, 바닥에 튕기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아, 이날도 봐볼래? 반장은 상호의 의사를 묻지 않고 다른 영상을 더 보여주었다. 내기가 걸렸는지 평소보다 골 밑 빅맨 형들의 자리싸움이 빡셌다. 그러다 운 좋게 들어간 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세레모니하는 희차이. 그 옆에서 오바하며 상대편을 약 올리는 저와 다은햄. 입 모양은, 음… 익숙한 두글자지만 그래도 꽁으로 얻은 2점이 나쁘지 않은지 씩 웃고 있는 준수햄. 열받아 하는 초원햄에게 여유롭게 공을 넘기는 재유햄. 모두 땀을 티셔츠 자락으로 연신 닦는 모습이 초여름 즈음인 것 같았다. 사실 저 날 이겼는지 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표정들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신나 보였다. 이런 모습이구나.

“진짜 재밌어 보인다.”

“당사자가 그렇게 말하니까 웃긴다.”

“아니, 그…, 이렇게 보니까 뭔가 새삼스러워서.”

“희찬이는 자기가 이 정도로 촐싹거리냐고 충격받더라.”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게 까부는 모습에 조금 깬 터라 모른 체 딴지를 걸었다.

“근데 이거 초상권 침해 아이가. 찍는 줄도 몰랐는디.”

“인생샷 남겨줬으니까 대충 퉁 쳐.”

인생샷? 상호가 보기에는 얼굴 반반한 형들이나 잘 나오고 나머지는 고만고만했다. 영상미도 솔직하게 따지자면 그저그랬다. 코트 측면에서 찍은 터라 플레이가 잘 보이는 것도 아니고 누구 한 명을 중점적으로 찍어 돋보이게 하는 포인트도 없는, 그냥 딱 지나가는 누군가의 시점으로 보는 듯한 무난한 영상이었다. 물론 쨍쨍한 자연광 치트키 덕분에 원본이어도 적당히 봐줄 만했다.

“햄들이야 뭐 막 찍어도 잘 나오지.”

“아니, 그런 인생샷 말고~”

응? 그런 인생샷? 제 의아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반장이 말을 이었다. 그니까 음, 뭐라고 해야 하지…. 누구처럼 찰떡같이 알아듣는 요령이 없는 이에게 정답 없는 해설지를 쥐여주려니 반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래도 반장은 나름의 설명을 보충해줬다.

“땀 뻘뻘 흘리면서도 재밌다고 점심시간 쪼개서 공놀이 하는 그런 게 좀 십 대다운 청춘 같잖아. 너나 희찬이나 나중에 고등학생 때 뭐 했나 하면 농구 하러 튀어 나갔던 기억이 먼저 떠오를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인생샷이란 거지.“

똑부러진 단언에 비해 설명은 뜬구름 같다고 생각하던 차에 반장이 머쓱하게 되물어왔다. 뭔 말인지 알겠어? 일단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어, 대충.

“아무튼 네가 봐도 진짜 재밌어 보인다며. 잘 나오고 못 나오고의 문제보단 그게 포인트란 거지.”

그니까 추억, 뭐 그런 얘기네. 어른들이 말하는 ‘십 대 금방 지나간다,’ ‘젊긴 젊다,’ ‘너만 할 때는 나도—.‘ 음, 이건 너무 멀리 갔나. 아무튼 기억에 없을 정도로 일상적인 순간들이지만 타인의 시점으로 다시 보게 되니 은근히 감회가 새롭긴 했다. 하지만 당장은 교실로 가야 했기에 둘은 다시 계단을 올랐다.

졸업앨범에도 안 나오는 추억 내가 남겨준 거다? 반장이 한마디 남기고 먼저 교실로 들어갔다. 그 말에 뒤이어 문턱을 넘으려던 발이 멈칫했다. 수능이라는 일생일대의 이벤트에 가려진 졸업. 제게는 아직 먼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몇 달도 안 남았다. 바로 교실에 뒤따라 들어가지 못한 채 눈만 껌벅거렸다. 졸업앨범에도 안 나오는. 이제야 반장이 말한 낯간지러운 부분이 살짝 와닿았다. 등을 가볍게 치는 감각에 번뜩 뒤를 돌아봤다. 선생님이 안 들어가고 뭐 하냐길래 그제야 문 너머로 발을 옮겼다. 이미 제 자리에 앉아있던 반장이 얄밉게 소곤거렸다. 또 멍때렸지?

뭔가 써 내려가는 모습은 야자 시간에 융화된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필기한 것은 내년에 학교에 없을 이름들이었다. 상호의 머릿속은 아까 석식시간의 연장이었다. 당장 자주 얼굴을 보지 못해 아쉽기만 했지, 그 이후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자기도 기억에 남지 않은 것처럼 형들도 그렇겠지. 근데 겨우 한 학기 같이 농구 좀 했다고 이렇게까지 정 붙을 일인가?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희차이랑 다니다 보니 결국 저도 모르는 새에 감성적인 마음이 옮은 모양이었다.

졸업앨범에도 안 나오는, 점심시간에 잠깐 같이 농구 하던 후배…. 잊혀지겠지. 그건 좀 싫다.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끄집어내진 열망을 마지막으로 펜을 내려놨다. 마침표를 찍으며 스쳐 지나간 얼굴에 직감적으로 더 파고들면 골이 아플 것 같았다. 생각의 환기를 위해 기지개를 켰다. 그러나 두리뭉실한 감정이 활자의 형태로 빼곡하게 들어찬 페이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그중 여러 번 덧쓰여진 이름이 눈에 띄었다. 결국 두 손이 머리칼을 파고들었다. 병찬햄은 같은 도서부고, 또 주말에 따로 많이 만났으니까. 그리고 또 나보고 잘한다고 했고…. 잘생겼고…. 아무튼….

대상 없는 변명은 이만하고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 가망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졸업앨범에 끼어들 수 없으면 그럼 내가 따로 남기면 되지. 마침 반장이 찍은 영상이 힌트가 되었다. 이를 토대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중간중간 매점에서 찍은 것 같은 일상 파트도 좀 넣고. 오랜만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아쉬움은 잠깐 물러가고 열의가 올라왔다. 스토리보드를 휘갈기던 손이 멈칫했다. 두 번째 난관에 부딪혔다. 심각한 건 아니지만 나름 중요한 문제, 프로젝트명은 뭐라고 할까. 저번처럼 단편 모음집 같은 멋없는 제목 말고. 인생샷같은 애매한 정의 말고. 

