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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y, Get Set, Go!
@mmmmim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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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틈 사이로 더운 바람이 들어오는 어느 유월이었다. 시계 속 시침은 숫자 6을 지나고 있었고, 하루가 반의반도 남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밝은 밤은 유월이 완연한 여름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상순이 막 지난 부산의 평균 온도는 28도를 넘는 법이 없었다. 이는 곧 함부로 에어컨을 틀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오래된 선풍기 앞에 앉아 입을 벌리며 아– 하고 장난치던 소년이 더위를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다섯 손가락 꽉 채워서는 아니더라도 세 손가락 정도 우승 깃발 가져오지 않았어요? 이거 전국 인권 보호 협회에서 알면 큰일 날 낀데.”
오로지 농구를 하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전학 온 신입생의 사투리 억양 섞인 볼멘소리였다. 반죽에 쿠키 틀을 찍어낸 듯 누군가의 언어 습관을 빼다 박은 말투는 덤이었다.
“님, 그거 다 님이 따온 것도 아니지 않음? 그리고 협회 드립은 이미 주인 있는 거임. 건들 생각 노노.”
조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힘차게 날개를 회전시키는 선풍기 앞을 차지한 다은이 말했다. 현성에게 축구 유니폼을 빼앗긴 그가 유일하게 걸치고 있는 건 헐렁한 스트라이프 팬티가 전부였다. 자세를 고쳐 앉을 때마다 팬티 밑으로 드러난 맨살에서 접착력 떨어진 스티커를 떼어내는 소리가 났다. 가볍게 타박하는 음슴체를 들은 농구부원들은 프라이팬 위 노릇하게 익어가는 계란 프라이처럼 장판 위에 끈적한 몸을 붙였다.
그리고 여기.
“슬슬 바람이 약해지는데요? 아, 이거이거. 결국 Da-eun 'The basketball'의 성능은 여기까진건가….”
권력과도 같은 초록색 토퍼 위에 기다란 장정이 누워 있었다. 비스듬히 세운 베개 위에 머리를 올리고서는 한 쪽 무릎을 구부린 모습. 농구부의 고참이라 말할 수 있는, 비로소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무리의 강한 개체를 흉내 내고 있는 기상호였다. 토퍼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느리게 부채질을 하던 다은은 자존심을 자극하는 발언에 더욱 세게 팔을 휘둘렀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거센 바람결을 따라 빳빳한 갈색 머리카락이 파도쳤다. 지상 고등학교 농구부 제1대 패트와 매트답게 재미는 챙기면서 효율은 창문 밖으로 던진 풍경이다. 선풍기를 회전시키면 모두가 공평하게 바람 한 줌을 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아! 이제 그만하셈. 솔직히 20분이면 됐지 않음? 님 1학년 때 출전 시간보다 긴 시간임.”
“이게 무슨 섭섭한 소리죠? 전 스타팅으로도 뛴 적 있는 어엿한 선수입니다만.”
형. 그때 농구부원 6명이 전부 아니었어요? 부엌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현성 감독이 없는 숙소는 리모컨을 잡을 수 있는 자가 실세였다. 상호는 채널을 돌리다가 잠깐 스쳐 지나간 음악 방송에서 흘러나온 멜로디를 따라 불렀다. 청량한 음계를 허밍 하며 함께 발을 까딱거렸다. 시선 끝에 매달린 발은 1학년 때 신던 농구화가 맞지 않을 정도로 자라 있었다. 여전히 축구복을 애용하는 다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김치를 볶는 태성, 심심하다는 핑계로 숙소에 놀러와 부엌을 알짱거리는 희찬까지. 몇 년 전과 별다를 바 없는 상황의 연속이지만 그 시간 속에서도 성장하는 건 분명히 있었다. 1학년 때 신던 농구화가 살짝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란 발이라든지, 아침 컨디션이 좋으면 미묘하게 1cm 커지는 신장이라든지.
“자자, 그러지 마시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가져가시죠!”
냉동실 문을 열어 냉기를 뿜어내는 흰 연기 틈으로 손을 뻗은 희찬은 묵직한 검은색 비닐봉지를 꺼냈다. 농구부원들은 불을 처음 발견한 원시인이 환호하는 소리를 내며 희찬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얼핏 그 소리는 진화 덜 된 인간의 소리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희찬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는 목사가 되어 신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나눠 주었다. 아이스크림 봉투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자비롭게 들렸다.
“곧 저녁 먹을 건데 아이스크림은 뭔 아이스크림, 많이 먹으면 저녁 못 먹으니까 한 사람 당 하나씩 먹으라.”
적진에 수류탄을 던지는 병사처럼 김치 볶음에 햇반을 투하한 태성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내는 생귤탱귤. 주걱으로 몇 인분의 밥을 뒤적거리면서도 상큼하게 사각거리는 자신의 취향은 드러낸 채 말이다.
“와, 햄 입에서 생귤탱귤 소리 들으니까 쫌 소름 돋네요.”
“진짜 디진다.”
태성이 습관처럼 내뱉는 살인 예고에 눈물 몇 방울 흘릴 나이는 이미 지났다. 상호가 몸을 일으키자 벽에 간신히 기대어 있던 베개가 스르륵, 쓰러졌다. 큰 대회를 마무리한 후 만끽하는 휴식은 곧 입속에 넣을 초콜릿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했다. 한참을 누워 있다가 바로 일어나서 그런지 에어컨 바람을 오래 쐰 것처럼 머리가 핑 돌았다. 상호에게 닿은 바람이라고는 에어컨 송풍은커녕 미적지근한 부채 바람이 전부였는데도 말이다.
“희차이, 내는 빠삐코.”
“빠삐코는 얼어 죽을. 밥 다 됐으니까 빨리 와서 숟가락이라도 놔라.”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느라 굼뜨게 움직이는 상호를 타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열을 끝낸 볶음밥에 참기름 몇 바퀴를 둘렀는지 고소한 향기가 숙소를 감돌았다. 와 씨, 역시 공장금! 오늘도 푸짐한 한 끼를 차린 태성에게 찬사가 쏟아졌다. 빨간 도장을 찍은 듯, 무릎 위에 장판에 눌린 자국을 달고 있는 다은이 먼저 한 숟갈 맛봤다. 님. 졸업하면 진지하게 같이 살 생각 없음? 다은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말했다. 마, 끄지라! 태성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상호는 배까지 말려 올라간 티셔츠를 끌어내리며 식탁 쪽으로 걸음을 이동했다. 방금 전까지 다은이 있던 자리는 영역을 티내기라도 한 듯 아직까지 따끈했다.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불쾌한 열감에 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네모난 식탁을 에워싼 농구부원들은 숟가락을 들며 김치볶음밥을 난도하고 있었다. 발로 툭툭, 차며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엉덩이를 붙였다. 희찬에게서 숟가락을 건네받을 즈음이었다. 핸드폰을 쥔 오른쪽 손에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농구 ㄱ?]
