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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도 당근이 되나요
익명

1.
첫사랑이라는 단어는 상호에게 더웠던 한여름의 땀내나는 체육관을 떠올리게 했다.
가장 농구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협회장기까지 1승도 챙기지 못한 꼴찌 팀에서 도움조차 되지 않는 가장 허접한 선수에게 병찬이 기꺼이 건넨 진지한 조언과 어설픈 칭찬 덕분이었다. 대체 몇 경기나 같이 뛰었다고. 만년 벤치 식스맨 기상호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럼에도 새까만 눈동자와 여유 있게 돌아서는 등, 처음 보는 그의 교복 차림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 또 보자.
어린 마음에 사랑과 동경을 헷갈린다고들 하지만 상호가 생각하기에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세상에 사랑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첫사랑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뭔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고백이라거나, 풋풋한 썸이라거나. 그런 뭘 해보기에는... 내는 남잔디. 그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 성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경기에서 마주쳐 얼굴이라도 한 번 보는 것으로도 설레고, 어쩌다 마주친 병찬이 다정하게 웃으며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준 날에는 잠을 설쳤다.
별 의미도 없이 바뀌지도 않은 병찬의 프로필 사진을 들락날락하며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이제는 포기해야지, 하다가도 상호 오늘 3점슛 성공률은 어때? 하는 메시지에 속절없이 두근거렸다. 답장도 한참을 고민해서 보냈다.
아, 뱅찬햄 오늘의 저는 돌파도 슛도 0.5PBC 쌉파써블이다 아임니까ㅍvㅍ.
그는 의도치 않게 늘 상호에게 포기를 포기하게 했다. 농구도, 짝사랑도 마찬가지다.
5학년 졸업 축하해요.
상호가 보낸 그 메시지는 딱 병찬과 상호의 거리만큼 시간이 지나서야 답장이 왔다. 형광 초록색의 농구화만 빛나고 있던 병찬의 프로필 사진은 꽃다발을 들고 렌즈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도 햄 졸업식 보고 싶다. 앞으로 을매나 더 같이 뛸 수 있을까.
병찬과의 물리적인 거리도 마음의 거리도, 나이 차이조차도 너무나 멀게만 느껴져서 견딜 수 없이 서러웠다. 희차이, 내는 꼭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끼다. 주먹을 꼭 쥔 상호의 다짐에 희찬이 손을 내려 주먹을 콩 부딪혔다. 이 악물고 뛰자, 내도 서울로 대학 갈 끼다.
2.
상호에게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대학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올해의 지상고는 어떤 대회에서도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강팀이었고, 추계대회를 마무리했을 때는 3학년 모두에게 대학 오퍼가 쏟아져 들어왔다. 공수 양면으로 실력이 일취월장한 다은의 경우, 고졸 드래프트를 권유받기까지 했다.
연습이 끝나자마자 현성은 상호를 불러 단호한 어조로 충고했다.
올해 거 서교대에 주전 뛰던 가드들이 전부 얼리로 빠진다 카대. 내는 거 이름값보다 서교대가 맞다 생각한다, 상호야. 그는 밤을 새며 고민했는지 퀭해진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 지압하고 있었다. 흰자에 실핏줄이 서서 눈이 반쯤 감긴 현성에게 준향대라는 고민거리를 새로 내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올해의 서교대는 빈집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같은 학년에 상호만 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가드는 없다. 어쩌면 프로 스카우터들에게도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이미 준향대에는 최고의 가드라고 평가받고 있는 병찬이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었고, 외곽이라는 제한된 선택지가 필요 없는 슈터 준수가 버티고 있었다. 입학해서 교체 자원으로 투입된다고 해도 1학년부터 충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사실은 상호가 제일 잘 알았다. 준향대에 간다고 해도, 병찬이 얼리 드래프트를 신청할 것을 고려한다면 같이 뛸 수 있는 기간은 고작 1년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프로에 지명을 받지 못한다면? 드래프트에 지명받지 못했던 주익대 농구부 학생들이 행사장을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울었다는 얘기는 이미 파다했다. 충격적이게도, 대부분 대학 리그에서 꽤 주목받은 선수들이었다.
