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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도 그러겠다
@onedogsing
배수의 진
박병찬은 의외로 연애 경험이 없다.
여기서 ‘의외로’ 같은 말을 자발적으로 쓸 수 있단 점이 듣는 사람에 따라 자의식 과잉으로 느껴질 수 있겠으나, 박병찬이라는 인물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져 본 사람이라면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첫째, 일단 잘생겼다. 쌍꺼풀이 없다 보니 취향에 따라 좀 수수하다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눈에 띄는 단점 없이 깔끔하게 잘생긴 건 객관적인 사실이다.
둘째, 성격이 좋다. 어지간히 빡센 날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그는 생판 남에게 웃음으로 인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적당한 여유만 주어진다면 가벼운 유머로 분위기를 풀어 주는 재주가 있었다.
셋째, ‘농구’라는 눈에 띄는 특기가 있다. 이건 생각보다 ‘매력적인 사람’으로서 어필하기 좋은 요소이므로, 위의 두 장점과 좋은 시너지를 내서 박병찬을 ‘인기 있는 남자’로 만들어 줬다.
다시 말해 박병찬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다. 고백을 받은 적도 그럭저럭 있었다. 다만 농구를 하는 동안에는 농구를 하느라, 농구를 그만둔 동안은 또 농구로부터 시선을 돌리느라 바빠 어째서인지 연애에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박병찬은 두 번의 유급 후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도 연애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느냐.
그런 박병찬에게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 * *
박병찬이 좋아하게 된 상대, 기상호는 좀 독특한 사람이었다.
일단 네 살 연하인 줄 알았더니 다섯 살 연하였다. ‘빠른’이라는 대한민국의 꽤 쓸모없는 관습이 아직 남아 있던 탓이다. 원래 사람이 나이 앞자리 바뀔 때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라지만, 맨 앞에 붙은 2가 이런 식으로 서러워질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일단 같이 농구를 하긴 하는데, 만나기가 꽤 까다로웠다. 일단 인천과 부산으로 지역이 다르니 전국 단위 대회에 나가야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한국 고등학교 농구라는 게 다 아는 얼굴끼리 하는 게임이니 그렇게까지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병찬이 속한 조형이나 그가 속한 지상이나 기복이 좀 있는 편이라 언제 어떻게 붙고 떨어질지 모르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그 정도야 뭐.
대신 상대가 플레이하는 모습을 좀 구경하고 싶어도 출전 조건이 걸림돌이었다. 이렇다 할 기준이 명시된 건 아니었지만, 상호는 흔히들 말하는 ‘식스맨’에 가까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기상호를 코트로 끌어내려면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 세팅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 팀에 경기를 장악하는 수준의 에이스가 있어야 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박병찬이 조금 유리하기는 했다. 그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초고교급 실력의 선수였으니까. 병찬이 일단 공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 그를 끌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이스가, 즉 박병찬이 활개 치면 당연하다는 듯 기상호가 코트로 나왔다.
하지만 동시에 그게 문제였다.
코트 위는 썸을 타기에 적절하지 않다.
당연하지……. 대학이 달려 있는데…….
선수 대 선수로 마주하고 있을 때 플레이고 뭐고, 느긋하게 감상할 겨를이 남을 리가. 당장 저놈이 내 슛 틀어막는 데 안 빡치고 평정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일명 ‘에이스 스토퍼’ 역할을 수행하는 기상호는, 솔직히 ‘에이스’ 박병찬에게 있어 코트에서 만나면 꽤 짜증 나는 선수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사람 성질 긁는 요령까지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
그 외에도 무슨 맥락에서 나오는 건지 모를 개드립을 친다거나, 때때로 이상한 컨셉 질인지 흉내인지를 한다든가, 아무튼 특이한 점을 꼽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었다. 가끔 병찬은 기상호의 이런 점들이 좋아해서 꽂힌 자기 눈에만 보이는 건지, 아니면 남들도 보이는데 그냥 넘어가 주는 건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다 보니 딱히 수작을 걸 여지가 없었다. 연락처를 교환해 봤자 서로 할 일이 많으니 따로 볼 시간을 내지도 못하고. 나이 앞자리가 2든 1이든, 고등학생에 운동부이기까지 한 이상 사람 하나 만나자고 부산까지 내려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도 했다. 원거리 연애조차 한 적이 없는데 원거리 썸이라고 타는 요령을 알 리가. 그렇게 박병찬의 첫사랑인지 뭔지 모를 풋풋한 감정은 그대로 잊히는 듯했다.