“햄. 저 어디 좀 갔다 올게요. 제 몫 남겨놔야 해요. 꼭이요!”
식탁 위에 숟가락을 내려놨다.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느라 제법 큰 소리가 났다. 아무렇게나 잡히는 볼캡 하나를 낚아채며 현관을 향해 다급히 움직였다. 운동화에 발을 욱여넣는 동시에 잠금장치를 풀었다. 지금 안 먹으면 밥 없다! 태성의 고함소리가 닫히는 문틈 사이에서 소멸했다. 김치볶음밥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단단히 묶은 운동화 리본이 나풀거렸다. 병찬이 있을 코트를 향해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상호의 위로 푸르른 유월의 하늘이 흘러갔다.
Ready,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날을 생각하면 온통 농구밖에 없었다. 비행운을 그리며 둥근 지구 위를 활주하는 비행기처럼 상호의 삶 또한 둥근 농구공 위를 걷거나 달리며, 또는 그 위에 대자로 누워버린 채 그대로 흘러갔다. 벤치를 뜨끈하게 데우기만 했던 중학생 시절과 자신 있는 3점 슛이라고는 코너가 전부였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에이스 스토퍼라는 명칭이 버겁지만은 않던 고등학교 2학년을 지나 현재, 기상호는 연애는 꿈도 꾸지 말라는 대한민국 고3이 되었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입학시험이라는 인생 첫 커다란 관문을 두고 고민이 우주처럼 팽창하는 시기. 머리카락 빠지게 마더텅 푸는 친구들 사이로 농구화 덜렁거리며 코트로 향하는 삶은 이전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농구부는 더 이상 폐부 위기의 동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지상 고등학교가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인원 부족으로 대회에 나가지 못해 폐부 엔딩을 맞이하게 될 일은 없다는 것을 뜻했다.
상호는 듬성듬성하게 심어진 가로수 틈으로 보이는 코트를 주시하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폐부 위기를 물리쳐 계속 농구를 할 수 있게 된 상호의 고민은 무엇일까. 0순위로 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대학 입시 문제는 모퉁이로 미뤄 두었다. 코트 위 마주 보는 상대 팀을 긴장시킬 만큼 제가 쓸 만한 자원으로 성장했다는 것과, 자신 있게 내밀만 한 실적 몇 개가 쌓였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만약 이 얘기를 준수에게 했다면 야. 세상에 방심하면 안 되는 게 딱 세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한국말이고, 두 번째는 입시 결과, 마지막은 내 주먹이다 이 새X야. 하며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문득 부원들끼리 연습 경기를 하는 도중, 쉬는 시간마다 핸드폰을 목숨 줄처럼 부여잡던 태성이 떠올랐다. 체육관 내 핸드폰 사용 금지라는 조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에게 걸려 꾸중을 듣는 것보다 메시지 하나 못 보는 게 더욱 큰 죄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해 보였다. 기어코 전화까지 얻어낸 태성은 발로 체육관 바닥을 힘주어 구르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이 가시나 진짜 종강이라고 술 많이 마시는 거 아이가. 아니, 많이 마셔도 괜찮은데 니 내가 끓여준 해장국이 제일 좋다매! 내는당분간시합있어서올라가지도못하는데엇갈린다아이가! 정말 염병이라고 생각했다.
달밤의 사랑에 미친 태성은 먼저 대학 정문에 골인한 은재가 고민이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매일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그들은 재수 없이 한 번에 입시를 성공한 은재가 서울로 올라간 이후 장거리 연애 커플이 되었다. 인스타그램 탐색 탭은 종강을 맞이한 대학생들을 위해 매일같이 여행 코스를 띄워댔다. ♡아직도 안 가봤어? 커플 여행지 추천♡. 태성의 북마크에 쌓여 있을 게시글은 굳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상호는 정승처럼 코트를 지키는 가로등을 향해 나는 날벌레를 쳐다보며 모두가 그런 시기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시기. 흔들리는 기차에 몸을 맡기고선 창밖으로 보이는 초록 풍경에 몸을 던지고 싶고, 손가락 사이를 통과하는 여름 바람이 유독 부드럽게 느껴지고, 푹신한 모래사장 위에 영원히 바닷물에 휩쓸리지 않을 이니셜을 새기고 싶은 시기. 사랑에 빠지지 않아도 그랬다. 하지만 상호의 경우 그는 입시 원서를 준비해야 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엘리트 코스를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온 세상이 농구였으며, 무엇보다.
“상호, 여기!”
그는 사랑을 겪고 있었다. 잠깐, 짝사랑도 사랑으로 쳐주나? 그렇다면 정정하겠다. 상호는 짝사랑이자 ‘첫사랑’을 겪고 있었다.
병찬이 호명하는 소리가 텅 빈 허공을 가로지르며 상호에게 닿았다. 아는 개라도 부르는 듯한 온화한 목소리였다. 둘은 제법 잘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절반은 맞았다. 아니지, 그가 부른다고 해서 바로 달려 나가는 꼴을 보니 개가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저녁 먹을 시간인데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하네.”
“햄. 솔직하게 말하셔도 돼요.”
“응. 사실 미안하진 않지. 대신 내가 맛있는 거 사주잖아.”
미안한 기색이 첨가되어 있지 않은 투로 뻔뻔하게 사과를 한다. 그의 눈썹은 밑으로 쳐지기보다는 연구 대상을 탐색하는 듯 호기롭게 위로 향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명이 자수로 박힌 파란 후드티를 졸업할 생각은 없는지, 그는 자랑스러운 ‘조형’ 한자를 등 뒤에 매단 채였다.
“에이, 그것도 어떻게 보면 제가 게임 이길 때만 한정된 거잖아요.”
“어어? 형이 저번에 냉삼 사준 건 기억도 안 나나 봐.”
아, 그때 상호가 형한테 몇 대 몇으로 졌었지? 점수 차 좀 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서운하기보다는 상호를 놀리기 위한 의도가 다분해 보이는 어투였다. 검지로 농구공을 돌리던 병찬은 코트 바닥을 향해 공을 가볍게 튀기더니 곧바로 슛을 올렸다.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러운 폼이었다. 볼은 림이나 백보드에 부딪히지 않고 그물을 스치며 깔끔하게 통과했다. 오예~ 일단 2점 얻었고. 아, 햄! 치사하게 먼저 시작하는 게 어디 있어요.
상호가 저녁을 먹지 않은 걸 고려하여 평소보다 적은 점수인 15점 내기로 원 온 원을 시작했다(왜 15점이냐고 물으니 내 등번호에서 네 등번호를 뺀 숫자라는 답변이 나왔다). 교복 셔츠 풀어헤친 학생들은 야간 자율 학습을 하러 가고, 코트에 전세라도 낸 듯 하는 일 없이 벤치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모두 집에 들어가고 없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휴식을 취하고, 또 누군가는 밤을 밝히며 야근을 결심하는 이 시간에 상호는 병찬을 만나 농구를 한다. 어제오늘 훈련을 하며 본드로 접착한 듯 하루 종일 손에 붙었던 농구공이 지겹지도 않았다.