문득 어제 보던 NBA 경기 영상의 제목이 떠올랐다. ‘하이라이트 필름 추가한 르브론.’ 하이라이트 필름, 이거 좋은데? 점심 농구 한 판에는 거창할지 몰라도 삼촌이 프로젝트명도 간지나게 지으라고 했으니까.

 

날림이지만 쉬지 않고 몇장을 내리 그리고 메모한 탓에 손이 뻐근해졌다. 상호는 손 마디마디를 마사지하며 러프를 전체적으로 훑었다. 윽. 예상치 못한 통증에 미약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노트에서 눈을 거두고 제 손을 바라보니 아까 병찬이 쥐었던 혈 자리에 그새 멍이 올라와 있었다. 아주 살짝 푸르스름한 멍이지만 괜스레 야속했다. 하지만 탓할 수도 없었다. 비록 병찬이 피워냈지만 오롯이 혼자 앓아야 하는 통증이었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다. 미디어는 미디어일 뿐. 친구의 썸이나 연애는 결국 내가 아닌 누군가의 일화일 뿐. 해피엔딩은 모두에게 통용되는 공평한 것이 아니다. 그래, 통증은 참으면 언젠가 지나간다. 너무 오래 아프지 않길 바라는 수 밖에.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다은햄이랑 낄낄거리며 했던 순정만화 명장면 월드컵 우승 짤이 제 상황이 될 줄 몰랐다. 사랑이 달콤하다 한 새끼들은 다 죽여버릴… 아, 정희찬은 반장이랑 맛있는 거 쏜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 봐준다. 누나는 어제 새벽에 들어온 거 이를까? 복수의 고소함과 후폭풍을 저울질하다 제가 한 번 봐주기로 했다. 기상호, 기씨 가문 중에서 제일 봐줄 만한 얼굴에 마음도 넓고. 이거이거 완전. 샛길로 빠진 자화자찬은 평소와 달리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무서워서 암것도 못 하는 등신이라는 얘기밖에 더 되나. 이런 무력감까지 통증의 일부인 건지 처음이라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 역시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다.

***

 

오랜만에 찾은 주말의 도서실은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병찬이 열쇠를 테이블에 올려놓자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잘그락하고 깼으나 다시 찾아오는 적막이 되려 도드라졌다. 평소에도 어쩌다 한두명 정도 찾는 조용한 곳이지만 난방 돌아가는 소리조차 나지 않으니 유독 고요했다. 중앙제어시스템을 뚫니 어쩌니 하며 시시덕거리던 날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들어봤자 쓸데없는 꼼수들이야 얼마 안 가 머릿속에서 지웠겠지만 당장은 주의를 돌릴 딴 생각이 절실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냐.

병찬은 테이블에 걸터앉아 할 말을 곱씹다 근질근질한 마음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일단 일어섰다. 책장 사이를 배회하며 지난 학기와 달라진 점을 찾아 나섰지만 몇 권의 신권이 끝이었다. 굳이 한 권을 뽑아다 몇 장 들춰 보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혼자 있으니까 더 긴장되는 것 같기도. 그냥 밖에서 만나자고 할 걸. 잠깐 후회가 들었으나 금방 고개를 내저었다. 여러모로 자신에게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내년에는 외부인이라 함부로 못 들어올 테니 마지막으로 둘러볼 겸. 뭐, 아마 부탁하면 상호가 몰래 들여보내 주겠지만. 저보다 더 눈치 보며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긴장으로 굳었던 입꼬리가 풀렸다. 역시 여기가 아니면 안 되었다. 병찬이 생각을 마무리하며 책을 덮자마자 드르륵, 미닫이문이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저 왔어요.”

“왔어?”

오랜만에 보는 사복이었다. 한 겹 벗은 겉옷 아래 꽉 동여맨 후드 끈을 보아하니 오는 길에 세찬 바람에 시달린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뻗친 머리칼은 평일에 보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몰래 웃음을 삼켰다고 생각했지만 시선은 숨기지 못했는지 상호가 입을 삐죽거리며 머리를 정리했다.

“겨울은 얼마나 추울라고 11월이 이래 춥대요.”

“곧 수능이라서 그런가 봐.”

무슨 금기어라도 들은 것처럼 상호의 눈이 땡그래졌다. 어, 그쵸…. 수능, 이죠…. 초, 초코렛이나 찹쌀떡 좀 사 올 걸 그랬네. 아, 지금이라도 사 올까욥. 더듬거리며 할 말을 찾아 잇는 꼴이 귀여웠다. 제 앞에서는 저렇게까지 눈치 볼 필요 없는데도. 연영과 입시는 때를 놓쳤으니 대신에 오디션에 집중하기로 이사님과 결정한 건 자신에게는 두어 달이나 지난 일이지만 말한 적도 없으니 상호가 저리 눈치 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섭섭하려나? 그래도 우리 학교 애들 중에서 제일 먼저 말하러 왔으니 봐줘라.

“추운데 뭘 또 나가. 됐어~”

“넵.”

바로 주섬주섬 챙겨 든 겉옷을 내려놓는 꼬락서니에 병찬은 실소를 하였다. 눈치를 잔뜩 보는가 싶다가도 이렇게 빈말을 넙죽 받아먹을 때면 어이가 없었다. 그럼 역시 한번 골려줘야지. 병찬은 비아냥스레 흘겨보며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다른 애들은 얼굴 오래 안 보이면 종종 안부라도 묻던데 상호는 따로 연락도 없고. 내가 도서실에 찾아가야 겨우 시간 내주고. 그래도 우리 좀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좀 섭섭하다?”

