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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삼세판
@fxrsxrl
서리
안 내면 진다, 가위바위보!
이 결과에 바로 승복하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보통 진 사람이 '아, 삼세판이잖아!'를 외치고, 그런 게 어디 있냐며 따지던 이긴 사람도 이내 수긍하고 손가락을 펴 한 번 이겼다는 뜻으로 검지 하나를 세우곤 하니까. 가위바위보만 삼세판인가. 재판도 3심을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 발사체인 누리호도 3번째 시도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첫사랑도 삼세판인가요?
1.
병찬 형을 처음 만난 건 고1 때 출전한 협회장기에서였다. 우리의 마지막 공격. 스크리너 둘을 뚫고 나온 형은 곧장 스틸에 성공했다. 바로 따라붙었다 생각했는데 어느 새 기우뚱 쓰러지는 내 몸. 환상적인 크로스오버 이후 골대 위로 올려진 공은 그대로 림을 통과했다. 바닥에 넘어진 채 상대방의 역전 위닝샷을 보는 건 정말, 정말로 기분 더러웠다. 첫 공식대회 출전이었다. 처음으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의 패배로 끝이 났지만.
부상을 안고도 개쩌는 플레이를 보여 준 멋진 형. 타고난 실력도 장난 아니면서 노력까지 하는, 그걸로도 모자라 농구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대단한 형. 닮고 싶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이게 병찬 형에 대한 생각의 전부인 줄 알았다. 어느 날 다은 햄이 시답잖은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님들은 첫사랑 언제임?"
고된 훈련이 끝난 후 숙소에 쓰러져 잠들기도 바빴지만 이럴 때일수록 시답잖은 질문이 개꿀잼 콘텐츠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미 안녕히 주무십쇼 인사를 끝내고 눈까지 감았는데. 다시 눈을 뜨고 대화에 끼기가 머쓱해서 그대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 첫사랑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았다는 쪽에 더 가깝긴 했다. 아직까지 첫사랑도 안 해 봤냐며 이거 아직 애새끼구만 하고 놀려댈 게 뻔하기도 했고, 언제라고 꾸며내 봤자 내 얼굴 표정 읽기 달인인 햄들-절대 내가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티가 다 나는 타입이거나 뭐 그런 건 아니다-에게 금방 들통날 테니까. 그래서 눈을 뜨는 대신 자는 척 숨소리를 꾸며내며 귀에 온 감각을 집중시켰다.
니는 언젠데?
해 봤음. 초등학교 4학년 때.
미친. 초딩이 뭔 사랑을 안다고.
아, 레알임! 일주일이나 사귀었음.
그것도 사귄 거라고 치냐? 어이가 없다, 어이가.
나는 진심이었음. 그러는 님은 언제임?
나는 그, 작년에....
아, 표정 뭐임. 안 들어도 뻔함.
지가 먼저 물어 놓고 지랄이고.
재유 햄은 첫사랑 해 봤어요?
잘 모르겠는데....... 중2 때였던 것 같기도 하고.
오. 농구천재의 첫사랑. 준수햄은요?
.......
준수햄 자는갑다. 우리도 걍 자자.
왜 내한테는 안 물어보는데.
에이, 감독님은 뭐....... 아닙니다.
이 자식들이?
안녕히 주무십쇼!
점점 멀어지는 감독님과 햄들의 목소리. 두런두런 이어졌다 끊어지는 대화를 들으며 왜인지 마지막 레이업을 올리는 병찬 형이 떠올랐다.
"상호! 왜 이래 정신을 못 차리노!"
"죄송합니다."
"죄송하단 말 듣자는 게 아니고, 훈련 할 때 집중 안 하면 다치는 거 모르나."
"......."
"가서 세수 한 번 하고 정신 차리고 온나."
"넵."
체육관 문을 열고 나오니 해가 넘어가도 한참 전에 넘어갔는지 이미 깜깜해진 학교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듬성듬성 설치되어 있는 조명에 의지해 체육관 옆에 달려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을 받아 세수를 몇 번 하다가 아예 수도꼭지 아래로 머리를 집어 넣었다. 왜 이러지. 집중력이 떨어지는 날이 있긴 해도 이 정도로 멍청한 감자가 되는 일은 잘 없었는데. 처음엔 이런 날도 있는 거지 했다. 그런데 하루에서 끝나지 않고 이틀, 사흘, 그리고 일주일이 넘도록 정신을 못 차리는 내가 나 스스로도 답답했다.