“여기!”
상념을 일깨우는 소리와 함께 시야 안으로 주황색 물체가 빠른 속도로 들어왔다. 그게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물체를 건네받은 상호는 오돌토돌한 표면을 느낀 후 그것이 농구공이라는 정답을 내렸다. 상호의 가슴팍 정중앙을 향해 던진 무심한 듯 세심한 패스였다. 볼을 받은 슈터가 기분 좋게 바로 슛을 쏘기에 딱 적당한 위치였다.
“너도 한 번 던져. 그럼 각자 2점씩 채운 거지? 어디 상호 실력이 자랐는지 한 번 봐볼까.”
“에이, 햄. 저야 뭐.”
늘 최고죠.
프레임을 정교하게 나눈 애니메이션처럼 상호는 병찬에게 패스 받은 공을 물 흐르듯 던졌다. 여름 무더운 공기와 농구공이 가볍게 마찰하고, 상호의 손을 떠난 공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림을 향했다.
그리고 텅, 하는 둔탁한 소음.
상호의 자신만만한 소리와는 달리, 볼은 림을 맞고 떨어졌다. 당연히 그물 안을 통과하지도 못했다. 공은 코트 밖으로 나가다가 벤치에 가로막혀 간신히 이탈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 이게 아닌데! 예상 밖으로 흘러가는 전개에 땀을 삐질 흘리며 유일한 친구를 놓칠 수 없다는 사람처럼 잠시 멈춘 농구공을 향해 달렸다. 하하하! 그런 상호를 어이없게 바라본 병찬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네모난 코트를 가득 채웠다. 제 승리를 확신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미끄러운 바닥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겅중겅중 뛰어가는 폼이 웃겨서 그런 건지. 병찬이 흘린 미소의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오늘도 도무지 병찬을 이길 것 같지가 않다는 거다.
And
롯데리아는 뭐가 제일 맛있더라. 더블 한우불고기? 이야, 한우인데 패티가 두 개나 들어 있네. 오케이 이거랑, 모짜렐라 인 더 버거 베이컨 이것도 맛있는데. 근데 이럴 거면 패밀리팩 하나 시키는 게 나을 것 같지 않아? 그래도 체육인인데 콜라는 양심 상 제로로 시켜야겠지. 제로 콜라 라지 사이즈로 두 개…. 상호 양념 감자 하나 먹을래? 아, 잠시만. 롯데리아면 치즈스틱은 무조건 시켜야지. 이따 후식으로 소프트콘도 먹을까?
체육복을 입은 두 남자가 키오스크 앞에 서서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눴다. 토론을 나눴다고 하기에는 유독 한 사람만 말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입을 꾹 닫은 채 가만히 있었지만, 병찬은 상호가 보내는 무언이 동의하는 신호일 거라고 생각하며 메뉴를 꾹 눌렀다. 지구본을 처음 돌려보는 아이가 된 것처럼, 병찬은 키오스크를 향해 거침없이 손을 놀렸다. 메뉴를 추가할수록, 정확히 말하자면 메뉴를 추가할 때마다 상승하는 가격을 볼수록 깍지를 낀 손가락의 밀도도 조금씩 높아졌다. 평소에 자주 찾지도 않는 주님이 보고 싶었다.
햄, 부산 오자마자 국밥 드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혹시 그건 위장을 늘리기 위한 연습이었을까요? 물론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상호는 연두색 테두리의 반바지 주머니 안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뭉툭한 카드의 모서리가 만져졌다. 엄지로 카드 모서리를 쿡쿡 찌르며 계좌에 얼마만큼의 돈이 있는지 생각했다. 최근 막을 내린 쌍용기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고, 그 소식을 가족 단톡방에 알리자마자 형, 누나가 용돈을 쏴주었기 때문에 평상시보다는 풍족한 상태였다. 그래, 살면서 햄버거 파티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쁜 경험은 아닐 거다. 아주 롯데리아 씨를 말려버려야지. 햄버거로 탑을 쌓고, 도미노도 하고. 그래도 남은 햄버거가 있다면 숙소에 들고 가서 신도들에게 햄버거 세례라도 내려줄 것이다. 어느새 팔과 다리가 쑤욱, 하고 튀어나온 햄버거가 빅맥송을 부르며―빅맥이 맥도날드 메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상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였다.
“오케이, 주문 끝!”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키오스크가 주문 번호만 적힌 영수증을 출력해냈다. 병찬은 카드 리더기에서 제 카드를 빼낸 후 게임 npc처럼 가만히 서 있는 상호를 뒤로한 채 자리 찾기에 나섰다. 이따 카운터에서 번호 부르면 형한테 알려줘. 하고서는 병찬의 손보다 약간 커다란 손 안에 영수증을 쥐어 준 채 말이다. 216번.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얇은 종이엔 세 자리 숫자가 쓰여 있었다.
“에, 아니. 햄! 이번엔 진짜 제가 사려고 했는데요.”
벌써 저만치 앞으로 나아간 병찬의 등 뒤로 상호가 외쳤다. 지난번 냉삼은 물론, 병찬은 부산으로 내려올 때마다 상호가 아직 성장기 소년이라는 이유를 들먹이며 둘의 뱃속으로 들어간 모든 것들을 제 몫으로 처리했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는 이번에야말로 제 카드를 긁을 생각이었다.
테이블 위 아직 정리되지 않은 빵 부스러기를 손으로 툭툭 털어낸 병찬은 빨간 의자를 뒤로 빼며 그 위에 털썩 앉았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플라스틱 의자가 살짝 휘청거렸지만, 병찬은 타일 바닥에 가뿐히 발을 내린 채 오뚝이 인형처럼 장난스럽게 몸을 흔들거릴 뿐이다. 시끌벅적한 장내 사이로 병찬이 약하게 부는 휘파람 소리가 흩어졌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주 앉은 상호는 휘파람을 부느라 쭉 내밀어진 입술을 응시했다. 마침내 의자가 제자리를 찾았고, 병찬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병찬이 저런 태도를 보일 때면 습관처럼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과묵한 표정을 보면 성적으로 흥분한다는 건 아니다. 그에게는 특이한 버릇 내지는 고약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뜬금없는 순간에 이목구비를 굳히며 무게를 잡은 후 상대가 침착한 반응을 보이는 순간, 또는 상대도 병찬처럼 차분한 표정을 짓는 순간 어이가 다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것. 그 대상은 주로 병찬보다 나이가 어리며, 기대 이상의 반응을 보이고, 매번 똑같은 농담을 던져도 늘 새로운 괴담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는 사람. 바로 상호였다.