적당히 꼽주는 척 하려던 말이 남사스럽게 애정의 크기를 재는 투정이 되어 버렸다. 저도 모르게 유치한 진심을 뱉은 입을 급히 다물었으나 얼굴은 이미 살짝 화끈해졌다. 다행히 상호는 변명하느라 친한 형, 동생 사이에 할 법한 말인지 아닌지 헤아릴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병찬햄은 그런 거 묻는 거 싫어하는 줄 알았죠. 저라고 안 궁금했겠어요. 그냥 남들 다 그러는데 저까지 그러면 부담스러울까 봐 참은 거예요.”

진짜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더니 상호가 눈을 슬쩍 피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다른 후배가 그랬다면 고마운 배려였을 것이다. 하지만 유치하고 말고를 떠나서 병찬은 여전히 탐탁지 않았다. 눈치 보니 어쩌니 해도 사실 사려 깊은 녀석인 걸 안다. 아마 재유나 초원이 에게도 그랬겠지. 그래도 여기까지 내비쳐 속 좁은 형이 되고 싶지는 않아 알았다고, 장난이라고 무마했다. 햄은 장난 함부로 치지 마세요. 진짜 같다구요. 상호가 부루퉁한 얼굴로 노려봤다. 하하, 미안미안.

그래도 웃는 낯에 침은 못 뱉는다고 상호는 뾰족한 눈길을 거두고 가방을 풀기 시작했다. 어라. 놀리다 보니 불러낸 용건을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듯했다. 갑자기 분위기 잡기도 그렇고, 아니 잡긴 뭘 잡아. 그런 얘기가 아닌데. 답지 않게 병찬은 얼을 탔다. 혼자 짐을 풀다 말고 상호가 가만 서 있기만 하는 병찬 쪽을 향해 두리번거렸다.

“근데 햄. 암것도 안 들고 왔어요? 노트 하나 안 보이는데요?”

“아. 사실 공부하자고 부른 게 아니고,”

“네? 일주일도 안 남았는디…. 햄 엄청 자신 있나 봐요.”

참나. 고새 기가 살아서 실실거린다. 밉지 않게 저러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래도 막판 컨디션 관리 정도로 여겼는지 상호는 그 이상 토 달지 않고 반쯤 꺼내든 문제집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면 왜 불렀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히히 웃으며 야무지게 짐만 쌀 뿐이었다. 그냥 공부하지 않아도 돼서 신난 것 같기도 하고. 미련 없이 필통까지 툭 가방 속에 떨구고 나서야 다시 병찬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우리 집 첫째도 수능 삼일 전에 못 참고 피시방 갔는데 1지망 잘만 붙었어요.”

“오, 그래?”

반사적으로 맞장구 치고는 병찬은 정신을 차렸다. 크흠,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사실 나도 붙었거든.”

“헐! 햄 수시러였어요?”

응? 병찬이 정정하기 전에 한발 성큼 다가온 상호가 열띤 목소리로 말을 쏟아냈다. 와, 어쩐지 여유만만하더라니! 완전 기만자 아니에요?! 근데 벌써 합발난 거면 최저도 안 맞춰도 돼요? 대박. 부럽다. 어디 붙었어요? 무슨 과예요? 드문 상호의 기세에 밀린 병찬이 머뭇머뭇하다 틈을 타 겨우 멈춰 세웠다.

“상호야 잠깐만. 그런 게 아니고.”

에? 껌뻑거리는 눈이 투명하게 속내를 비추었다. 그런 게 아니면 그럼 뭘 붙었다는 거고? 또 장난? 실시간으로 변하는 표정에 병찬이 급히 말을 이었다.

“내가 헷갈리게 말했다. 나 대학은 안 가기로 했어.”

예에? 순식간에 미간이 좁혀졌다. 산 넘어 태산이었다.

“아니. 좀 들어봐, 상호야.”

결국 계획과 달리 멋없게 구구절절 해명하는 꼴이 되었다.

“나 오디션 합격했다는 말이었어. 엊그제 최종 캐스팅 연락 받았고. 아, 그래서 대학에 안 가는 건 아니고. 안 가기로 먼저 결정하고 오디션 보러 다녔었어. 그,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되지…. 음, 예전부터 간간이 연락주시던 분이 있었는데,”

횡설수설 그간의 일을 전했다. 그동안 놀린 업보를 돌려받는 것일까, 상호의 찌푸린 미간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침묵이 흐르는 와중 꼿꼿한 시선이 가슴께 어디를 찌르는 듯했다. 말을 고르듯 옴짝거리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진짜예요?”

“너한테 이렇게까지 거짓말해서 뭐해….”

“사기 같은 건 아니죠?”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기사가 안 났는데 촬영 들어가면 계약 기사 나갈 거야….”

 

“촬영은 언제 들어가는데요?”

“12월 말에서 1월 초, 그즈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했다. 예상하지 못한 취조가 당황스럽긴 해도 요즘 같은 세상에 누구나 할 법한 걱정이긴 했다. 그래도 상호는 마냥 기뻐할 줄 만 알았지…. 하긴 말로는 뭘 못하겠어. 병찬은 지갑을 뒤져 이사님의 명함을 증거로 제출했다. 명함 한번, 병찬 한번 번갈아 보는 눈이 점점 크게 트였다. 이마저도 믿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다행히 크지는 않아도 상호에게 신뢰를 사기에는 충분한 인지도를 가진 듯했다. 병찬은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또다시 쏟아질 질문에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상호는 두 손으로 쥔 명함만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아까 수시 합격한 줄 알았을 때의 열띤 반응에 비하면 살짝 아쉽지만 많이 놀랐을 테니 봐줘야겠지. 음, 그래. 그게 나잇값 하는 거겠지…. 섭섭한 마음을 다잡았더니 상호가 드디어 명함에서 눈을 뗐다. 눈을 마주한다고 속 좁은 마음이 들킬 리도 없을 텐데도 병찬은 괜히 눈을 스리슬쩍 피했다.

 

“음. 이제 믿어?”

“햄!”

