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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만 두 번째

@i_love_me__52
엥강

이겼다.

 

기상호가 뜨거운 숨을 내쉬며 코트 위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렇게나 바라고 또 바랬던 상황임에도 영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동안 이런 상상을 너무 많이 해 와서 그러나. 턱 밑까지 차오른 숨만 아니었다면 여전히 제가 꿈속을 유영하는 줄로만 알았을 거다. 기념사진을 찍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다독임과 칭찬 어린 축하를 받으면서도…… 기상호는 여전히 머리 한구석의 나사가 빠진 것마냥 얼빠진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저번처럼 또 인터넷에 이상한 사진이 걸리면 어떡하지. 이전의 후회 어린 다짐을 떠올리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돌아가는 길에 올라탄 밴은 여전히 비좁게만 느껴졌다. 본래라면 경기를 보러 서울까지 올라온 가족들과 함께 집에 돌아갔을지도 모르지만, 본가가 서울에 있는 터라 어른들과 홀로 귀가하게 될 성준수를 생각해 이전처럼 함께 차를 타고 복귀하기로 했다. 평소였다면 그게 무슨 낯간지러운 소리냐며 질색했을 테지만, 어쨌거나 오늘은 불가능할 줄로만 알았던 꿈이 이루어진 날. 승리가 만들어낸 단합에 반발할 만큼 감수성이 메마른 이는 없었다.

덩치 큰 남자애 여섯에 어른 둘. 돌아가는 길은 멀고 좁은 내부는 몸을 웅크리다시피 우겨넣어야 한다. 타 학교들과 비교되는 이 조그마한 차를 남몰래 욕한 적만 수백 번인데.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그게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 안에 세상이 전부 담긴 것만 같았다. 부원은 여전히 여섯이고 아직 갈 길은 먼데도.

 

잔잔히 파도치듯 몰려오는 우승의 여운은 영 떨쳐내기 쉬운 것이 아니다. 기상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번쩍거리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가족, 친구, 기타 등등. 몇 안 되는 연락처 속에선 하나같이 축하한다는 인사들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기상호는 채팅창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멀거니 화면 위를 배회했다.

그러다 때마침 새로운 메시지가 채팅창 목록 가장 위로 나타났다.

 

[너 재능 있다고 했잖아]

 

짤막하게 보내온 문자는 금방 다른 연락들에 묻혀 아래로 휩쓸려갔다. 기상호는 순간적으로 발견한 문자를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재능. 그래, 재능. 나만 빼고 전부 가지고 있는 것만 같은…… 세상의 불공평함을 두 음절로 설명 가능한 단어. 평생 못 넘을 줄로만 알았던, 그래서 목표 지점을 코앞에 두고 돌아서야만 할 줄 알았던 거대한 벽.

고작 그 한 줄짜리 문장이 뭐가 그리도 마음에 와닿았는지. 울분인지 쾌감인지 모를 감정이 문득 목구멍 위로 울컥 치솟았다. 그동안 연락을 많이 한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런가. 무심한 듯 던진 말이 차오른 둑을 무너트리듯 커다란 파문을 남기고 떠나간다. 기상호는 어느새 일렁거리는 눈가를 문지르며 무심코 코를 훌쩍, 들이켰다.

 

“상호……니 지금 우나?”

“아, 아닌데.”

“야가 지금 눈물 줄줄 흘리면서 무슨 소리를 하노.”

 

감독님! 상호 우는데요! 뭐? 임마는 아까 남들 울 때는 얌전하더니 갑자기 와 이러는데? 시끄럽게 오가는 한바탕 난리 속에서 기상호가 조용히 제 뺨을 문질렀다. 아니,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 그동안의 서러움을 쏟아내듯 흘러나오는 눈물에 다들 당황하는 것도 잠시. 감정은 전염된다고 했던가, 곧이어 바톤을 이어받듯 울먹울먹하던 정희찬이 기어이 눈물을 터트렸다.

 

“니……니 와 자꾸 우는데…….”

“지는…….”