그 고작 1년이 병찬과 같은 코트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꽉 쥔 주먹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지고 나서야 힘을 풀었다.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손바닥보다 결국은 현실이 더 아팠다. 같은 대학에서 한 번이라도 농구할 수 있으면, 이 감정도 이제 정말 접을 수 있을 텐데. 간신히 좁혀낸 병찬과의 거리는 여전히 너무 멀었다. 고백이라도 한 번 해 볼 수 있었다면. 무엇 하나도 시도해보지 못한 것 치고는 적절한 핑계였다.
대학 리그에서 마주한 병찬은 더 묵직하고 날카로우며 훨씬 변칙적이었다. 그의 덩치로 밀어내는 강한 포스트업을 버텨야 했고, 그러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병찬의 볼을 컨테스트라도 할 수 있는 것은 1학년 중에서 상호가 유일했다. 체력을 뺏어가는 상호의 압박 수비에도 투덜대지 않고 흥미롭게 눈을 빛내며 꼬박꼬박 엄지를 들어 올리는 가드 역시 병찬뿐이었다.
"햄."
"응?"
"돌파하기 전에 항상 뽈 이래 돌리는 거 알고 있어요?"
"어라. 이런 거 알려줘도 되겠어?"
"그거 하나만 안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상호는 점점 힘들어지네.“
하하. 상호의 복슬복슬한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마구 헤집으며 병찬이 씨익 웃었다. 머리가 흘린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는데도 불쾌한 기색조차 없었다. 그건 너 그렇게 재능 없지도 않아, 뭐 그런 어설픈 칭찬보다는 훨씬 칭찬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삐익- 쿼터의 시작 준비를 알리는 버저 소리가 뱃고동처럼 울렸다.
"근데 상호야. 알면 막을 수 있겠어?“
위아래로 볼을 쥔 병찬의 손에서 공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자세를 낮춘 상호의 쭉 뻗은 윙스팬 사이로는 빈틈이 없었다. 온다. 돌파당한다! 자세를 단단히 낮춰 대비하는 동시에 병찬의 손을 벗어난 공이 깔끔한 포물선을 그렸다. 링도 스치지 않는 깔끔한 3점의 클린 슛이었다. 오예~ 꿀팁 고마워. 스쳐 지나가는 병찬이 노래 부르듯이 속삭였다. 상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병찬이 스친 귀가 너무 간지러운 탓에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남들이 들을까 봐 무서웠다.
간지러움은 경기가 끝나고 나서도 며칠간 사라지지 않고 상호를 괴롭혔다.
3.
병찬은 얼리 드래프트를 신청하지 않았다. 해가 지나도 준향대의 주전 가드는 그대로 병찬이었다. 오른쪽 코너 슛을 던지기 전에는 항상 원 드리블 페이크를 준다거나, 볼에 스핀을 걸어 고민하는 척 돌파를 시도하는 병찬의 습관도 여전했다. 상호는 여전하지 않았다. 매일 조금씩 병찬을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난처하게 웃으며 상호는 어렵네, 하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기면 그 모습은 상호의 그 날 밤 꿈이 되었다.
상호 역시 파악당했다. 그는 상호의 주특기인 미스매치 플레이를 유도하지 못하게 절묘한 위치에서 움직임을 차단했고 상호의 포스트업에 밀리지 않을 만큼 묵직하고 노련했다. 준향대와의 경기는 볼 점유시간이 초과했다는 샷클락 바이얼레이션 휘슬이 가장 많이 불리는 경기였다.
병찬은 리그 마지막 경기에는 나오지 않았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새내기 가드가 어설픈 드리블과 덜 갖춰진 디펜스로 상호에게 득점-스틸-어시스트의 트리플 더블이라는 기록을 내 줬을 뿐이었다. 병찬은 두 배 가까운 점수 차이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원정 라커에서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있을 때 기억났다는 듯 창현이 말을 걸었다.
"박병찬 형님, 졸업하고 미국 간다며... 개 부럽다."
"미국이요?"
"엥? 너 못 들었냐? 둘이 친한 거 아냐?"
"그야...친하죠! 창현햄은 그걸 어디서 들었대요? 햄 친구 없다 아니에요?"
"야! 내가 혼자 다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랑 같이 안 다니는 거 뿐이라고.“
얼리 드래프트를 신청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구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싶으면 순식간에 멀어지는 거리가 결국 병찬과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결국 마지막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상호는 끝맺음을 맺을 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오래 전부터 고민했던 대로 해묵은 마음을 고백하고 관계를 끝내는 것이 맞았다. 병찬이 받아들일 거라는 한 점의 기대조차 없었다.