탄성과 함께 상호가 와락 부둥켜안았다. 놀랄 틈도 없이 귓가에 흥분에 찬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제가 뭐라 그랬어요. 햄은 배우 해야 한다 그랬죠. 햄이 또 화낼까봐 참았는데 솔직히 그 이후에도 몇 번이고 말하구 싶었다구요. 유튜브에 올리잔 것도 혹시 사람들 반응 보면 생각 바뀔까 봐 그런 거였어요. 제가 봐도 잘하는 데, 좋아하는 게 보이는 데, 킁. 근데 제가 뭐라고 햄 미래 진로 설계에 참견하겠어요. 배우하라고 계속 꼬드길 수도 없고. 심지어 햄은 스물한살. 아, 물론 서른 마흔 되어서도 데뷔하는 사람 있지만, 아무튼 뭔 말인지 알죠. 진짜 잘됐어요…. 크응. 어안이 벙벙하여 굳어있던 병찬은 겨우 팔을 들어 올렸다. 자기만한 덩치를 가만가만 토닥여줬다. 쏜살같이 지나간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는데 코웃음이 자꾸만 나와 참느라 혼이 났다.

 

간간이 코 먹는 소리가 둘 사이의 정적을 메웠다. 평소에는 잘도 가짜울음을 짜내더니 진짜 눈물은 민망한지 상호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병찬은 얼마든지 어깨를 내어줄 수 있었다. 다만 등 뒤에 얹어진 손이 옴짝달싹 이제서야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져 대신 타이밍을 잡아주기로 했다. 자, 이제 뚝! 어린 애를 달래듯이 엉덩이도 한번 팡 치려다 대신 허리께를 슬쩍 간지럽혔다. 으앗! 화들짝 놀라 떨어지는 품이 아쉽지만 그새 발개진 얼굴도 볼만 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상호는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저러면 금방 부을 텐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울 정도로 좋았어?”

“놀라서 그런 거에요….”

상호는 진이 빠진 듯 의자를 빼내더니 풀썩 앉았다. 병찬도 옆에 따라 앉았다. 숨을 고르는 옆모습을 잠자코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깜빡이는 눈. 벌써 부은 것 같은 눈가. 그 옆의 점. 그리고…. 인중의 콧물 자국 즈음에서 획 돌아보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몸을 바로 세웠다.

“누구누구 알아요? 초원햄? 태영햄?”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 애들 공부하는데 분위기 흐릴까 봐. 또 너랑 촬영 다녔던 거 모르기도 하고…. 그래도 리허설 들어가기 전에는 말하려고.”

“와, 햄들 엄청 놀라겠어요.”

“그래도 누구처럼 울지는 않을 듯?”

병찬은 기어코 한 방 얻어맞은 어깨를 감쌌다. 상호야, 그래도 형인데…. 병찬의 투정은 바로 무시당했다. 3학년 햄들도 모를 정도면 도대체 언제 오디션 보러 다닌 거예요. 뭐, 1차는 보통 프로필이랑 영상 제출하면 됐어. 통과하면 그 이후 대면은 조퇴하거나 주말로 날 잡기도 하고. 예전에 알던 분, 아까 말했던 이사님 기억나? 그 분이 많이 도와주셔서 나만 잘하면 됐지. 오…. 어쩐지 입시 악귀 들린 준수햄보다 코트에 잘 안 나오더라니. 단톡에서 그렇게 혼나고도 아직도 입시 악귀라고 부르네. 요즘 절정이라고요. 의대 지망이잖아, 그럴 만하지. 가재는 게 편이네요. 그거 이럴 때 쓰는 말 맞아?

어쨌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긴 했지만 큰 숙제를 끝냈다. 이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간 밀린 공백을 채울 차례였다. 이사님에게 포트폴리오로 상호 영상을 보여줬던 일이나 몇 번이고 불렸지만 결국 막판에 떨어졌던 다른 오디션 등 병찬은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어느새 의자를 바짝 당겨 앉은 상호도 이야기의 틈 사이를 조잘조잘 쉬지 않고 질문으로 채웠다.

자세를 고치려는데 맞닿은 무릎이 신경 쓰였다. 와중에 상호가 마지막 질문이라며 뜸을 들였다. 무슨 질문인지 뻔히 예상이 가지만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뭔데?

“무슨 영화 찍는지 물어봐도 돼요?”

“안돼.”

“감독이 누구인지는요?”

“어허, 잔머리 굴리지 말고.”

“쳇.”

아무리 입술을 샐쭉 내밀어도 공사 구분은 엄격하게. 병찬은 나중에 다 말해주겠다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냉큼 좋다고 할 줄 알았던 상호는 머뭇거리다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나중에…, 엄청 바쁠 것 같은데.”

“응? 무슨 의미야?”

꾸욱 엄지까지 맞대어 도장까지 찍었으나 병찬은 의미심장한 발언에 새끼손가락을 풀지 않았다. 놔주지 않는 손가락, 그리고 병찬을 향해 들어 올린 시선은 얼떨떨해 보였다.

“그냥. 햄 엄청 인기 끌 거 같아서요. 우리 학교 애들이나 쌤들이나 햄 안 좋아하는 사람 없잖아요. 촬영할 때 말 한번 섞은 어른들도 그렇고. ”

“좋게 봐주는 건 고마운데 그게 뭔 상관이야? 나 성공하면 팽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고요. 제 말은 대학 생활도 아니고 연예계에 들어서면,”

 

“상호야. 아직 촬영도 안 들어갔어. 영화가 대박 날지 쪽박찰지도 알 수 없는 거고. 그리고 나 주연도 아냐. 니가 생각하는 만큼 주목받지 못할 수도 있어.”

김칫국 한솥을 끓여오는 꼴에 결국 스스로 이 말을 내뱉게 만드는 상호가 야속했다. 이제 겨우 오디션 하나 붙은 건데 어디까지 생각하는 건지. 힘 빠지는 상황에 한숨을 삼켰다. 아뇨. 딱 잘라 말하는 목소리가 단호했다. 병찬은 내리 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그런 건 상관없어요. 햄은 무슨 역을 맡아도 눈빛이 살아있거든요.”

그날처럼 확신에 찬, 빛나는 눈.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자신이 보였다.

“반년 좀 안 되지만 그동안 지켜봤으니 알아요. 모두가 금방 박병찬의 진가를 알아볼 거예요.”