테이블 위에 두 팔꿈치를 얹은 후 턱을 괸 그는 약간의 침묵을 가진 다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어떠한 전조증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상호는 바짝 올라간 어깨의 힘을 풀었다. 주름진 미간을 펴내기 위해 엄지로 눈썹 사이를 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게 되는 건 상호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할 무의식이었다. 첫사랑이 다 그렇고, 특히나 짝사랑 상대 앞에서는 숨기는 게 어려웠다. 긴장할 때마다 주먹 쥐며 손바닥에 손톱자국을 내는 것마저도 들키고 싶지 않아 테이블 밑으로 손을 숨기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상호야. 이 형아가 카카오 미니 쓰는 애 돈 뜯어 먹을 정도로 양심 없진 않아…….”
마침내 그의 입을 타고 나온 소리는 최대 심박수를 향해가던 순간을 한 번에 덮어버릴 정도로 별거 없는 말이었다. 어절 하나하나 뜯어보면 늘 그렇듯 이번에도 그가 사겠다는 뜻이었다. 난데없는 양심선언을 한 병찬은 매장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발을 구를 뿐이었다. 아직 나오려면 한참 멀었나? 하긴, 우리가 한두 개 시킨 것도 아니지. 주문 번호를 띄우는 스크린을 응시하며 말이다.
“되게 뭐랄까…….”
“응?”
“재미없어졌네요.”
“푸핫, 뭐라고?”
“오, 216번. 가져 올게요.”
이게 지금 코미디언 심사 보는 것도 아니고. 재미없어졌네요가 뭐고, 재미없어졌네요가. 물구나무를 선 것도 아닌데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더 험한 꼴을 보이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상체는 병찬을 바라본 채로, 고개는 뒤로 돌린 채로 몸이 꼬이며 괴상한 자세가 완성되었다.
“그래. 형아가 숨만 쉬어도 상호가 웃을 수 있도록 연구해오마!”
차마 머리카락에 가려지지 않은 붉게 충혈된 귓불이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퍼레이드를 경호하는 근위병처럼 씩씩했다. 비록 팔과 다리가 같은 방향의 것들이 앞으로 뻗어 나가 바보 같았지만 말이다. 이 세상이 물에 잠겨 있었어도 해수면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다. 나풀거리는 갈색 머리가 사라질 때까지 계단 쪽을 응시하던 병찬은 누가 볼 세라 후드 소매를 끌어 입을 가린 후 남은 웃음을 마저 흘렸다.
좋아한다는 말없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만약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면 상호가 할 수 있는 답은 단 하나였다. 당연히 가능하죠. 혹시 질문하신 분 어디 아프신가요?
코트 위에서 서로의 땀이 튀도록 몸을 부딪친 기억 말고, 그와 독대했던 순간은 지상 고등학교가 학교에 안겨준 우승 깃발의 개수보다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사소한 대화를 나누기 전, 다른 선수들에게 말을 걸 때 보다 유독 긴장하는 몸이 그랬다. 2년 전 유스 캠프에서 농구화를 고르는 기준을 빌미로 병찬에게 다가갔던 기억이 있다. 그의 농구화가 멀리서도 알아볼 만큼 특이한 색깔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상호는 형광 노란색을 봐도 천장에 달라붙은 야광 별 스티커가 아니라 코트를 질주하는 병찬을 먼저 떠올린다.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야 상호는 슛이 없는 농구선수였고, 병찬은 무릎에 폭탄을 달고 있는 선수였으니까. 그와 코트 밖에서 만나고 싶다는 생각할 여유는 물론, 중학교 시절부터 계속해왔던 농구에 대한 자신도 없었다. 병찬에게서 요목조목 뜯어봐야 할 거라고는 오로지 농구 스타일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병찬은 상호가 뜯어볼 틈 없이 거센 바람처럼 림을 향해 돌진하며 상대를 뚫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하여튼 그런 사람이었다. 도저히 막으려야 막을 수 없었고, 상호에게 짙은 패배감을 안겨 주었으며, 두 번 다시 코트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
하나 재회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나고, 그 장소는 또다시 체육관이었으며, 병찬은 다시 한번 코트에서 마주치고 싶은 사람으로 변모했다. 팀에 마이너스만 끼쳤다는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었어도 슛을 한 번 더 하고 싶었다. 한 번이라도 더 성공시키고 싶었다. 그물 스칠 줄 모르는 공이 야속해서 괜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때, 병찬은 상호가 못 막을 놈은 없을 거라고 말해줬다. 그의 말은 연필을 쥐고 노트 위에 공식을 쓰기보다는 코트 위에 무질서한 궤도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또 보자는 말은 일종의 자기 암시였다. 우리 다시 볼 날이 오면, 그 순간은 반드시 코트 위여야 한다고. 그러니 농구를 포기하지 말라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더블 한우불고기의 마지막 한 입을 끝낸 병찬이 양념 감자 시즈닝을 뜯으며 물었다. 그에 비해 상호의 손에 들린 모짜렐라……. 아무튼 모짜렐라는 이제야 반달 형태를 갖추었다. 커다란 손안에 갇힌 햄버거는 철장 바깥으로 다리를 뻗는 새처럼 소스와 베이컨 쪼가리가 빵 바깥으로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느려지는 턱 운동과 공허한 눈동자가 아닌, 햄버거만 봐도 이 햄버거를 입안으로 집어넣는 주인에게는 어떠한 복잡한 고민이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냥요. 햄 요즘 부산에 자주 놀러온다는 생각?”
“뭐야, 별거 없네. 그래도 좋지? 올 때마다 농구해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잖아.”
양념 감자 봉투의 입구를 열어 위아래로 섞는 폼이 딱 초등학교 정문 앞 분식집에서 여러 번 먹어 본 티가 났다. 음의 높낮이 없이 오늘의 날씨 설명하듯 뱉어낸 말은 언뜻 들으면 정말 별게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다니는 학교에서 상호가 있는 부산까지는 거리가 멀었고, 아무리 하루 자고 간다고 해도 이동하는 데에만 6시간을 허비하는 셈이다. 또 뭐가 있을까. 부산역까지 오려면 그만한 비용이 필요했고, 상호를 만나서 매번 원 온 원을 하지만 결국 상호는 고등학생. 그의 연습 상대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그가 부산에 와야 할 이유보다 오면 안 되는 이유가 많았다. 그 이유를 하나씩 정렬시키면 상호가 베어 문 모짜렐라 패티보다 그 길이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거 봐, 또 생각이 많네.”
따뜻한 온도가 아직 남아 있는 감자 한 조각이 입속으로 들어왔다. 주황색 물체가 제 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농구공인 걸 깨달았을 때처럼, 일단 턱을 움직이며 음식을 분해하고 나서야 그게 병찬이 직접 먹여준 양념 감자인 걸 깨달았다. 이런 순간을 느낄 때면 그래도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좋았다. 올 때마다 농구도 해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얼굴도 보여주는 게. 상호는 크게 입을 벌려 한가득 햄버거를 물었다. 짭조름한 모짜렐라 치즈와 베이컨의 육즙이 계속해서 먹고 싶어졌다. 모짜렐라 인 더 버거 베이컨이 맛있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입가에 치즈 소스가 묻었다는 건 병찬이 냅킨을 건네주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에이, 말씀은 바로 하셔야지. 농구를 해주는 건 햄이 아니라 오히려 저 아니에요?”