병찬이 주로 신는 초록색 농구화는 얼마 전에 단종된 제품이었다. 몇 번의 거래 거절 끝에야 간신히 해외 배송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용돈을 저금해둔 통장의 돈이 아슬아슬해 다섯 살 때부터 모으던 빨간 돼지 저금통의 배까지 갈라야 했다. 갑작스러운 강풍과 폭설에 배송 예정일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병찬의 졸업식 전에 받을 수 있었다.
준향대의 졸업식은 설날과 애매하게 인접한 날짜였다. 기차 예매에 실패한 상호의 고속버스는 운 좋게 오전의 취소표를 구한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프로필 사진이 아닌, 진짜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는 병찬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밤새 선물을 건네며 전할 고백을 고민하느라 깜빡 잠이 들었을까. 눈을 떴을 때 고속버스는 아직도 꽉 찬 도로에서 제자리 걸음중이었다. 거북이도 이것보다 빨리 기어가겠다 싶을 정도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초조하게 흘렀다.
결국 땀범벅이 되어 도착한 준향대 정문은 한산했다. 한 무리의 인원이 우르르 빠져나간 것인지 바닥에는 발자국이 잔뜩 찍혀 버려진 학사모가 굴러다녔다. 교정 곳곳에 잎이 다 떨어져 버려진 초라한 꽃다발들도 눈에 띄었다. 정처 없이 앞을 향해 걷던 상호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익숙한 체육관 앞에서였다. 길을 잃은 와중에도 이정표처럼 병찬과 경기했던 곳을 찾아왔다 싶어 웃음이 나왔다.
"어? 기상호? 기상호 선수 맞죠?“
갑작스러운 부름에 번쩍 든 시야에 마주한 녀석은 병찬의 부재를 채웠던 준향대의 새내기 가드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등번호가 14번이었다는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박병찬 선배님 졸업식 오신 거예요?"
"예. 근데 쫌... 늦어가지고."
"선배님 아까 부모님이랑 식사 가시는 것 같던데. 오늘 출국하신다고..."
"아.“
상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꽉 쥐었던 손바닥에 피가 통해 저릿했다. 어라? 상호는 그제야 양손이 가볍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분명 버스 탈 때까지는 가지고 있었는데. 상호는 허둥지둥 주변을 살폈다. 농구화가 든 쇼핑백이 사라져 있었다. 버스에서 두고 내린 것인지, 급하게 달려오던 도중에 놓쳐버린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찬의 후배가 새하얗게 질린 상호의 표정을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손끝이 벌벌 떨렸다.
"저 혹시... 박병찬 선배님께 전달하려고 다 같이 메시지 북 쓰고 있는데. 오신 김에 한 마디 써주실래요?"
"..."
"선배님이랑 친하시니까. 아마 좋아하실 거예요.“
상호의 침묵이 긍정적으로 해석된 것인지, 그가 체육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문 너머로 보이는 체육관은 거의 비어 있었다. 애매한 시간 탓인지 운동복 차림의 학생 몇몇이 코트 앞에서 2on2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농구화의 끼긱거리는 마찰 소리만 체육관을 울렸다. 상호는 머뭇거리며 안으로 발을 디뎠다. 병찬의 후배가 성격 좋게 웃으며 상호에게 손짓했다.
농구부실 책상 위, 대자보만 한 종이에는 투박한 글씨들이 꽉 차게 적혀 있었다. 메시지 하나하나에 병찬을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박병찬 화이팅!
다음에 만날 땐 국가대표 박병찬으로 봐요ㅋㅋ
병찬이형 가지마요ㅠㅠㅠ
형 보고 싶을 거예요.
선배님 정말 감사합니다!
쓴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병찬을 향한 애정에 제가 다 애정이 벅찼다.
"저는 이제 슛 연습할 거라서 먼저 가볼게요. 편하게 쓰시고 가세요.“
그가 나간 부실에는 이제 상호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병찬에게 선물하려던 농구화도, 병찬도 없었다.
아무래도 진짜 이제... 포기할 운명인가 보다. 온 우주가 그의 전해지지도 못한 짝사랑에게 포기를 강요하는 것만 같았다. 눈을 굴려 종이의 빈 공간을 찾으며 상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병찬의 행복을 비는 많은 글씨 사이에서 가장 초라한 구석, 좁게 남은 백지에 상호는 펜을 꾹꾹 눌렀다.
좋아해요.