이토록 단단한 신뢰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백명이 있다면 백 가지 반응이 있을 것이다. 그 중 병찬은 픽, 웃음을 흘렸다. 저 신뢰의 근간은 상호가 아닌 이상 알 길이 없다. 은연중에 내비치는 질투로 짐작할 뿐이다. 사회성? 외모? 재능? 그런 피상적인 것에 대한 시기는 해탈한 지 오래다. 다만, 질투도 서툰 어린 아이는 자기의 감정과 별개로 솔직하게 인정한다. 잘 해낼 것이라고 올곧게 믿어온다. 당연하게 다음 수순을 내다본다. 연기처럼 무책임하게 흩어지고 마는 막연한 기대와 결이 다르다. 그럼 저 투명하고 단단한 시선에 비추어 다시 한번 믿어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마치 그 여름날, 그리고 지금처럼.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으음…. 어떻게 책임질까요.”

의외로 진지하게 고민하길래 마주 건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었다. 상호가 흘끗하고는 이내 다시 병찬을 쳐다봤다. 이거 뭐요, 라고 묻는 눈치였다.

“그때까지 피드백해줘.”

“네?”

“작품 찍을 때마다. 영화면 개봉 첫날, 드라마면 매 화.”

“…제가 뭐라고 오케인 사인 받은 연기에 첨언을 해요.”

“그럼 연기가 아니더라도 아무거나. 네 의견은 들어볼 가치가 있으니까.”

여전히 내키지 않아 보였다. 그냥 알겠다고 하면 될 일을, 또 자기만의 조건을 하나하나 따지고 있을 게 뻔해 병찬은 몰아치기로 했다.

 

“이제까지 본 영화들 다 5점 만점에 5점짜리 들이었어? 아니잖아. 우리끼리 얘기할 때 너 은근 까탈스러웠거든? 감정선이 혼란스럽다는 등, 왜 갑자기 저 사람을 보여주냐는 등.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 같은 거 얘기해주면 돼. 아니면 그냥 한 줄 평 남기듯이 가볍게 후기 말해줘도 되고.”

가장 덜 부담스러울 만한 구석을 마련해주자 그제야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했다. 다시 도장을 꾹 찍으며 꼭 먼저 연락해줘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대로 도장에 코팅까지 일사천리로 해치우니 멍하니 손을 맡기던 상호가 한마디 했다. 안읽씹이나 하지 말란다. 참나,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어린 애 같은 짓을 하고 있는데.

또각또각, 별관 복도를 울리는 구두 소리에 둘은 동시에 문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병찬이 몸을 숙여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번 주 당직 그 강쌤인가 봐. 상호가 꼴깍 침을 삼켰다. 그… 2학년 과학이요? 어. 걸리면 잔소리로 넘어갈 인물이 아니라 조용히 자리를 정리했다. 문에 귀를 대고 위층으로 멀어져 가는 구두소리 타이밍에 맞춰 병찬은 미닫이문을 최대한 살살 열었다. 문단속까지 할 여유는 없으니 대충 열쇠만 제자리에 두고 얼른 별관을 탈출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어 나간 둘은 급식실 즈음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고르며 둘러 보는데 삼 년을 다닌 학교가 갑자기 생소하게 느껴졌다. 폐에 들이차는 시원한 공기, 한적한 학교, 기다란 두 그림자. 뭔가 고양되는 기분이었다. 기상호. 문득 내지른 이름. 네? 그리고 돌아보는 얼굴. 눈부신 황금빛 햇살을 뒤로 하고도 모든 것이 선명했다. 병찬은 해방감 비스무리한 것을 느꼈다. 동시에 이 순간에 매여 살아갈 것 같다고 직감했다.

“사람 불러놓고 왜 웃기만 해요.”

“좋아서~”

“또 또 대충 넘어간다.”

그러는 상호도 웃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짚어내지는 않았다. 아무렴 어떤가 싶을 만큼 좋은 풍경이었다.

 

전전 정류장. 상호가 탈 버스가 곧 도착할 참이었다. 교문을 나설 때 걸려 온 전화를 끊고도 상호는 내내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다. 괘씸한 신발코를 툭 건드렸다. 상호의 고개가 바로 들렸다. 누나가 빨리 오래? 저녁 먹기 전까지만 가면 괜찮아요. 그럼 누구랑 그렇게 열심히 톡 해. 아, 올 때 정희찬 누나한테 뭐 좀 받아오라고 해서요. 근데 이 누나가 톡을 안 봐서 정희찬한테 대신 물어봤는데 얘는 아직도 밖이래요. 데이트? 상호가 투덜거렸다. 네, 둘이 툭하면 불러내는데…, 완전 귀찮아요. 오늘은 선약 있다고 빠져나왔어요. 학교에서나 희찬이 인스타로나 셋이 같이 있는 걸 종종 봤던 터라 병찬에게 그리 새로운 얘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덕분에 오늘 물어보려다 까먹은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종종 희찬이가 올린 스토리 보면 둘이 뭐 하는 것 같던데, 무슨 꿍꿍이야?”

 

잠시 후 도착. 투덜투덜 볼멘소리가 그쳤다. 바뀐 버스 전광판에서 얼어붙은 입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황한 빛이 어린 얼굴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런 거 없는데요? 그러고는 벌떡 일어섰다. 216번 곧 도착이래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함다! 딱 봐도 뭔가 있지만 너무 어설픈 모습에 병찬은 모른 체 해주기로 했다. 오바하지 말고 아직 버스 안 보이니까 앉아 있어. 넵. 눈도 안 마주치고 뚝딱거리며 다시 제 자리에 앉았다.

“상호는 죄짓고 못 살겠다.”

“저 진짜 찔리는 거 없거든요?”

 

***

 

내보내기. 드디어 제 손을 떠났다. 천천히 올라가는 퍼센티지를 보는 심정은 생각보다 감개무량하지도, 시원섭섭하지도 않았다. 졸업식 전날, 아니 12시가 넘었으니 당일에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시작할 때는 분명 여유롭게 일정을 짰었다. 첫 번째 변수는 사람이었다. 다양한 소스를 마련하기 위해 롱 숏은 반장한테, 그리고 카메라 앞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위해 희찬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기획을 들은 둘은 바로 승낙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주 매우 적극적으로. 어디서 본 것만 많은 아마추어 세 명이서 스토리보드를 몇 번을 수정했는지. 그나마 휴대폰으로 찍은 결과물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한계를 일찍 깨닫고 빠르게 타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변수도 당연히 사람이었다. 비밀 유지와 리얼리티를 위해 재촬영이 없는 만큼 하이라이트가 아니라 청소년 다큐로 전환할 뻔한 순간도 종종 있었으나, ‘농구 한판 하면 모두 친구잖아요!’라는 유행어를 남긴 후부터는 쉽게 분위기를 풀 수 있었다…. 수치와 프로젝트를 등가교환…. 에라이.