“그야, 형이 상호 자주 보고 싶으니까 그렇지.”
병찬이 가까운 옆 동네 들리듯 부산을 자주 찾게 된 건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상호는 아직도 기억한다. 큰 대회를 앞두고 몇 주의 여유 기간이 있어 다은과 근처 편의점에 들르던 날이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오른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었고, 손을 타고 흐르는 짧은 진동에 유독 기민하게 반응했다. 쌍쌍바를 가르는 막중한 임무를 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상호야, 형 지금 부산 왔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그 메시지를 본 후로는 다은에게 제 몫의 아이스크림까지 모두 떠넘기고 버스에 몸을 실은 직후였다.
“햄.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응.”
“... 제가 햄 좋아하는 거 알아요? 아니, 알지 않아요?”
중간에 바보같이 말을 절긴 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화살이 과녁을 꿰뚫듯 정확히 그를 관통한 것처럼 보였다. 정중앙 가까이 꽂힌 완벽한 10점이었다. 병찬은 콜라를 들이켜려던 것을 잠시 멈추고 빨대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 모습이 꼭 앞니로 아랫입술을 깨물던 상호와 비슷했다. 초조하거나 불안하거나, 아니면 자물쇠를 걸어 놓은 일기장 같은 마음이 들키려는 순간에는 꼭 손가락이나 입술을 물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병찬도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낀 것이 틀림없었다.
빨대 구멍으로 올라오는 탄산으로는 부족했는지, 이제는 뚜껑을 열어 얼음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어지간히 속이 타오르는 건가 싶었다. 병찬이 숨기고 싶어 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한참을 심각한 표정으로 와그작, 소리만 내며 얼음을 씹던 병찬은 입안에 들어찬 작은 얼음조각까지 모두 목구멍으로 넘겼는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서는 차가운 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상호야. 너 못 본 사이에 많이 당돌해졌다?”
Get
기억은 상호를 2년 전의 늦여름으로 데려갔다. 덩크슛을 시도하듯 팔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던 여름 하늘의 구름도 가을의 문턱 앞에서는 손에서 놓친 풍선처럼 저 멀리 날아가고 없었다. 카디건은 답답하고 무겁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팔 한 장만 걸치기에는 쌀쌀한 날씨. 대통령기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8월의 마지막 주에 지상 고등학교는 다시 한번 조형 고등학교와 합숙 훈련을 하게 되었다.
감독간의 주선으로 손쉽게 맺어진 합숙은 단 일주일의 기한을 두었다. 지난번의 훈련과 마찬가지로 지상 아이들이 인천으로 올라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직접 운전대를 잡게 된 현성은 붉은 레인을 질주하는 단거리 육상 선수처럼 도로를 활보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고속도로뿐만이 아니라 커브가 난무하는 골목길에서도 질주 본능을 세웠다는 거다. 그 덕분에 상호는 거센 물살에 휩쓸리는 해초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현성이 화끈하게 핸들을 회전할 때마다 다은과 태성의 단단한 팔뚝에 양어깨가 부딪쳤다. 나중에 샤워를 하면서 그 부분을 만져보니 주사를 맞은 것처럼 욱신거리는 감이 있었다.
프로그램은 지난 5월과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두 학교는 실내 연습 경기뿐만이 아니라 기초 체력을 기르기 위한 훈련을 하는 등, 체육계 엘리트라면 마땅히 해야 할 훈련을 섭렵했다. 따가운 가을 햇볕에 익는 우레탄 냄새를 맡으며 숨을 헐떡거렸고, 귀로 실내 체육관 바닥과 농구화 밑창이 마찰하는 소음을 흡수하며 뛰었다. 쉴 틈이라고는 감독님이 학교 앞 마트에서 사 온 탱크보이를 빨아먹을 때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훈련의 최종 1등에게는 농구화를 사주겠다는 페이크로 얻어진 거였다. 현성의 가벼운 농담도, 체육관에서 늦게까지 연습을 하다가 교정을 나섰을 때 맡은 밤공기 냄새도, 부재한 병찬의 자리도 모두 지난 훈련과 똑같았다.
“공용 샤워실은 어디 있는지 알지? 혹시 세면도구 안 가져왔으면 내 거 써도 돼.”
단 하나, 룸메이트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회색의 철문을 열고 샤워를 막 끝내 훈기가 도는 병찬이 호실 안으로 들어왔다. 드라이기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 건조를 선호하는 건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남은 물기를 제거한 그는 흰색 티셔츠 차림이었다. 젖은 수건을 의자에 턱, 널어놓으려고 잠시 뒤도느라 보인 그의 등에는 머리카락 끝에 간신히 매달렸다가 힘없이 떨어진 물방울 얼룩이 져 있었다.
“세면도구는 챙겼는데…….”
“챙겼는데?”
“수건을 안 가져 와서…….”
“너만 안 챙겨 온 거야? 다른 애들은.”
“아, 다른 햄들이랑 희차이는 가져 왔는데 저는 빨래하는 걸 깜빡해갖고…….”
차마 한 장 빌려줄 수 있냐는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게임 한 번 하면 모두 친구라는 말처럼, 병찬과 협회장기에서 경기를 치른 이후 햄 호칭을 꼬박 붙일 정도로 그에게 친근함을 느끼는 상호였지만 막상 단둘이 있으니 어떤 말을 꺼내도 어색했다. 배역을 잘못 맡은 배우처럼 목소리 톤이 이리저리 튀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묘했고, 그 이면을 살펴보면 불유쾌한 감정이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단체 생활을 하면서 어쩌다 말 몇 마디 주고받은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190cm에 임박하는 남성 둘이 지내는 숙소는 단 몇 걸음이면 왕복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도 협소했다. 호흡의 떨림까지 눈치챌 수 있을 거리였다.
그때 이층 침대 맡에 앉아 있는 상호의 세운 두 다리 사이로 흰 덩어리 하나가 안착했다. 손으로 쓸면 보들보들한 감촉이 느껴질 것만 같은 수건이었다.
“아이고. 농구 선수면 바로 캐치해야 되는 거 아니야?”
고개를 들면 소량의 스킨을 손바닥에 덜어내며 낮게 웃는 병찬이 있었다. 그는 추운 겨울날 미약한 열이라도 내어 추위를 이겨보려는 사람처럼 열심히 손바닥을 비비다가 갑자기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자학을 하는 게 아니라 스킨을 바르는 거였다. 어쩐지 그 모습에서 현성이 겹쳐 보였다. 지상 고등학교의 농구부가 하나의 구호로 똘똘 뭉치게 된 이후, 현성은 다시 본가로 돌아갔기 때문에 한동안은 듣지 못했던 소리였다.
“쓰고서 여기 빨래 바구니 안에 넣어둬. 더 필요한 건 없지?”