왜 자꾸 훈련 중에 다른 생각이 날까.
왜 자꾸 훈련 중에 그 형 생각이 날까.
.
.
.
왜 자꾸 병찬 형 생각이 날까.
한참 물을 맞다가 수전 손잡이를 내려 물을 잠갔다.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진다. 일부러 차가운 물 쪽으로 바짝 돌려서 물을 틀었는데. 별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여전히 병찬 형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가슴에 열이 바짝 고이는 것 같다. 머리에만 물을 묻히는 게 아니라 아예 가슴팍에도 물을 끼얹을 걸 그랬나. 결국 아무 효과도 보지 못하고 다시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마, 상호! 물 떨어진다 아이가!"
"죄송합니다!! 금방 닦고 올게요."
최대한 벽에 바짝 붙어 수건을 집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대자 물방울이 여기저기로 튀어나갔다. 바닥에 튄 물방울이 조금씩 말라가는 걸 보며 체육관 문에 기대 주저앉았다. 아, 역시 아까 가슴팍까지 물을 퍼부어야 했는데.
쌍용기를 앞두고 조형고와의 합동 훈련이 열렸다. 잠에 들려고 노력했다가, 신경쓰면 더 잠이 안 온다는 말이 잠에 들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을 노력하다가, 잠에 빠진 햄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히 가져온 이어폰을 귀에 꽂아 asmr 이런 것들을 듣다가, 숙면에 도움 되는 음악도 듣다가....... 그대로 아침을 맞았다. 자지 않은 것을 들키면 또 잔소리 들을 것 같아서 햄들이 일어나는 시간에 나도 일어난 척, 되도 않는 연기를 해야 했다. 보통 그렇게까지 못 잤으면 차 안에서라도 잠이 와야 하는 거 아닌가? 부산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단한숨도 자지 못 했다. 정신이 멍한 채 잠을 못 자는 게 이렇게 괴로운 일인 줄 몰랐다.
"상호, 안 내리나?"
"어어, 내린다. 가자."
교문 앞에는 조형고 감독님이 마중나와 있었다. 안부를 물으며 앞서가는 감독님들의 뒤를 쫓아가는데 쿵, 쿵, 쿵. 귀에도 심장이 달렸나 싶을 정도로 심장 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끼익. 체육관 문이 열리고 워밍업 중인 조형고 선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쿵.
크게 뛰는 심장이 한순간에 내려앉았다. 그 어디에도 병찬 형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나는 마지막 레이업을 올리는 병찬 형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직후 병찬 형은 무릎을 부여잡고 쓰러져 있었는데. 부상이 심각한 건가. 농구를 못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손끝이 저려왔다.
"너거도 얼른 웜업 시작해라. 몸 가볍게 풀고 연습 게임 할 거니까."
"네!"
햄들을 따라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웜업은 몸을 데우기 위한 건데. 차가워진 손은 웜업이 끝날 때까지 아주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차갑게 굳어 버린 손은 경기에도 영향이 가기 마련이다. 준수 햄의 상태가 좋지 않아 교체 멤버로 연습 게임에 들어갔지만, 준수 햄보다 내 상태가 더 심각했다. 연습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턴오버를 몇 개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결국 연습 게임은 조형고가 승리했다. 코트를 정리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체육관 문을 계속 쳐다봤지만 끝끝내 병찬 형은 오지 않았다.
그냥 아무 형이나 붙잡고 물어볼걸 그랬나. 조형고 농구부 숙소는 방의 수가 제법 많아서 2명이서 한 방을 쓸 수 있었다. 좁은 방에서 여섯 명이 붙어 자다가 둘이서만 한 방을 쓰니 어찌나 편하던지. 하지만 몸이 편하다고 마음까지 편해지진 않았다. 일부러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몇 시간 째 깨어 있는 거지. 침대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앉았다가 다시 누웠다가. 이런 내 행태에 결국 같은 방을 배정 받은 희찬이가 먼저 폭발했다.
"상호! 정신 사납다!"
"아, 미안."
이불을 푹 덮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벌떡.
"쫌!"
"희차이, 내 체육관 좀 갔다 올게. 잠이 안 온다."
"하...... 적당히 하고 온나. 내일도 훈련 빡세다 하더라."
"어."