흑역사를 뒤로 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어느새 렌더링이 완료되어 일부 공개로 업로드까지 되어 있었다. 그래도 혼자 진행했다면 이만큼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지금은 제 침대에서 자고 있긴 하지만 막판 편집의 시다바리를 자처할 만큼 옆에서 으쌰으쌰 해준 친구. 야, 정희찬. 예상한 대로 묵묵부답이었다. 상호는 꼼짝도 안 하는 몸뚱아리를 걷어찼다. 악! 뭔데!

“나와. 좋은 말할 때 빨랑.”

“아, 나 바닥에서 자면 배긴다고.”

“그럼 살을 찌우든가 집에 가든가 하라고 내 백번 넘게 얘기했다. 암튼 나와. 나 개 피곤해.”

“잉? 편집 끝남?”

“엉. 우리 단톡에 링크 보냈음.”

이제 절대 수정 안 할 거니까 무조건 좋은 후기만 남겨라. 희찬이 휴대폰을 찾아 내려간 틈을 타 얼른 대자로 침대를 차지했다. 누가 미리 전기장판을 켜 준 덕분에 두툼한 이불 아래 노곤한 몸이 사르르 녹고, 누구 머리 형태로 폭 꺼진 베개를 베자마자 뻑뻑한 눈이 스르르 감겼다. 자기 전 유튜브 타임을 마다할 정도로 간만의 단잠이 기대되었다. 간간이 터져 나오는 희찬이의 리액션을 한 귀로 흘리며 잠을 청했다.

 

점점 의식이 가물가물 흐려져 가는데 마침 영상이 끝난 듯 사위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와씨, 기상호 폼 미쳤다.”

너스레 떨 기운도 없는지라 상호는 만족스러운 웃음만 짓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양치질을 하고 돌아오니 희찬이는 어찌 셔츠와 바지까지는 갈아입긴 했으나 침대에 널브러져 2차 아침잠을 자고 있었다. 희차이, 고마 일어나라. 니 어제 몇 시에 잤노. 완전히 잠들지는 않았는지 웅얼웅얼 대답은 하는데 당연히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 안 들린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물으니 결국 희찬이 몸을 일으켰다.

“네 시, 네 시! 안 그래도 골 아픈데 짜증 나게 하지 마라.”

“그니까 누가 늦게 자래?”

“아니, 톡하다 보니까…됐다. 끄지라.”

사실 단톡에 쌓인 메시지를 보고 짐작하긴 했다. 한 학기에 걸친, 그것도 아무도 시키지 않은 프로젝트를 끝냈으니 이해가 가긴 했으나 희찬이와 반장 둘이서 새벽에 자축을 얼마나 했던지. 아침밥을 먹으면서 보다가 두 시 즈음 [내년에 또 하자!!] 에서 그만 꺼버렸다. 그래도 열띤 반응 덕분에 형들에게도 선보일 자신감이 조금 생기긴 했다. 혼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희찬이 다섯번째 하품을 내뿜었다. 우리 오늘 몇 시까지 가야 돼? 아홉 시.

“근데 오늘 뱅찬햄 올 수 있으려나? 촬영 중이잖아.”

넥타이를 조이던 손이 멈칫했다.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러게. 흘긋 뒤를 돌아보니 희찬이는 손으로 가르마를 슥슥 정리하고 있었다. 상호의 성의 없는 대답은 딱히 괘념치 않아 보였다.

“다시 생각해도 진짜 대박이다. 어쩐지 아우라가 남다르다 했더니만 아역배우 출신. 근데 기상호는 알면서 나한테 암말도 안 하고. 실망이 크다, 커.”

“나도 그건 몰랐다고. 그리고 정희찬 니 그거 몇 번을 우려먹을 건데? 딱 정해라.”

 

“태초우정 별거 없다.”

“참나. 정희찬이랑 병찬햄? 잴 것도 없다.”

와아, 기상호. 허, 참. 희찬이 혀를 차더니 방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아저씨! 상호 점마 완전 배신자예요. 불알친구 물에 빠지면 그 옆에 연예인 형 구할 애예요. 정희차이 아침부터 쌩쌩하네. 제 말 들으셨어요? 밥 먼저 무라. 아, 입맛 없어요. 로마에 오면 로마법 따라야제. 익숙한 소란을 뒤로 하고 상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전히 잠잠했다.

 

교문으로 가는 길은 평소와 똑같지만 어쩐지 살갗에 닿는 공기가 간질간질, 그런 느낌이었다.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또는 사회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끝맺음은 필수 조건이다. 아슬아슬하게 표면 장력을 유지하던 각자의 마음이 공식적인 종지부에 손쉽게 동하여 흘러넘쳐 버리고 만다. 이런 낯간지러운 분위기는 새삼스럽기도, 조금은 불편하기도 했다. 무심중에 한숨을 내쉬었다. 희찬이 긴장되냐며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쫌…? 에이, 햄들 엄청 감동받을기다.

교문 앞 꽃다발로 가득 찬 가판대가 보였다. 그새 지형고의 자랑스러운 입시 결과를 선전하는 현수막도 두어개 더 걸려 있었다. 가판대 앞 정체되어 있는 인파를 피해 돌아가려는 상호를 붙잡았다.

“잠만. 우리 꽃다발 사야 된다.”

“상철이네가 사 오기로 했잖아.”

“이제 일어났댄다.”

뭐? 나 현금 없는데. 계좌이체 하면 된다. 맞나. 희찬이 머뭇거리는 팔을 잡아끌고 가장 가까운 가판대로 헤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이거 얼마에요? 가장 화려한 꽃다발을 가리키고는 가격을 듣고 놀란다. 헤헤, 사실 형들 줄 건데요, 추천 좀 해주세요. 형들? 몇 명? 여섯명이요.