그 말이 청혼처럼 들리고, 상호의 품에 갑작스럽게 안겨진 수건은 반지처럼 느껴졌다. 상호는 그제야 진실 게임에서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물거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때는 병찬을 만나기 전이었으니까. 전혀 관계가 없는 타인이 끼어들며 혹시 싸우는 거 아니냐고 오해할 법한 대화에만 익숙해져 있다가, 특정 날짜에만 열리는 이벤트처럼 어쩌다 한 번 듣게 된 중저음의 목소리는 낯간지러웠다. 친절하게 대해주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라는 걸 이 순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샤워를 하는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머리에 전구가 켜진 것처럼 정신을 차리면 평소 보다 두 배 많은 양의 샴푸를 짜낸 뒤였고, 그마저도 반은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타일 무늬를 따라 배수구로 천천히 흘러가는 샴푸를 보다 보면 손바닥에 남은 반도 샤워기에 씻겨 나간 지 오래였다. 오늘의 훈련 강도가 평상시보다 훨씬 빡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믿고 싶었다. 잡생각을 물리치기 위해 병찬이 했던 것처럼 손바닥으로 얼굴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손바닥에 남은 비눗물이 눈 안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손가락으로 눈을 뒤집으며 거품을 씻었다. 눈알을 때리는 물줄기가 아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씻기지 못한 거품이 따갑게 느껴졌다.
온갖 요란법석을 다 떨었던 샤워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가니 희게 올라왔던 병찬의 얼굴빛은 다시 원상복구되어 있었다. 그는 베개 위에 마른 수건을 대충 올리고서는 침대에 누워 농구 경기 영상을 보고 있었다. 중계 해설 위원의 목소리가 익숙한 것을 보아 상호도 익히 아는 채널인 것 같았다. 같이 보자고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 핸드폰이 출력해 내는 음량이 줄어들었다. 병찬은 이런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배려와는 의도치 않게 상호의 한 번의 기회가 날아갔다. 거절당하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라고 애써 자기 합리화를 했다.
“햄 되게 의외네요.”
“뭐가?”
“삼선 슬리퍼 신는 거요. 햄이라면,”
“왜, 너도 내가 형광색 신발만 수집하고 다니는 줄 알았어?”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먼저 치고 들어온 것으로 보아 이미 같은 문제로 수십 번은 얘기했던 것 같다. 하기야, 그가 두르고 있는 것들은 주위에서 평범하게 볼만한 색깔은 아니었다. 운동화는 그의 긴 머리카락만큼이나 속도감을 증폭시켜주는 일종의 장치였다. 그래서 상호는 그의 신발장을 열면 무채색의 운동화 보다는 특이한 컬러가 꼭 칠해져 있는 운동화가 가득 차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현실은 문방구에서 쉽게 볼 법한 삼선 슬리퍼였지만.
“네, 조금은요…….”
“다들 내 신발에 되게 관심 많네. 그렇게 특이한가?”
“특이하긴 한데... 햄이랑 잘 어울려요.”
맞은편 침대에 털썩 앉아 마르지 않은 머리를 손으로 대충 털었다. 축축해진 수건은 아직 목에 건 채였다. 샴푸 향기보다 수건의 섬유 유연제 향기가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급하게 벌떡 일어나 병찬이 아까 알려준 바구니 안으로 수건을 집어넣었다. 상호가 한 번 크게 들썩일 때마다 침대의 매트리스는 삐거덕 거리며 용수철 눌리는 소리를 냈다. 숨소리도 나지 않은 공간에서 유일하게 큰 소음이었다. 벌써부터 목이 빳빳해지며 자세가 굳어졌다. 소음을 내지 않고 잠에 들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공용 거실에서 단체로 잠을 청했던 5월의 합숙 훈련과는 달리, 이번의 합숙은 룸메이트가 미리 정해진 채였다. 바닥에 까는 이불과 덮는 이불의 구분 없이 마구잡이로 누워 잠을 청했던 지라, 남의 학교의 숙소 내부 상황까지는 알 길이 없었다. 막상 들어오니 벤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멀쩡한 이층 침대 두 개와 개인 옷장, 책걸상이 완벽히 갖추어져 있었다. 거실에 이불 펴고 일렬로 누워 자는 지상 고등학교의 숙소 상황을 설명하면 전혀 믿지 않을 것 같았다.
“머리 더 안 말려도 돼?”
“원래도 안 말리고 그냥 자서……. 상관 없어요.”
“피곤하면 불 끌까? 스탠드만 키고.”
작게 동의하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해 보니 기숙사 소등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불을 끈 이유는 전등이 너무 밝아서 그랬다. 병찬과 둘이 숙소에 있게 되면서부터 눈은 자연스럽게 늘 밑을 향했지만 부릅뜨고 있느라 눈꺼풀이 건조했다. 어쩌면 샴푸가 아직까지 덜 씻긴 걸지도 모른다.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린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위로 스탠드 조명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햄.”
“응?”
한 박자 늦게 대답한 병찬이 피로에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게도 오늘 하루가 고됐는지, 평소보다 반 박자 늘어난 말꼬리가 유독 길게 늘인 태엽처럼 느껴졌다. 동화 속 세상처럼 평온했고, 그래서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만 같았다.
“더 이상 고등부 경기 출전은 안 하시는 거예요.”
물음표가 생략된 문장은 상당히 명령어처럼 들렸을 것이다. 정답기보다는 무뚝뚝하고, 많은 감정을 담고 있지 않아 건조하게 느껴지는 상호의 목소리는 어느새 반쯤은 수면에 잠겨 있었다. 온전한 병찬의 목소리를 듣고 난 직후여서 그런지 말투는 더욱 투박하게 느껴졌다. 안개에 휩싸인 마을처럼 테두리만 간신히 존재하는 상호의 말은 사실 이런 뜻을 담고 있었다. 당분간 형이랑 농구 코트에서 마주 보는 일은 없죠? 몇 개월 전에 했던 약속이 뭐라고 병찬과의 농구를 벌써부터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곧 있으면 나이 제한도 걸리니까…….”
“나이 제한이요?”
“응. 상호는 2년 안 꿇어봐서 모를 수도 있겠다. 고등부 경기는 만 19세까지만 나갈 수 있어. 몰랐지?”
“아, 그런 이유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본인만 웃을 수 있는 자학 개그를 꺼낸 병찬은 이어폰의 다른 한쪽을 아예 귀에서 빼버린 후 책상 위에 대충 올려 두었다. 병찬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아서 몰랐는데 이어폰으로 농구 경기를 보고 있던 모양이다. 그는 상호가 있는 쪽으로 돌아누운 후 팔 위로 머리를 기댔다. 눈 감으면 3초 안에 잠에 빠져들 것처럼 굴던 꼬맹이가 말을 걸어온 게 나름 신기한 모양이었다.
“... 그렇게 보니까 햄 완전 어른이네요.”
“푸핫, 상호야. 형은 네 앞에선 이미 어른이지.”