길고 길었던 상호의 짝사랑에는 드디어 마침표가 찍혔다. 지금부터 시작, 이제 끝. 뭐 그렇게 정한 것도 아닌데. 이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너무 이상해서 눈물도 나지 않을 정도로. 그저 견딜 수 없이 서러웠을 뿐이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만 같았다.
4.
흔히들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물건엔 기묘한 애착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정리한답시고 온통 뒤집어진 방구석에서 잊고 있었던 신발 박스를 발견했을 때, 상호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 그것은 과거의 상호에게 애물단지와도 같았지만 다시 찾았다는 희미한 미련 탓에 버리지 못한 물건이었다. 남겨진 한 줌 미련과도 같았다.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상자는 내용물의 상태가 불안할 정도로 모서리가 닳아 해져 있었다. 먼지를 피해 손톱 끝으로 뚜껑을 열자 가느다란 정오의 겨울 햇빛 사이로 먼지가 범람했다. 먼지 탓인지 칼칼한 목이 메였다.
드러난 농구화는 세월이 무색하게도 색바램 하나 없이 찬란한 형광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잃어버리고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병찬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에서 돌아왔다.
계약이 잘 되지 않은 것인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상호는 굳이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실은 병찬의 졸업식 이후로 핸드폰 번호를 바꾼 탓에 연락이 닿지 않았다. 상호로서는 나름의 끝맺음을 위한 큰 결심이었다. 하루 종일 병찬의 프로필 사진을 쳐다보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연결고리를 끊어야만 했다.
내심 기대했지만 상호의 바뀐 번호로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병찬이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을 때 진심으로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대학리그 플레이오프에서 상호는 이례적인 부진을 겪었다. 슛은 흔들렸고 주특기인 픽앤롤 플레이는 너무 쉽게 읽혔으며, 내내 사인이 맞지 않아 볼을 놓쳤다. 서교대에는 상호를 대체할 만큼 경험 있는 가드가 없었고, 능숙하게 작전을 이해하고 수비 롤을 수행할 수 있는 선수는 더더욱 없었다. 사실 있었다면 상호가 주전으로 뛰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국 창현의 공룡 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벤치에서 서교대의 패배를 지켜보아야 했다. 고등학교 시절, 충분히 패배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상호에게도 그건 끔찍한 경험이었다.
신인 지명식에서 병찬은 1라운드 2순위로 뽑혔다. 그는 서울 DK 펭귄스의 가드로 화려한 데뷔전을 치렀다. 선발로 나선 첫 경기에서 신인 선수 중에 가장 처음으로 23득점-11어시라는 더블더블을 달성한 것이다. 곱상한 외모와 시원시원한 팬서비스로 펭귄스의 홈 경기장은 개막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등번호 21번을 가진 팬들로 북적였다. 시즌 신인상은 당연히 병찬의 것이었다. 티비 중계를 통해 비치는 모습을 볼 때면, 병찬과 대학 리그에서 몸을 맞대며 경기하던 시절이 아주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초록색 농구화를 즐겨 신었다.
외면하려던 상호의 유튜브 알고리즘에도 펭귄스와 박병찬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고백 한 번 없이 도망친 결심이 무색했다.
병찬의 농구화를 검색해본 것은 충동적이었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포털 사이트엔 아직도 검색 기록이 남아 있었다. 지식인의 답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별 의미 없이 길게 늘여 쓴 글의 스크롤을 휙휙 넘기는데 글 사이사이로 알고리즘에 의해 벌써 농구화의 이미지와 금액이 뜬 광고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요즘 세상 뭐 하나 검색하기도 무섭구마. 별 생각 없이 뒤로 가기를 누르려는 상호의 손이 멈췄다.
구매할 때까지만 해도 그 농구화는 모은 용돈으로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병찬 역시 인터뷰에서 고가의 라인이어서가 아닌, 쿠션감이 좋아서 중학생 때부터 꾸준히 같은 모델을 신게 됐다고 언급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고 페이지 광고창에 떠 있는 병찬의 농구화는...
"일...십...백...천, 만...“
금액의 단위를 세던 상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병찬의 이름값이 반영된 것인지, 단종으로 인한 여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농구화는 상호가 구매했던 가격의 세 배가 넘는 몸값을 뽐내며 광고창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건... 절절한 가슴 아픈 첫사랑의 추억으로만 남겨두기엔.... 너무 비싼 몸이었다.