달칵. 체육관 불을 켜고 한참 동안 슛을 던졌다. 정말 지독하게 안 들어가네. 이대로면 쌍용기는 못 나갈 텐데....... 아, 농구 선수 같은 생각 오랜만이다. 이런 생각하면 또 다른 생각 하게 되는데.
"야, 너 뭐야?"
자꾸 생각하니까 헛걸 듣는 건가.
"누군데 남의 체육관에 들어와 있냐고."
"어. 병찬 형......?"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정말 병찬 형이 서 있었다. 내 회상 속에서, 상상 속에서, 그리고 꿈 속에서만 볼 수 있던 병찬 형이 아니라 진짜 병찬 형이. 한동안 병찬 형이 연습하는 걸 훔쳐 보며 연습하는 척을 했다. 이번에도 단 한 골도 들어가지 않았다.
머쓱하긴 했지만 기회다 싶기도 했다. 용기내서 병찬 형에게 슛을 봐 달라고 부탁했다. 에임이 구데기라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던 것 같다. 병찬 형에게 농구를 배우는 것도, 조언을 듣는 것도, 그리고 둘이서만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또 봐요.'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쥐어짜내서 건넨 인사에 돌아온 '그래, 또 보자.' 하는 말까지. 형과 나에게 다음이라는 게 있는 거구나. 쿵 내려앉은 후 조용해졌던 심장이 다시 쿵, 쿵, 쿵 뛰었다.
그 후 종종 병찬 형과 문자를 주고 받았다. 내용만 보면 식단 공유, 훈련 스케쥴 공유 비슷하긴 했지만 끊길 듯 하면서도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대화가 즐거웠다.
"니 여자친구 생겼나."
"아니거든요."
"근데 왜 실실 웃고 있노. 기분 나쁘게."
"와, 웃는 얼굴 보고 기분 나쁘다니. 햄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아닌데....... 딱 봐도 여자친구랑 문자 하는 얼굴인데. 진짜 아니가."
"아, 아니라니까요. 이거 봐요."
"조형고 박병찬형? 니 이 햄이랑 문자도 하나."
"전에 조형고 갔을 때 잠깐 봤는데 뭐 그래 됐어요."
"맞나."
태성이! 잠만 와 봐라! 나 흥미 떨어졌어요 하는 얼굴로 철푸덕 앉은 태성 햄이 감독님의 부름에 잽싸게 뛰쳐나갔다. 참나. 여자친구랑 얘기할 때만 재미있는 줄 아나. 그냥 형이랑 문자 해도 재미있거든.
그런데 다른 형이랑 문자 할 때도 이렇게 즐거웠던가?
"상호, 니도 오란다!"
태성 햄의 목소리가 생각을 끊고 들어왔다. 가요! 크게 소리를 지르고 몸을 일으키는데 문자 알림음이 들렸다.
[나 다음 주에 수술해.]
병찬 형이었다.
"휴식일이라고 너무 늘어지지 말고. 음식 적당히 먹고. 알았나. 다녀와서 인바디부터 잴 거니까 알아서 해라이."
"넵."
"상호 바로 집 가나? 오랜만에 피방 갈래?"
"아, 아니. 내 갈 데 있다."
"어디 가는데?"
"서울."
"서울은 와, 상호! 마!"
시계를 확인하니 기차 시간까지 아슬아슬할 것 같았다. 아, 중간에 준수 햄이랑 태성 햄 싸운 것만 아니었음 제 시간에 끝났는데. 초조한 마음으로 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부산역이요. 얼마나 걸려요? 부산 택시에서 함부로 꺼내면 안 된다는 말까지 꺼냈다. 내 말에 어떠한 의무감을 느끼신 건지 무지막지한 운전을 보여 준 기사님 덕분에 제 시간에 맞춰 부산역에 내릴 수 있었다. 기차에 올라타 병찬 형이 입원 해 있는 병원, 병실 호수를 다시 확인했다. 때마침 병찬 형의 문자가 왔다.
[진짜 올 거야?]
[네. 기차 탔어요.]
[혼자 올 수 있겠어?]
[제가 얼라도 아니고.... 이따 봐요.]
답장을 보내고 눈을 감았다.
서울역에 내린 후 인파에 이리저리 치이며 살짝 후회했다. 이거 어디로 나가야 하노....... 혼자서 다른 지역에 온 건 처음인데 하필 또 사람 많다는 서울이었다. 택시 타는 곳 표시를 따라 나갔다. 괜히 버스나 지하철 탄다고 까불다가 길 헤매느니 택시를 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제법 많이 나온 택시비에 손을 바들바들 떨며 카드를 내밀었다. 아, 용돈 얼마 안 남았는데. 내려갈 땐 무궁화호 타야겠다 생각하며 택시에서 내렸다.