 

“아, 근데 병찬햄은 올지 안 올지 모르는데 우짜지.”

공이나 튀기고 편의점에서 삼김에 컵라면 정도나 사 먹곤 했던 고딩들이 돈을 모아 산다 해도 부담스러운 가격대였다. 게다가 보관해뒀다가 줄 수도 없다. 병찬이라면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다. 희찬과 눈이 마주쳐 상호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희찬이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걍 다섯개 주세요. 한 명은 어쩌고? 그 햄은 이런 걸로 섭섭해할 사람이 아니라서요, 괜찮아요.

예산 내 적당한 가격대의 꽃다발을 색깔이 겹치지 않게 고른 후 희찬이 계좌이체 하는 동안 상호는 꽃다발 한 무더기를 들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뒷전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와중 장미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맞장구만 치던 목소리가 사장님을 불렀다. 저기, 사장님….

 

“한 송이는 얼마에요?”

“오천원. 근데 우리 학생은 그냥 줄게.”

“아, 진짜요. 감사합니다.”

와, 감사합니다! 손이 없는 상호 대신 희찬이 냉큼 한 송이를 건네받았다. 병찬햄 줄 거? 어. 혹시 모르니까. 그렇긴 해. 볼일을 마친 둘은 다시 한번 감사 인사와 함께 복잡한 가판대 앞을 떴다. 어후, 정신없다. 교문 안쪽에서 희찬이 꽃다발 두어개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상호의 손에 장미 한 송이를 꽂아 넣었다.

“니 돈으로 사려고 했제? 그럼 니가 줘라. 둘이 같은 도서부고 친하니까 신경 쓰이나 보네.”

 

“어어….”

희찬이 씩 웃었다. 기상호 은근 정 많다니깐? 장난스러운 눈길을 피했다. 뭐가. 빨랑 가기나 하자.

 

교가, 스승의 은혜, 그리고 이젠 안녕. 졸업식 메들리를 부르고 나서야 겨우 강당에서 풀려났다. 강당 앞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교복 무리에서 훤칠한 형들을 찾는 건 쉬웠다. 형들도 마찬가지인 듯 금방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점심시간 농구 멤버들이 각자의 주장을 향해 모여들었다. 햄, 졸업 축하해요! 전하, 나 의대 기운 좀 받읍시다. 재유햄도 이제 ‘그’ 복도에 나오는 거임? 1학년들이 꽃다발을 안겨 줄 때 일 년 더 함께 한 2학년들은 까불거렸다. 그래도 좋은 날이라고 준수와 재유도 깝죽거림을 받아주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재유가 신청곡을 받는 동안 준수가 태성이 내민 손을 꽉 잡았다.

“새끼, 너도 고생 좀 해봐라.”

“예예. 족보는 내놓고 가시고.”

“공태성 말본새 봐라.”

“초원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거, 상식 아입니까.”

얽힌 두 무리 주변으로 자식들을 찾는 부모님들이 다가왔다. 어휴, 다들 길쭉한 거 봐. 끼리끼리 어울렸나 봐. 아, 안녕하세요. 어른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던 중 먼저 인사를 다 한 희찬이 운동장 한 구석을 가리켰다. 햄! 우리 코트에 가 있을게요, 사진 다 찍으면 와요!

내년에도 학교에 남는 고딩들은 한적한 운동장을 가르며 내년 주장 선거를 실시했다. 거수로 진행하는 투명한 공개 투표에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별로 생각 없다던 후보가 뒤늦게 자기 피알에 나섰다. 남의 일이라고 낄낄거리며 강 건너 불구경하던 상철이 갑자기 상관없는 이름을 외쳤다.

“병찬이 형이다!”

일제히 상철의 시선 끝을 향했다. 코트 구석 벤치에 익숙한 인영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병찬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반가운 인물을 불러댔다. 병찬이 드디어 인기척을 눈치챈 듯 고개를 들었다. 찬찬히 일어서더니 한 손을 들어 흔들었다. 다들 오랜만~

 

“형, 오늘 촬영 없어요?!”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덕분에 지금이라도 왔지.”

“왜 여기 있어요! 우리 학교 최초 연예인이라고 지금 난리 났는데.”

“어차피 얼마 못 있어. 너네랑 사진 남기려고 들린 거야. 이따 집 들려서 짐만 챙기고 또 금방 가야 돼.”

 

와, 진짜 배우 같아. 인정. 다들 비슷한 감상이었다. 흐트러지긴 했지만 아직 세팅기가 남아있는 머리, 콕 짚을 수는 없지만 어딘가 더 단정해 보이는 외모는 같이 농구 하던 첫째 형이 아닌 진짜 어른같이 느껴졌다. 병찬이 머쓱한 웃음으로 선망의 눈초리를 넘겼다. 오바하지 말라고 제지해줄 중재자들이 없으니 부담스러운 듯했다.

“다른 애들은?”

“형들 지금 가족분들이랑 사진 찍고 있어요. 곧 여기로 올 거예요.”

쌍호. 나직한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희찬이 슬쩍 턱짓했다. 얼레벌레 들고 다니느라 포장지가 구겨진 오천 원짜리 한 송이 꽃. 괜히 샀나, 후회가 되었지만 일단 한걸음 내디뎠다. 밀린 근황을 주고받던 병찬이 눈길을 주었다. 어, 병찬햄. 주는 것 조차 미안해 더듬더듬 변명이 먼저 튀어나왔다.

“햄 오는지 몰라가지고요, 근데 혹시 몰라서…. 약소하지만 졸업 축하드려요.”

 

저거 병찬이 형 거였어? 엉, 상호가 개인적으로 준비했다. 어지간히 졸졸 따르긴 했음. 와중에 제 행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평에 더 민망해졌다. 좀 과한가 싶긴 했지만 같은 동아리였던 덕분에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마음을 담기에는 볼품없어서 그럴지도.

“고맙다, 상호야.”