이거이거, 농구화 코인이 미래였다 아이가. 내 여태 이걸 몰라가...
5.
당근!
당근당근! 당근!
당근!
쓰레기봉투를 내놓고 현관으로 들어오는데 정신 없는 알람음이 방을 가득 채웠다. 뭐고? 대수롭지 않게 확인한 중고 거래 앱의 채팅 탭에 적힌 숫자가 실시간으로 올라갔다. 스크롤을 세 번 정도 끝까지 올려야 채팅의 끝이 보일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농구화는 상호의 오래된 밥상을 배경으로, 아주 적당한 프리미엄 가격에 게시되었다. 시가보다 조금 낮은 금액이었다. 백만원이라니 뭐라카노. 농구화에 백만원을 쓰는 사람이 있겠나. 하는 안일하고 양심적인 마음가짐 탓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농구화에 백만원을 쓰는 사람은 존재했다. 심지어 많았다! 불티나게 오는 연락에 가격을 올려 다시 올릴까 하다가 차마 쫌새미 짓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 그만두었다. 이래 연락이 많이 올 줄은 몰랐는디... 상호의 시선이 채팅앱을 배회했다. 고민하던 그는 결국 가장 처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을 선택했다.
하이여^^
네고 되용?
되겠어요?ㅡㅡ.
하이요ㅎㅎ
이미 충분히 낮춘 가격이라서...
상대방이 메시지를 읽은 것은 분명한데, 답장이 오지 않았다. 딱 6분만 기다려준다.
내 윽수로 상남자스럽지 않나. 만족감에 입술을 씰룩이는데 앱에서 당근! 하고 다시 알람이 울렸다. 진동으로 바꾸는 것을 깜빡한 탓이다. 상호는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들어올렸다가...
떨어뜨렸다.
아야. 난데없이 묵직한 핸드폰에 얻어맞은 허벅지가 얼얼했다.
삽니다 110만원
쿨거래 간으합니다
오타조차 신경 쓰지 않는 배포까지. 그건 그야말로 진짜 상남자의 메시지였다.
6.
"준수야. 너 혹시..."
"네?"
"아니, 아니다.“
날카로운 눈매가 시종일관 달달 떠는 다리를 훑었다. 병찬의 무릎을 감싼 검은 타이즈가 정신 사납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보는 사람이 더 불안함을 느낄 만큼 초조한 기색이었다. 병찬의 시선은 손에 든 핸드폰 화면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며칠 전의 통화에서 여동생인 지수가 중얼거렸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오빠, 그거 알아?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수와의 통화는 거기서 끊겼다. 지금에 와서지만, 준수는 어쩐지 그때 지수가 하려다 만 말을 알 것 같았다. 두 번째는 사람을 앞에 두고 정신 사납게 다리를 떨어대는 것이다.
망설이던 병찬은 결국 입을 열었다.
"혹시... 상호 있잖아. 핸드폰 번호 바뀐 거야?"
"기상호요?"
"연락이... 안 되는 것 같아서.“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과는 영 다른 병찬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준수는 한숨을 푹 쉬며 주변을 살폈다. 한참을 뒤적거린 것이 무색하게 그의 핸드폰은 의자 위 더플백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다. 배터리가 깜빡거리는 걸 보니 충전을 깜빡했던가. 어차피 별 시답잖은 스팸 메시지가 가득할 것이다.
희찬이 만든 단톡방의 이름은 여전히 [지상최강>ㅁ</] 이었다. 준수와 재유가 졸업한 이후로도 활발하게 톡이 올라왔던 그 방은 모두 대학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야 빈도수가 줄어들었다. 그 톡방에서 준수의 지분율은 0.31% 정도여서, 항상 남아있던 메시지 옆의 숫자 1이 사라지는 순간에는 톡방 지분율 98%를 뽐내는 희찬이 실시간으로 감격의 톡을 올리고는 했다.
내 말했지 않나! 준수햄도ㅠㅠ 우리를 기억은 하고 있다 안 카나.
최근에도 제법 소식을 교환했는지 톡방 옆의 숫자는 여전히 999+를 유지하고 있었다. 준수의 시커먼 핸드폰 화면에 병찬의 시선이 머물렀다.
내도 요번에 얼리 드래프트 신청해보려고.