* * *
그러나 두 사람의 고등학교 농구가 딱 겹쳤던 해가 끝나고 2년 후, 그러니까 기상호가 대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그것도 병찬이 이미 다니고 있던 대학에서. 상호가 신입생으로 들어온 것이다.
다만 반응이 좀 미적지근했다. 이건 반가워하는 건지, 껄끄러워하는 건지……. 분명 고등학생 시절엔 남의 학교 사람치고 괜찮은 관계였지 않나? 대화할 때 꽤 살갑게 굴었던 것 같은데, 아니, 그걸 넘어서 분명 나를 잘 따르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설마 기분 탓이었나? 기억이 왜곡됐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걱정이 무색하게 바로 다음 날부터 박병찬이 아는 기상호로 돌아오기는 했다. 어디서 병찬이 보이면 쫄래쫄래 따라와서는 말을 붙여 왔으니까. 그 모습을 보며 강아지를 떠올린 병찬은, 절대 작지 않은 자신과 어깨높이가 거의 같은 성인(엄밀히 따지자면 아니지만, 아무튼) 남성을 귀엽다고 느꼈다는 사실에 살짝 어지러워졌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어디 인터넷에서 주워 들었다는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것도 재미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무슨 교수가 그랬대요. 긍정하는 단어랑 부정하는 단어가 만나도 부정하는 말이 되고, 부정하는 단어랑 부정하는 단어가 만나면 긍정하는 말이 되는데 긍정하는 단어랑 긍정하는 단어가 만나도 부정하는 말은 안 된다고.”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그거 듣던 학생이 딱 한 마디 했죠.”
“뭐라고 했는데?”
“잘도 그러겠다.”
이때는 정말로 무심코 웃음이 터져서 자존심이 상했다.
실상 처음 연이 닿았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못 보는 날이 더 많았다. 병찬이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아예 교류가 끊기다시피 했다. 그러던 애가 매일 보이니 솔직히 좀, 많이 곤란했다. 그때 자연히 소진된 줄 알았던 감정이 슬금슬금 다시 피어올랐으니까.
그냥 근처에 있으면 괜히 시선이 가고, 같이 있으면 이유도 없이 좋고, 내일 만날 게 기대되는데, 그 속에 또 친구나 선후배 관계랑은 조금 다른 어떤 간질거림을 닮은 두근거림이 있는. 보통 이런 걸 연애 감정이라 그러지 않나? 심지어 자기보다 남이랑 더 친해 보이면 이유도 없이 순간적으로 울컥한다거나, 누구랑 연애하더라는 소식을 듣게 되면 억울할 것 같다거나 하는 부분도 남들이 말하는 연애 딱 그대로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병찬은 결국 마음을 굳혔다.
안 되겠다. 꼬시자.
안 보일 때도 자꾸 생각났는데 매일 보이니까 죽을 지경이다. 생각이 이리 튀고 저리 튀는 게, 그냥 내 거라고 도장 찍어서 옆에 묶어 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박병찬은 생각보다 결심하기까지 꽤 많은 걸 재 보는 타입이었고, 그렇기에 더욱 한번 정하면 빠꾸 없이 올인했다. 연애라고 못 그럴 이유 있겠어?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병찬의 기상호 꼬시기 챌린지는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병찬이 재능이 없어서라기보단, 상호가 더럽게 협조를 안 해 줬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이 정도면 허공에 대고 혼자 손만 휘적거리는 수준이었다.
퍼스널 스페이스를 훅 좁혀도 처음에만 좀 놀라는 눈치지, 순식간에 적응해서 큰 의미가 없었다. 스킨십 시도도 마찬가지였다. 엥? 정도의 당황은 해도 그 이상이 없다. 말로 수작을 걸라치면 헛소리로 흐지부지 웃어넘기거나 눈치도 못 챈 건지 태연하게 다른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었다.
원래 연애가 다 이렇게 힘든 건가? 아니면 내가 진짜 모쏠이라 요령이 없는 건가? 원래 썸이란 게 이런 걸로 좀 밑밥 까는 단계를 말하는 거 아니었나? 이거 밑밥 제대로 깔리고 있는 건 맞아? 하나도 안 먹히는 것 같은데?
진한 현타와 함께 탈력감이 쏟아졌다.
“상호야, 형아 힘들다…….”
“뭐야, 누가 병찬 햄 괴롭혀요?”
……이런 건 또 잘 받아 주면서.
“배고파서 힘들다.”
“햄 가끔 진짜 애 같은 소리 하시는 거 알아요?”
“엉. 그러니까 밥 먹으러 가자.”