216호 앞.
똑똑 노크를 하자 들어와 하는 병찬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닫이 문을 열자 침대에 앉아 있는 병찬 형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왔네."
씨익, 웃는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혔다.
"심심했는데 잘됐다. 이제 병문안 올 사람들은 다 다녀가서 부모님 말곤 아무도 안 오거든."
어떤 말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튀어나올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오는데 안 힘들었어?"
"KTX 타고, 택시 타고 이러니까 금방이던데요. 길도 안 헤매고."
마지막 말을 강조하자 병찬 형이 하하, 웃으며 내 머리에 손을 툭 올렸다.
"마중 못 나가서 걱정했는데, 잘 했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져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시선 끝에 걸린 깁스를 하고 있는 병찬 형의 다리.
"다리는 어때요?"
"아직 잘 모르겠어. 재활 잘 해 봐야지."
수술한다는 메시지를 받고 너무 놀라 전화를 걸었었다. 전화를 한 건 처음이어서 그런지 살짝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한 병찬 형은 '왜, 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 하는 내 목소리에 알았다는 듯 하하 웃었다. 약속된 실적을 쌓은데다 계속해서 뛰기엔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서 결국 수술을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계속, 농구 한다는 거죠?
응.
전화를 끊은 후 곧바로 KTX를 예매했었다. 협회장기 내내 병찬 형의 무릎을 약점 삼아 괴롭혔다는 것에 대해 뒤늦게 죄책감이 들어서였을까. 멀리까지 병문안을 가면 그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질지도 모른다 생각해서였나? 무슨 마음으로 그런 충동적인 행동을 했던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한참 동안 같이 핸드폰으로 게임도 하고, 태블릿에 다운 받아 온 만화도 보고, 근황 얘기도 좀 하다 보니 순식간에 밖이 어두워졌다. 아까 병원에 도착했을 땐 한낮이었는데.
"부산엔 언제 가?"
"어, 이제 슬슬 가야 해요."
"어? 오늘 바로?"
"네."
허....... 당황했는지 한숨 비슷한 숨소리를 뱉는 게 들렸다. 다른 학교 선배 병문안 때문에 당일치기로 부산에서 서울 왔다갔다 하는 게 좀, 이상한가. 그럴 수도 있겠다. 잠깐 정적이 맴돌고, 주섬주섬 태블릿을 가방에 넣었다.
"이제 가 볼게요. 기차 시간 늦을 것 같아서."
"어, 그래. 배웅 못 나가서 미안."
"괜찮아요, 햄. 저 갈게요."
"그래. 조심히 가고. 도착하면 문자 해."
미닫이 문을 닫고 병실을 나서는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사실은, 아까 병실에 들어갔을 때 웃는 병찬 형을 보고 좋아한다고 말할 뻔했다.
서울역에서 부산역으로 내려가는 무궁화호. 다섯 시간 반이 넘는 그 시간 동안 눈물이 계속 흘렀다. 사실 알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동경하는 걸 착각하는 거라고 수없이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나는, 병찬 형을 좋아한다.
은연 중에 병찬 형이라면 내 고백을 거절할 지언정 나를 싫어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냥 질러 버릴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고, 오늘 병찬 형을 봤을 때 나도 모르게 툭 고백해 버릴 뻔한 것도 사실이다. 병찬 형의 다리를 보지 않았더라면, 병실에 있는 병찬 형과 마지막 레이업을 올리는 병찬 형이 겹쳐 보이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고백했을지도 모르지.
병찬 형은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본인이 가장 빛날 수 있는 코트 위. 부상을 극복하고 형이 코트 위로 돌아가는 그 시간 동안 내가 끼어들어서는 안 돼.
내 첫사랑은 자각하자마자 접혀야만 했다.
[오늘 와 줘서 고마워. 담에 또 봐.]