마침 올라온 메시지는 상호로부터 온 톡이었다. 기상호, 라고 적힌 이름 옆에 프로필 사진은 비어있었다. 빈 사진을 눌러 상호의 프로필을 띄우자 1:1채팅이나 보이스톡 버튼 대신 친구 추가 버튼이 나타났다. 그 친구 추가 버튼에 병찬은 웃는 것도, 불안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동문 출신인 준수와 상호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어 보인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기묘하게도 병찬에게는 만족감이 드는 부분이었다.
"바꾼 건지는 저도 모르겠는데요. 번호 저장을 했던가."
"...상호 얼리 신청한대?"
"그런 것 같은데요."
"그래?“
초조하게 떨던 병찬의 다리가 드디어 움직임을 멈추었다. 대답을 들은 병찬은 웃고 있었다. 준향대 코트 위에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패스를 종용할 때와 꼭 같은 그 짓궂은 표정이었다.
그는 결국 패스를 받아낼 것이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의 병찬은 절대 골을 놓친 적이 없었다.
7.
상호는 당근! 당근! 울리는 시끄러운 알람을 드디어 진동으로 바꾸었다. 거래 물품을 '예약중'으로 변경했는데도 알림이 계속 울린 탓이었다. 쿨거래를 약속했던 110만원은...
친구가 없는 것이 분명했다.
상호는 주고받은 메시지를 쭉 읽었다. 뜨문뜨문한 상호의 답장에도 굴하지 않고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농구 좋아하나 봐요.
네. 근데 이건 안 신었어요 새거예요
새건데 왜 팔아요?
선물하려고 산 거라 사이즈가 안 맞아가..
선물? 애인한테요?
여친 없어요..ㅜㅜ 아는 형한테요.
ㅎㅎ농구는 하는 쪽? 보는 쪽?
둘 다요.
포지션이 뭐예요?나는 가드. 주로 1번 봐요.
되게 끈질기네. 귀찮게시리...
그는 택배 거래를 단칼에 거절했다. 맞제. 110만원이 누구 애 이름도 아니고. 먹튀할 가능성도 있고. 자칫했다간 110만원짜리 빈 박스나 벽돌을 받을 가능성도 있으니 직거래를 고집하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거래 약속을 잡기에 둘의 시간이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맞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상호가 되는 날에는 그가 일이 있었고, 그가 약속을 희망하는 날에는 상호에게 일이 있었다. 결국 거래 일자는 두 주 뒤의 주말로 잡혔다.
그는 흔쾌히 서교대학교입구역 6번출구까지 와서 거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대충 찍어 올린 농구화 사진 속 침대에 대충 널브러진 과잠을 보고 상호가 서교대 학생인 것을 알았다고 했다. 공부 열심히 하셨나 봐요. 멋쩍은 칭찬까지. 상황은 사회성 있는 분위기로 진척되었다.
문제는 거래 날짜와 약속을 잡았는데도 메시지가 끊임없이 온다는 점에 있었다. 적당히 반응한 후 읽씹하고 싶은데 혹시라도 연락이 끊기면 날아갈 110만원을 생각하니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상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얼리 엔트리 신청을 확인하고, 자취방 계약을 조율하고, 시험도 준비해야 하고, 틈틈이 농구 연습도 하고, 당근 앱을 들여다보며 답장까지 보내야 했다.
이번 메시지야말로 진짜 적당히 대답할 말이 없어 망설이는데, 다시 답장이 왔다.
맞춰볼게요. 가드?ㅎㅎ
걍... 취미여서요.
가드나 뭐 그카는 포지션은 딱히...
당연히 가드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박병찬 운동화잖아요
박병찬 선수 팬이세요?
ㅋㅋㅋㅋ그렇다고 볼 수 있죠
박병찬 좋아하세요?
답장을 보내려던 손이 멈칫했다.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상호의 올바른 대답은 분명 과거형이어야 했다. 도무지 답장을 쓰려는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 대답이 뭐라고? 그냥 네, 한 마디 보내면 되는데 도무지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박병찬이 뭐고? 병찬햄이 니 친구가. 괜히 거래자에게 투덜거렸다.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했다. 유튜브 자동재생으로 펭귄스 관련 영상이 뜨면 병찬이 나올까봐 핸드폰을 놓지 못하던 모습과 뭐가 다른가 싶었다.
8.