가벼운 농담 따먹기 후엔 자연히 뭘 먹을지 정하는 순서가 됐다. 이젠 단둘이 밥을 먹으러 가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됐는데……. 보통 이 정도면 그린 라이트다 뭐다 하지 않나? 아닌가? 상호의 반응을 모르겠으니 무엇 하나 감 잡히는 게 없었다.
“어, 상호 햄!”
그때 낯선 목소리와 낯선 호칭이 들려왔다.
상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기에, 병찬도 같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어디서 본 것도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 세 명이 있었다. 학생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상호의 입에서 간만에 부산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니들이 와 여기 있는데?”
“저희 오늘 대학 구경하는 날이에요. 승차이네는 다른 학교 갔고요.”
“맞나……. 요즘은 학교에서 그런 걸 다 하나?”
“햄 때는 안 했어요?”
“우리는 마, 경기 하고 원서 쓰고…….”
대화가 조금 길어질 것 같았다. 대충 고등학교 후배들인 듯싶은데, 자신이 자리를 비켜 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에 한 아이가 병찬을 보고는 어! 하는 소리를 냈다.
“박병찬 선수!”
“오, 나 알아?”
“당연하죠! 상호 햄이 내는 병찬 햄 있는 데로 갈 기다, 그렇게 노래를 불러서…….”
“니는 와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난리가?!”
……뭐라고?
* * *
황급히 후배들의 입을 막은 상호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를 떴다. 물론 박병찬도 빠른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상호야.”
“…….”
“상호 나 따라 대학 왔어? 이야, 이런 걸 말도 안 해 주고. 형 아주 섭섭해.”
“아니, 이게 말할 타이밍이 없어 가지고…….”
“없기는 왜 없어, 요새 우리 맨날 얼굴 보는데.”
“병찬 햄이 자꾸 꼬시는 거 같으니까 정신이 없어서…….”
거기서 병찬은 우뚝 멈춰 섰다.
뭐야?
“……너 알고 있었어?”
“네?”
“내가 수작 중인 거.”
“……네?”
상호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뒤집혔다. 명백히 당황했다는 신호였다.
“방금 그랬잖아, 내가 꼬신다고.”
“아, 아니, 이게…… 그런 것 같단 착각을 했다고 해야 하나, 그…….”
어째서인지 덩달아 멈춰 선 상호는 당황한 듯 눈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렸다. 그 얼굴을 보는 동안 병찬의 속은 아래로 꺼졌다가 위로 튀기를 반복했다. 눈치는 챈 거네? 그럼 왜 그런 반응이었지? 이거 가망 없단 걸 돌려 말하는 건가? 그렇다기엔 표정이…….
뭔가, ‘싫은’ 것보단 ‘부끄러운’ 걸 들킨 느낌인데.
“3년 넘게 좋아한 사람이 날 꼬시는 거 같으면 그게 보통 착각이지 진짜일 리가…….”
횡설수설하던 기상호의 말이 뚝 끊겼다.
“…….”
“…….”
“……상호야.”
“그, 아니, 제 말은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아니, 야, 너 방금…….”
“무슨 소릴 들으셨든 일단 잘못 들으신 거고, 아니, 저는 아무 소리도 안 했고…….”
말꼬리를 흐리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상호가 순간, 몸을 홱 돌려 다짜고짜 전력 질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당연히 박병찬도 냅다 달려서 따라갔다. 지금 이걸 놓치면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는 거지.
“야, 기상호!!”
“저 지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거 모르시겠어요?!”
“내가 알 바냐 지금?!”
“아 쫌! 잠깐만 그냥 둬 주세요!!”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폭탄 던져 놓고 홀랑 튀겠다고? 이 상황에서 안 쫓아가고 가만히 있으라고?
“잘도 그러겠다!”
* * *
기상호는 세상이 뒤집어진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무심하게 툭 던지듯 건네진 말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리고 너, 그렇게 재능 없지도 않아.
사실 그 뒤의 대화는 기억이 모호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어째서인지 머리로 피가 확 쏠리는 느낌이 들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머리가 이름도 모를 무언가의 회로를 팽팽 돌리기 시작했다. 절정을 찍은 건 마지막 인사를 들었을 때였다.
─또 보자.
그 순간, 기상호의 귀에는 들릴 리 없는 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다. 이름 모를 회로가 펑 하고 터졌다. 심장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리고 또 바로 다음 순간 회로는 다시 살아나 전보다 더 맹렬한 속도로 돌아갔고, 심장은 말도 안 되는 강도로 두근거렸다. 상호는 방금 자신에게 들린 환청 같은 감각이 무엇인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첫사랑이 시작되는 소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