부산에 도착한 후에도 병찬 형에게 답장을 보내지 못 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2.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전력 유출로 실적을 쌓지 못 하고, 실적을 쌓지 못 하니 전력이 유출 되거나 채워지지 않고. 무엇이 시작인지 모를 악순환에 빠져 있던 지상고는 6명만으로 쌍용기를 우승했다는 확실한 실적이 생긴 후 괜찮은 신입생들이 몇 입학했다. 그 후로는 8강 위까지는 꾸준히 진출했고. 더 괜찮은 신입생들이 들어오고. 선순환을 시작한 지상고는 내가 3학년이 되던 해, 협회장기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준향대학교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상호, 표정이 왜 그러노. 안 기쁘나?"
"어? 아, 어. 좋지. 좋다. 진짜라니까."
"왜. 내랑 다른 대학 가서 섭섭하나."
"아, 아니다. 아니라고!"
아닌 게 아인 것 같은데.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는 희찬이에게 가볍게 헤드락을 걸었다. 그래도 서울에 있는 대학 가야 안 되겠나! 하며 우주 상향으로 서교대를 쓴 희찬이는 예비 1번을 받았다. 마침 서교대에 가드가 급했던 터라 예비 앞 번호를 받은 희찬이는 무난하게 합격할 수 있었고. 나는 상향으로 주익대, 정배로 준향대를 넣었는데....... 주익은 예비 6번을, 준향은 최초합을 받았다. 어디든 가면 좋긴 하지만, 주익보다는 준향의 플레이 스타일이 나에게 더 맞긴 했지만 문제는,
[결과 나왔어?]
병찬 형도 준향대에 다니고 있다는 거였다.
[합격했어요.]
[잘됐다! 서울 오면 형이 맛있는 거 사 줄게.]
[넵.]
제발 주익대도 합격했으면.
준향대에 등록하긴 했지만 추가 합격 발표 마지막 날까지 주익대에서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 물론 상위권 대학 답게 주익대의 예비 번호는 단 한 명도 빠지지 않았고, 나는 꼼짝없이 준향대에 입학해야만 했다.
[6시까지 기숙사 앞으로 나와. 고기 사 줄게.]
기숙사에 짐을 풀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병찬 형에게서 문자가 왔다. 준향대 입학 기념으로 병찬 형과 준수 햄이 고기를 사 준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바로 불러낼 줄이야. 후배에게 무슨 힘이 있나. 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짐을 옮기고 푸느라 땀에 젖은 몸이 찝찝해 빠르게 샤워를 하고 6시에 맞춰 기숙사 앞으로 나갔다.
"형, 잘 지냈어요?"
"응. 오랜만이야. 뭐야. 상호 키 좀 큰 것 같네."
"2센치 정도 큰 것 같아요. 어, 근데 준수 햄은요?"
"아.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다고 본가 갔어."
그럼 나랑 병찬 형 둘이서만 밥 먹으러 가야 하는 건가. 그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굳어가는 내 표정을 눈치 챘는지 "형이랑 밥 먹는 거 싫어?" 하는 형의 질문에 아니라고 세차게 고개를 저어야 했다. 농담이라며 웃는 형을 따라 고기집이 있다는 쪽문으로 걸어내려갔다.
'형도 키가 큰 건가....... 전에 봤을 때랑은 느낌이 좀 다른데.'
두어 발짝 앞서 걷는 병찬 형을 보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훨씬 커 보였다. 쌍용기 때 만났을 때도 몸이 제법 컸던 것 같은데. 입원 해 있을 때 근육이 좀 빠졌던 건가.
"응?"
"네? 어, 어우. 죄송해요."
나도 모르게 병찬 형의 팔뚝을 쿡 찔러 버렸다. 고개를 살짝 틀어 뒤를 돌아보는 형의 눈을 피해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쿡. 이번에는 병찬 형이 내 팔뚝을 찔렀다.
"키만 큰 줄 알았는데 몸도 제법 키운 것 같네."
"웨이트 열심히 했거든요."
"그래도 형아한테는 안 될걸."
"금방 따라잡을 수 있어요."
"하하. 그래. 기대할게."
어색하면 어떡하지. 내가 헛소리를 하면 어떡하지.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저녁을 먹는 동안 제법 즐거웠다. 맛집이라며 자신만만해 하던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고기도 맛있었다. 이런 건 형이 해야 하는 거라며 집게와 가위를 들고 간 형이 소고기는 늦게 먹으면 질겨진다고 내 앞으로 부지런히 고기를 놔 줬다. 앞에 놓이는 족족 고기를 집어 먹다가 문득, 이거 얼마지 하는 생각과 함께 시선이 가격표에 꽂혔다. 이런 미친. 지금까지 몇 인분 먹었지?