“그건 그렇긴 한데... 모르겠어요. 싸움 날 때마다 팝콘 먹으면서 구경하고, 세레머니도 엄청 요란하게 하고... 아까도 조형고 감독님한테 탱크보이 말고 뽕따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어요?”
“날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초등학생 아이가 제 하루 일상을 떠드는 걸 귀담아듣는 어른이라도 된 것 같은 병찬은 가만히 누워 간간이 상호의 말에 대꾸를 해주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잠결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손 틈새로 빠져나가는 바닷물처럼 그대로 놓쳐 버릴 것 같았다. 조용히 손을 들어 책상 위 놓여 있는 스탠드 버튼을 조작했다. 감은 눈을 미세하게 괴롭히던 흰 불빛이 따스한 노란색으로 발광했다. 이 거리에서 보이지 않지만, 아마 상호의 눈 밑으로 얇은 속눈썹의 그림자가 져 있을 것이다.
“매일 그런 생각 한 건 아니구요…….”
“그래? 그럼 무슨 생각을 주로 했는데?”
“그냥... 대학가면 햄 좋아하는 사람 엄청 많겠다는 생각이요.”
실수로 진실만을 말하게 되는 물약을 먹은 것처럼 상호는 마음에 담아두기만 하려던 이야기들을 전부 꺼냈다. 그리고 병찬은 깃털로 발바닥을 간질여지는 것처럼 웃음을 흘리게 되는 물약을 먹은 것 같았다. 상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잠꼬대인지 맨정신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는 없어도, 어느 쪽이든 진실이라는 건 변치 않을 사실이었다. 같은 방을 배정받은 이후 간단한 숙소 구조를 설명할 때까지만 해도 리액션은 무슨, 눈썹 근육조차 스스로 움직일 줄 모르는 로봇 같았는데. 뜨끈한 온수로 몸을 푹 익힌 후 긴장이 풀어져서 인지, 아니면 병찬과의 시간 속에서 나름의 평화를 확보해서 인지는 몰라도 한결 편안해 보이는 태도가 다행스럽다고 느꼈다. 그는 이불 안으로 얼굴을 숨긴 후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다. 제가 내쉬는 날숨에 슬슬 얼굴이 더워질 즈음 고개를 들어보니, 상호는 입까지 벌리고 있었다. 일정한 리듬을 가지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이불 산이 포근해 보였다.
“형이 인기 많을 것 같아?”
“네... 햄은 일단 잘생겼잖아요. 아닌가, 예쁜 거에 더 가까운가. 처음에 코트 위에서 마주쳤을 때는 몰랐는데 햄 보다 보니까 쫌 청순한 것 같기도 하고. 막 그렇게... 그렇게 생긴 건 아닌데 아무튼 햄 잘생겼어요. 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저희 저번에 체육관에서 마주쳤을 때 있잖아요. 그때도 슛 좀 봐달라고 하니까 바로 봐주시고... 햄 안 그럴 것 같은데 은근 다 받아주시고. 아까도 수건 막 빌려주셨잖아요…….”
“에이, 그건 당연히 해줄 수 있는 거지.”
“아니에요 햄, 그거 진짜... 저는 이런 친절 되게 오래만간, 오래만? 아, 오래간만에 받아봐요.”
손가락으로 찌르는 족족 들어가는 물렁한 홍시처럼, 병찬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상호는 정직하게 답변을 내놓았다. 꿈결을 헤매는 것처럼 보여도, 제가 던진 문장의 배에 달하는 크기의 답을 하는 상호는, 사실 잠결을 빌미로 하여 평소에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 쏟아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대학 가면 바로 애인도 사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하, 상호 연애 하고 싶어?”
“…….”
“응?”
“햄 같은 사람이면 하죠…….”
막 위로 올라가려던 입꼬리가 그 자리에서 굳었다. 동시에 몸을 부풀리며 작은 언덕을 그리던 이불의 움직임도 멈췄다. 다음 대사가 미리 정해진 각본처럼 그칠 일 없이 이어지던 대화마저도 상호의 말을 끝으로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끊겼다. 쉼표만이 그려진 악보처럼 정적을 머금고 있던 공기는 도돌이표를 만나 다시금 머릿속으로 상호의 대사를 반복시켰다. 뒤척일 때마다 작게 메아리치던 싸구려 매트리스의 소리조차 나지 않는 지금, 병찬의 귓속을 가득 채우는 건 나직하고도 어린 목소리였다.
물론 그 마음은 당연히 고맙지. 오랜 정적 후 병찬은 입을 열었다. 근데 거기까지여야 한다고 생각해.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형은... 아직 농구를 더 많이 하고 싶어. 완곡한 표현의 거절이었다.
문득 숙소에 들어온 상호가 처음 꺼냈던 말이 떠올랐다. 저 잠버릇 같은 건 없었어요? 푸른 하늘을 담은 것 같은 외투를 벗으며 물었다. 음,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너네 저번에 왔을 때도 다들 조용히 자서 좋았어. 옷장에서 흰 반팔 티를 꺼내며 병찬이 답했다. 버릇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같은 학교 친구들이 알려줘서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그땐 왜 물어봤는지 살짝 의문이 들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상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들이 평소에 같이 겪던 농구와는 달리 살짝 사적인 영역에 걸쳐 있으면서도, 상호는 모를 수도 있고 병찬은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는 것.
기억은 병찬을 초여름으로 데려갔다. 옆 친구에게 이불을 빼앗길 위기였는데도 정자세로 새근새근 고른 숨만 내쉬던 아이. 그런 상호는 제 건너편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리며 누워 있었다. 병찬이 잠을 청하는 자세와 닮은 모양이었다.
Set,
그러니까 어리광 그만 부리고 될 때까지 슛이나 던져. 암묵적으로 고백을 거절당한 이후, 유독 그 말이 가위에 처음 눌렸을 때와 같은 감각으로 상호를 괴롭혔다. 지금의 상호에겐 이제 막 입시 준비하는 애가 연애할 시간도 있고, 농구가 이젠 꽤 할 만 한가 봐? 하며 자신을 나무라는 것처럼 들렸다. 물론 그런 의도를 가지고선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그 시절의 병찬은 같은 학교도 아니고 동급생도 아닌, 5살이나 어린 후배 하나가 자신을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는 줄 몰랐을 테니 말이다.
묵묵히 제 몫의 햄버거를 먹어 치우고, 전문가 솜씨에 빙의하던 병찬이 섞은 양념 감자도 모조리 입에 털어 넣었다. 탄산음료 속 얼음으로 이미 입가심을 끝낸 그는 심화 문제를 두고 골머리를 앓는 사람처럼 한 손을 턱에 괸 채였다. 시선은 기상호의 턱 끝을 향해 있었는데 정답이라도 나오길 기다리며 쳐다보는 건지, 아니면 상호가 다른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싶은 마음에 쳐다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쓰레기 종류대로 간단하게 분리수거까지 마친 상호는 쟁반을 들고 일어섰다.
“이제 갈까요.”