 

예전이었다면 얼어붙은 분위기에 눈물은 무슨. 숨 한번 쉬는 것도 눈치를 보며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돌아갔을 테지만, 오늘만은 다르다.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쏟는 막내들의 모습에 이현성이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을 훅 내뱉으며 중얼댔다. 그래. 울어라, 울어…… 지금 아니면 너거들이 또 언제 울겠나……

 

*

 

귀갓길에 벌어진 소동은 숙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잦아들었다. 종일 경기를 뛰어다니던 부원들도 목이 터지라 응원하던 정희찬도 언제 그랬냐는 듯 이불 위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빠르게 불이 꺼지고 다들 기절하듯 잠이 든 것도 잠시. 울음을 터트린 여파일까, 부원들 사이에 낀 기상호가 홀로 멀뚱멀뚱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다 가만히 핸드폰을 집어 숙소 밖을 나섰다. 화면 밝기를 아무리 낮게 해도 이따금 잠에서 깬 형들이 한소리를 하곤 했으니까. 오늘만큼은 다들 꿈도 안 꾸고 잘 것 같지만, 만약 들켜도 너그럽게 넘어가 줄 거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 역시 오늘 같은 날에 혼나고 싶지는 않다. 기상호가 머쓱하니 목덜미를 문지르며 빨갛게 뜬 메시지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문자를 보내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요즘 애들답게 확인이 빠른 친구들에게 기계적인 답장을 보내는 것도 잠시. 머뭇거리던 기상호의 손가락이 어느덧 문제의 ‘그’ 메시지 위를 방황했다.

 

어쩐지 두근거리는 심장에 눈을 질끈 감고 화면을 딱 터치하니, 제가 기억하는 것과는 퍽 다른 문자들이 채팅창 속에 떠올라 있었다.

 

[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

[??]

 

뭐…… 기상호가 화들짝 놀라 눈을 비비며 채팅창을 재확인했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까…… 실수로 뭘 잘못 눌렀나 본데. 아니 근데 왜 하필! 많고도 많은 모음 중에 하필이면! 저게 보내진 거지? 기상호가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물음표 두 개를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빨리 해명해야 해. 이 시간에 연락을 하면 실례라는 사실을 떠올린 건 이미 문자를 여럿 보내고 난 후였다.

 

[아니햄]

[아니]

[이거진짜실수에요]

[아까핸드폰넣다가잘못눌ㄹ서]

[ㅠㅠㅠ제 진심이 아닌 거 아시죠?]

 

다급히 보낸 문자의 1 표시가 사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헉, 읽었다. 기상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설마 날 축하 문자에 욕을 하는 나쁜 놈으로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 이유 모를 초조함에 손바닥에서 땀이 슬며시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기상호는 손가락으로 핸드폰 모서리를 툭툭 두드리며 얌전히 돌아올 답변을 기다렸다.

몇 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답문에 설마 이 햄이 진짜로 마음이 상하기라도 했나 싶었을 때 즈음.

 

[조형고 박병찬 형]

 

불현듯 익숙한 번호가 화면 위로 나타났다. 헉. 기상호가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키며 상전을 모시듯 두 손으로 공손히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혹시 끊어지기라도 할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빠르게 받아 챈 전화 너머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제 우승했으니 형아는 필요 없다 이거야?]

“아, 아니 햄! 제가 진짜 잘못 보낸 거라 했잖아요!”

[이게 건방지게 벌써 헛물이 들었네.]

“아니! 진짜 실수라니까!”

[응? 아예 말도 놓으려고?]

 

그으…… 그게 아니라니깐요…… 기상호가 말을 길게 늘이며 빠르게 덧붙였다. 진짜 정말로 엄청 죄송하다고요. 알겠어요, 기상호 씨. 감히 우승자에게 함부로 말 걸면 안 됐었는데. ……자꾸 그럴 거면 저 그냥 전화 끊을게요. 토라지듯 내뱉은 말에 그제야 박병찬이 알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기상호를 달랬다. 미안. 난 또 우승해서 나 같은 패자랑은 말도 섞기 싫은 줄 알았지.

 

“…….”

 

달래는 게 아니었다. 기상호가 짜게 식은 표정으로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뒤로 걸려온 전화를 세 번이나 끊고 나서야 박병찬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사과를 건네왔다. 미안. 네 반응이 귀엽길래. ……저 귀여워요? 기상호가 불현듯 머릿속으로 떠오른 질문을 애써 집어삼켰다. 왠지 입술이 버석하게 말라오는 것만 같았다.