겨울치고 따뜻한 날인데도 살짝 스친 손은 차가웠다. 꽃을 건네받고도 뚫어져라 보는 병찬의 시선을 피해 상호는 괜히 주변을 흘겼다. 방금 누가 똥개라 했어요. 나다, 새꺄. 태성이 한 마디 남기고 전화를 받았다. 어, 은재야. 싹 바뀌는 목소리에 주변에서 야유를 했다. 우우, 개꼴값. 커플 꺼져라. 은재 누나! 태성햄 방금 욕했어요! 똥개가 뭔 욕인데! 마침 졸업생들이 합류해 코트 위는 더 시끌시끌해졌다.

감히 감동의 눈물 이런 걸 생각한 건 아니지만 졸업식 날 마저 이렇게까지 평소랑 똑같을 줄은 몰랐다. 단체 사진을 찍으면서도 어찌나 다들 한 고집 부리는지. 농구 한 판 뛴 것처럼 진이 빠져버렸다. 쿼터 사이 삼삼오오 모여 니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따지는 것까지 똑같았다. 상호는 슬쩍 뒤로 빠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더 이상 찍을 필요는 없지만 습관이 되어 버렸다. 다들 상호를 한 번 보고는 다시 제 할 말 하기 바쁜 걸 보니 마찬가지로 익숙해진 듯했다. 졸업생을 한명씩 클로즈업하던 중 마지막 주인공이 제 발로 찾아왔다.

 

“상호. 뭐해?”

“아, 마지막이니까 그냥 좀.”

“나도 찍어주라.”

“네에.”

찍어달라고 해놓고 병찬은 말없이 렌즈를 응시하기만 했다. 딱히 목적이 있는 영상은 아닌지라 상호도 가만히 화면에 병찬을 담았다. 간만이었다, 병찬만 오롯이 담는 건. 한겨울의 병찬도 처음이고. 그리고, 음. 이런 순간은 아마 마지막이겠지. 바람이 시렸다.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도, 마음도.

한 차례 바람이 지나가고 병찬이 머리를 헝클었다. 그리고 렌즈 뒤 상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문득 첫째 형이 즐겨 듣던 앨범명이 떠올랐다. 영원의 순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기억의 형태로 마음 한 켠에 영원히 남긴다면 바로 지금 같은 풍경. 겨울 공기처럼 시리지만 반짝반짝해서, 꼭 간직하고 싶다. 그럼 언젠가 봄이 왔을 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상념의 갈피들에 잠겨있는 가운데 병찬이 상호를 불렀다. 상호야. 네?

“뭐라도 해볼까? 가만히 있는 건 재미없다며.”

“와, 햄 뒤끝 장난 아니네요.”

“1학년 깡다구가 장난 아닌 거지.”

히히,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졸업식은 쓸데없이 감상에 빠지는 날이었다. 영원의 순간 어쩌고에 매몰되기 전에 지금을 누리는 게 먼저지.

“그럼 ‘또 봐요, 또 보자’ 부분 해주세요.”

병찬이 웃음을 터트렸다. 상호야, 너 진짜. 그래서 안 할 거예요? 병찬이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아침에 한껏 들이쉬는 첫 숨만큼 시원한, 그런 미소.

“해주는 대신에 상호 너가 상대해줘.”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원작을 따라 하기 위한 것도, 재해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사심을 조금 담아 선정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상호는 흔쾌히 대답했다.

“알았어요.”

—또 봐요.

 

—너 이름이 뭐더라?

 

—OOO요.

 

—내 이름은 알아?

 

—OOO 맞죠?

 

—응.

—그래, 또 보자.

 

***

 

   희찬의 재촉에 결국 집에 가다 말고 놀이터에서 장문의 메시지를 썼다. 횡설수설했지만 요점은 간단했다. 형들 졸업 축하해요. 20XX년 지형고 2학기 하이라이트 필름입니다. 최대한 모두가 빛나는 순간을 담았습니다.

영상 링크와 함께 메시지를 전송하고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엄청 창피하다. 이런 낯간지러운 얘기도, 열 명 이상에게 작업물을 선보이는 것도. 희찬이 대신 반응을 전해주었다. 상호! 다들 엄청 좋아한다. 종일 겨울바람에 시달린 얼굴이 뜨거웠다. 아무리 희찬이 좋게 말해줘도 도저히 카톡을 볼 자신이 안 났다.

지잉—

카톡 대신 전화를 받을 용기는 더 안 났다. 하지만 준수햄이라면 경우가 달랐다. 주, 준수햄이다. 니 카톡 안 보니까 전화했나보다. 빨랑 받아라. 하씨, 왜케 쫄리노.

“여, 여보세요.”

“상호야.”

“넵.”

“누구 죽냐? 아님 너 어디 아프냐?”

“아, 아뇨.”

“근데 왜 다시 안 볼 것처럼 오바야.”

“대학에 가면….”

“주말에 동네에서 보면 되지.”

태영햄 목소리. 이어서 모두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호가 가끔씩 이런 귀여운 짓을 해. 마, 우리 귀여운 막내 놀리지 마라. 미리 말해줬으면 협조해줬을 텐데. 김성훈 제일 뚝딱거려놓고 협조랜다. 상호야, 이초원 비보잉 하는 건 왜 안 넣었어. 야, 그것보다 ‘우리 모두 친구잖아요!’ 이게 대박인데. 졸업생들끼리 뒤풀이 간다고 했었는데 깜빡했다. 가성비 있게 전화 한 방으로 모두의 놀림을 받는 꼴이 되었다.

 

“기상호.”

“네….”

“기특한 자식, 날씨 풀리면 한 판 하자.“

다른 형들도 뭐라 말을 했지만 들러붙지 말라는 준수햄의 일갈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겼다. 옆에 착 붙어 앉아 엿듣던 희찬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뿌듯하긴 한데 어쩐지 정신적으로 타격이….

카톡 알림이 하나 더 떴다. 해탈하는 마음으로 단톡에 들어갔다. 병찬햄이었다.

 

[희찬이랑 뭐하나 했더니]

[완전 뮤비를 만들었네]

[우리만 보기 아깝다~]

 

[그니까]

[학교 홍보영상으로 써도 될 듯]

 

[그쵸?!!]

[저는 전체공개해도 상관없는데]

[형들은요?]

 

[난 상관없음]

[나도~]

.

.

.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