그렇게 말하고서는 병찬의 등 뒤를 따라갈 자신이 없던 상호는 도와주겠다는 병찬의 손길을 내버려 둔 채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졸랐다. 소프트콘 말고 토네이도, 쿠키 앤 크림 맛으로. 분리수거를 하다가 손가락에 묻은 케첩을 닦기 위해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나왔다. 티셔츠가 축축해지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구비된 핸드 드라이어 대신 반팔에 손을 문질렀다. 1층으로 내려가니 출구 가까운 곳에 서서 상호를 기다리는 병찬이 보였다. 한 손에는 토네이도를 든 채였다. 햄, 아직 안 먹었죠? 상호야, 형이 동생 간식 뺏어 먹는 양심 없는 놈으로 보이니. 전과 다름없는 농담과 함께였다.
고작 숟가락을 몇 번 움직였을 뿐인데 아이스크림은 벌써 바닥을 보였다. 플라스틱 숟가락이 축축해진 종이컵 바닥을 긁을 때마다 묘한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이 소름의 출처는 기분 나쁜 촉감 때문이 아니라 목구멍을 넘어가는 크림 덩어리 때문이 아닐까 다시 생각했다. 병찬을 만나기 전, 그의 문자를 받고 다급히 나오면서 제 몫의 김치볶음밥은 꼭 남겨달라고 당부를 했던 기억이 났다. 주머니에 쑤셔 둔 핸드폰을 꺼내보니 희찬에게서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니 김치볶음밥 분명 락앤락 안에 담아뒀는데 누가 다 먹어버렸다]. 시간차를 두고 도착한 또 다른 메시지는 빨간 잔해만을 남긴 채 텅 빈 락앤락 통 사진이었다. 역시 기묘한 불쾌감의 출처는 이거였나 보다.
“슛 봐줄까?”
“갑자기요?”
“게임만 했지, 자세 봐준 적은 없는 것 같아서.”
원통형의 종이컵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이 고개를 처박고 있어서 미처 몰랐던 사실은, 병찬이 향하던 곳은 바로 야외 농구 코트였다는 거다. 그가 상호와 농구를 하고 싶어질 때면 항상 불러내던 곳, 게임의 승패가 결정 나면 결과에 상관없이 둘 다 바닥 위로 몸을 뒹굴었던 곳. 어쩌면, 농구는 표면으로 드러난 이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찬은 상호가 알아차리지 못할 주파수로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코트 안에는 게임을 막 끝낸 무리들이 어수선하게 떠들며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인공 잔디 색깔을 닮은 코트 바닥 위에는 주인 잃은 농구공이 전부였다. 마치 병찬과 상호의 지문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햄. 그러지 말고 저희 좀 솔직해져요.”
발걸음이 느려진 병찬을 뒤로 한 상호가 한 걸음 내디디며 코트 안으로 진입했다. 마치 플레이어가 게임 스타트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어두침침한 가로등은 핀 조명이 되어 상호 한 사람만을 비추었다. 부유하는 먼지는 무대 효과가 되었고 상호의 손에 들린 농구공은 주인공이 누구인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공중에 농구공을 던졌다가 받으며, 상호는 입을 열었다.
“햄. 재작년에, 같이 농구했던 거 기억해요?”
“당연히 기억하지. 그때 처음 만났잖아. 조금 추했을지는 몰라도.”
“아뇨, 전혀 안 추했어요. 그런 걸로 따지면 제가 더 그랬죠.”
“왜? 너 그렇게 재능 없지도 않다니까.”
“사실, 저 그 해 쌍용기까지만 하고 농구 그만두려고 했어요.”
솔직해지자는 말의 촉은 한 사람에게만 향해진 게 아니다. 상호가 병찬에게 보여주고 싶던 진심은 형을 동경 그 이상의 감정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고마움이었다. 2년 전 협회장기에서 맛본 건 제가 게임에 들어가서 졌다는 죄책감이 전부가 아니었다. 물론, 좋지 못한 성적을 거뒀다는 것에 패배감에 휩싸였을지는 몰라도, 그 감정의 유효기간은 짧았다. 중요한 건 에이스 스토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저를 돌파해 준 병찬이었다. 코트에서는 위협적인 적수였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날려 그의 돌파 경로를 차단했던 기억, 병찬의 손에 들린 공을 제 손으로 뺏었을 때 닿았던 오돌토돌한 고무의 표면, 그 감각. 심장에서부터 뻗어 나온 가지가 몸을 감싸 오르고 있었다. 이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상호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야외 코트는 그가 농구의 재미를 알게 된 진초록빛 주차장의 색깔을 닮았다. 뒤통수가 깨졌어도 쓰라린 아픔보다는 손끝에 매달린 농구공이 더 중요했고, 좋았다. 그 감정이 상호의 뒤통수를 간질였다.
다시 한 번 농구의 재미를 알게 해준 사람, 병찬이 에이스로 존재해줘서 고마웠다.
“그래서 다시 코트로 왔어요. 또 보자고 약속했잖아요”
“…….”
“햄은요? 햄은 어때요?”
차분히 제 이야기를 늘여놓은 후, 떨리는 손을 애써 무시한 채 식은땀에 공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상호는 농구공을 꽉 쥐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입술은 꾹 다문 채였다. 그래도 호흡은 엉망이었다. 침을 제대로 삼켜내지 못한 목울대가 제멋대로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런 건 저 혼자만이 아닌 듯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직도 잘 모르겠어.”
병찬이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코트 안으로 들어왔다. 상호의 시야 속 병찬도 점점 커져만 갔다. 이제 가로등 불빛을 받는 건 상호뿐만이 아니었다.
“저는 알 것 같아요.”
“…….”
“그리고 햄도 사실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여기로 다시 돌아온 거 아니에요?”
가만히 있는 거보단 슛 한 번이라도 더 하는 게 낫다는 거, 햄이 알려 준거예요.
상호가 손에 들고 있던 농구공을 병찬에게로 패스했다. 상대방이 기분 좋게 바로 슛 올릴 수 있도록 가슴 정중앙을 향한 정확한 패스였다. 나에게 농구의 재미를 알려준, 상대팀의 공을 빼앗는 게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 가르쳐 준, 또 보자는 말의 결속이 얼마나 대단한 지 깨닫게 해준 병찬에게 본인도 똑같이 알려 주고 싶었다. 아직 잘 모르겠다면, 최선을 다해 나를 돌파해 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저도 죽기 살기로 햄을 막아볼 테니, 나를 통해 무엇이든 증명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농구공이 코트를 울리는 소리보다 심장박동소리가 더 빨랐다. 병찬은 상호를 돌파하여 망설임 없이 달렸다. 상호는 가만히 멈춰 서서 그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병찬이 림을 향해 있는 힘껏 뛰었다. 제가 좋아하는 모습이 다 저기에 담겨 있었다. 나의 첫사랑이 하늘을 향해 비상하고 있었다.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는 비행이었다.
Go!
*본 글의 제목은 페퍼톤스-Ready, Get Set, Go! 노래를 참고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