 

[어쩌다가 잘못 누른 건데? 혹시 그동안 담아두었던 마음의 소리가 나온 건…….]

“아니! 그게 아니라!”

 

기상호가 발끈하다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냥…… 조금 울었는데…… 그러다가 뭘 잘못 건드렸나 봐요.

 

[…….]

 

그 나이 먹고 울다니 아직 애기네. 혹은 정말 실수한 것 맞지? 하며 장난스럽게 말을 이을 줄 알았던 박병찬은 의외로 대답 없이 잠잠했다. 햄? 짧은 되물음에 이어진 목소리는 전과 달리 웃음기 없이 차분하고 담담했다.

 

[왜 울었는데?]

“……그러게요.”

 

기상호가 중얼거리듯 답하며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새벽……까지는 아니어도, 느지막이 저문 해에 괜한 감성이 돋아난 탓인지. 아까의 여운을 채 벗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이제껏 담아둔 속마음이 닫히지 않고 줄줄 새어 나온 탓인지. 평소보다 유난히 솔직해진 기상호를 부추기듯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잠하기만 했다.

그러다 끝내 흘러나온 속마음은 이전과는 달리 조금 음울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저 사실 이번 대회만 끝나면 농구 관두려고 했어요.”

[…….]

“사실 부원 수만 더 많았어도 진작에 관뒀을 거예요. 어차피 저는 팀에 도움이 안 되니까, 아니.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하.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그것도 다른 학교 선배한테…… 주절거리는 말들 속에서 기상호가 가만히 생각했다. 어차피 이 햄은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도 없을 텐데. 처음부터 재능이 주어진, 제힘으로 반짝거리는 태양이 한낱 반딧불이의 기분을 알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이미 터진 말은 멈출 줄을 모르고 흘러갔다.

 

“저 진짜 농구 좋아하거든요. 정말, 정말로 좋아하는데……이제껏 이만큼 좋아해 본 게 없는데……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과장 없이 정말 농구가 제 첫사랑이거든요?”

 

근데 여태껏 짝사랑만 해온 기분이었어요. 나는 걔를 좋아하는데, 걔는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아가……

그래도 포기를 못 해서. 미련이 남아서 계속 붙들고 있었는데. 어쩐지…… 지금만큼은 이게 짝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울었나 봐요. 그게 너무 좋아서.”

[그렇구나.]

 

덤덤하게 동조하는 목소리를 끝으로, 조금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기상호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으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사춘기도 아니고 이게 뭐야. 생각해서 전화해줬더니 대뜸 한탄이나 하고. ……햄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뒤늦게 든 불안감에 변명하는 것도 덤이었다. 하하, 저도 모르게 새벽 감성이 돋아서…… 쪼, 쪼매 부끄럽네요. 별거 아니니까 방금 한 말은 그냥 잊어주시면……

 

[나도 그랬어.]

“네?”

[나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어.]

“네에?!”

 

반사적으로 커진 목소리에 박병찬이 낮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그, 그치만 햄은……! 농구 천재잖아요! ……그렇게 봐줘서 고맙네. 그리 덧붙이며 덤덤하게 흘러나오는 박병찬의 이야기는, 홀로 주절거린 기상호의 민망함을 덜어준다는 듯 간질간질한 배려가 스며들어있는 것만 같다.

 

[네가 또 보자고 했잖아.]

“저, 저요?”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고…… 아니,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고 있지. 기상호가 괜스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이 햄은 왜 하필 목소리도 좋아서는……

 

[후배가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형이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지.]

 

안 그래? 박병찬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햄은 이미 충분히 멋진데요…… 기상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차게 식은 숙소 앞 계단 위. 깜빡거리는 전등 아래. 손바닥만 한 전화기를 붙든 채 처량하게 쪼그려 앉은 제 모습이 건너편 유리창에 생생하게 비친다. 창 너머 한눈에 알아볼 만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까부터 울렁거리던 심장은 이미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두근거리는 채였다.

 

경기를 코앞에 둔 것과 같은 기분에, 기상호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양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이런…… 아무래도 자신은 짝사랑이 천직인가. 마음속으로 남모를 욕설을 덧붙인 건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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