비가 올 것처럼 날이 꾸물꾸물했다. 계단을 올라가 우산을 챙기고 오면 분명히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할 것이다. 어둑한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다가 그대로 발걸음을 올려 역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농구화 박스를 담을 만한 쇼핑백은 그때 잃어버렸다 찾은 그 쇼핑백 뿐이었다. 먼지를 툭툭 털어내자 모서리가 좀 닳은 것을 제외하면 그럴듯했다.
그럼 내일 봐요.
당근 앱의 메시지는 어제 처음으로 끊겼다.
상호가 굳이 답장하지 않아도, 관심 없는 이야기나 질문을 미주알고주알 남기던 평소와는 달랐다.
그는 서교대학교의 농구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상호는 굳이 자신이 농구부 소속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 역시 상호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누군가와 농구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신나 있는 것 같았다. 조선제과 티렉스 간판 선수인 조형석의 FA에 대한 예상부터 시작해서 픽앤롤 전술에서 빅맨의 역할을 다른 포지션이 대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거친 그는 서교대의 기상호가 1라운드 내로 지명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후하게 평가했으며 기왕이면 펭귄스 소속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발언했다. 그 말을 들은 상호는 그에 대한 쥐똥만한 호감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만나믄... 사인이라도 해 줘야 하나. 내는 사인 같은 거 없는데.
상호의 자취방은 역 보다는 서교대에 더 가까웠다. 서교대학교입구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역에서 언덕 하나를 넘어가야 대학교 정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6번출구는 지하 보도를 따라 쭉 걸어간 끝에 나온다.
"키 봤어?"
"얼굴도 대박. 인스타 물어볼 걸 그랬나? 누구 기다리는 것 같은데."
"연예인 아냐?“
상호의 반대편에서 코너를 돌아 불쑥 튀어나온 여자 둘의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둘은 핸드폰을 쥐고 망설이다가 상호와 눈이 마주치고는 민망한 듯이 목소리를 낮췄다. 대박. 별 의미 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누구 왔나 보네... 복잡한 출구의 모습에 한숨부터 나왔다.
상호는 사람이 많은 곳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도착하셨나요?
검은 티셔츠에 파란 쇼핑백 들고 있어요.
메시지를 확인한 것이 보이는데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약속 시간까지는 고작 몇 분이 남았을 뿐이었다. 손목을 걷어 시계를 확인하는 상호의 어깨를 누가 가볍게 두드렸다. 저기, 하는 목소리에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뒤돌아본 곳에는 병찬이 씨익 웃고 있었다. 농구화가 든 쇼핑백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지독한 마법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만났네, 상호야."
"...햄?"
"그 신발, 진짜 팔 거야?“
그의 푹 눌러쓴 모자 밑으로 까만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병찬과는 시선을 내리거나 높이지 않아도 눈높이가 맞았다. 당황한 상호의 머릿속에서 퍼즐처럼 조각이 맞추어져 갔다. 농구를 좋아하고, 포지션은 가드. 단종된 농구화를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흔쾌히 구매할 수 있는 사람. 서교대의 기상호가 펭귄스에 지명되길 바라고, 고교 때부터 상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남자. 미숫가루 라떼를 좋아하고 2주 내내 거래 시간 한 번 빼기 힘든, 상호가 좋아하는 남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한테 선물로 주려던 거 아니었어?"
"저라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농구화 사진에 보인 과잠 소매에 네 이니셜이 있더라. 그거 보고 설마 했는데, 나머지는 너랑 연락하면서 알았어.“
상호가 떨어트린 쇼핑백을 뒤늦게 주워 든 병찬이 어깨를 으쓱했다. 허리를 굽히는 그를 보고도 상호는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와 말 안 했어요...?"
"그게...“
머쓱한 표정의 병찬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음... 운동화 앞코를 바닥에 콕콕 찍으며 망설이는 병찬의 모습이 낯설었다. 대답할 말을 고민하는 모습은 병찬과 맞지 않았다. 그는 늘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뱉어내곤 했다.
"롤링페이퍼. 너더라, 상호야.“
곤란한 웃음을 짓는 병찬의 모습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심장에서부터 싸한 한기가 피를 타고 내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가장 작고 초라한 공간에 꾹꾹 눌러담은 마음은 전달하려는 생각으로 적은 것이 아니었다.
"햄, 그건."
"늦어서 미안해. 아직 나한테 대답할 기회가 있을까?“
쇼핑백을 쥔 병찬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9.
첫사랑이라는 단어는 병찬에게 어느 비 내리던 가을의 6번 출구를 떠올리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