"형이 사는 거니까 편하게 먹어."
"아니, 제가 반 낼게요."
"원래 선배가 후배 밥 사 주는 거야. 그냥 먹어도 돼."
"그래도,"
내 반발은 입 앞으로 들이밀어진 고기에 막혔다.
"소고기는 식으면 질겨진다니까."
형의 말에 얌전히 입을 열어 고기를 삼켰다. 조금 남사스러운 것 같은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서 불판만 바라보며 부지런히 고기를 씹었다. 형이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들어가."
"형은 안 들어가요?"
뒤에 또 약속 있는 건가. 기숙사 앞에 멈춰선 병찬 형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올해부터 자취를 시작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디서요?"
"쪽문 쪽에."
"어, 아까 고기 먹은 곳도 쪽문 아니에요?"
"응, 그 근처. 갈게. 내일 훈련 시간에 보자."
"아니, 형,"
그럼 그냥 쪽문에서 만나자고 하면 됐을 텐데. 방금도 그냥 쪽문에서 헤어졌으면 됐지 않나. 남들보다 머리 하나 만큼 비죽 솟아 있는 형의 뒷모습을 보니 가슴께가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접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속이 뒤집히는 느낌에 돌아서서 기숙사로 들어갔다. 아, 이래서 준향대 오기 싫었던 건데. 앞으로 어떻게 지내지.
어떻게 지내긴. 수업 듣고 훈련하고 가끔 술자리에 얼굴 비추고-빠른인 게 들통나서 술을 마시진 못 했지만-하다 보니 내 마음이 어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하루하루가 데굴데굴 잘만 굴러갔다. 내 몸도 데굴데굴 굴러가고. 병찬 형 몸이 그냥 커진 게 아니었나 보다. 준향대 웨이트 빡세게 한다는 말 듣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마지막 유산소까지 끝낸 후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어깨 위로 스포츠타올이 툭 얹어졌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들리는 위잉 하는 소리. 고개를 들어 보니 병찬 형이 내 머리 위해 손선풍기를 올려 두고 있었다.
"머리 위에 선풍기 올려 두면 시원하거든. 이제 훈련 끝이지? 땀 좀 식혀."
"넵."
선풍기 셔틀... 같은 걸 시키는 기분에 좀 찝찝하긴 했으나 더위를 식히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분명 에어컨도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데 왜 이렇게 더운 거지. 입고 있던 반팔을 팔랑거리며 땀이 식기를 기다렸다.
"형도 해 줄까요?"
"어, 아니. 나는 바로 씻으러 가려고. 손풍기는 너 써."
고맙다는 말을 꺼낼 틈도 주지 않고 형이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얼굴 빨간 것 같았는데. 형도 많이 더웠나. 손에 쥐여진 손선풍기만 괜히 꾹 쥐었다. 손선풍기를 건네 주면서 형의 손에 닿았던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상호, 오늘 스타팅이니까 준비해라."
"네? 저요?"
"민혁이 장염 제대로 걸려서 병원에 링거 맞으러 갔어. 첫 출전이지? 잘 해 봐."
"네, 알겠습니다!"
2학년은 되어야 경기에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경기 출전 기회가 제법 일찍 왔다. 3학년 선배 중 한 명이 장염이 걸려서 오늘 경기를 못 뛰게 된 덕분에, 음, 덕분에라고 하니 조금 인성 별로인 사람이 된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운동을 하다 보면 이런 기회도 소중해지니까.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내가 대신 뛰게 되었다.
"오, 상호 스타팅?"
"얼타고 있지 말고 똑바로 해."
"왜 뛰기도 전에 애 겁을 줘. 괜찮아. 형이 잘 커버 쳐 줄게."
스타팅 명단을 확인한 병찬 형과 준수 햄이 다가와서 격려의 말을 건넸다. 삑-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리고 점프볼, 우리가 먼저 공격권을 얻었다. 유난히 몸이 가벼웠다. 상대 팀의 패턴이 눈에 훤히 보였고, 슛을 쏠 때면 림이 평소보다 크게 보였다. 연속 스틸을 성공하고, 이어진 공격에 가볍게 3점슛을 넣고. 상대 팀이 작전타임을 분 틈을 타 나에게 뛰어온 병찬형이 오늘 아주 날아다닌다며 나를 꽈악 끌어안았다. 숨 막힌다고 빨리 놓아 달라고 형의 팔을 퍽 하고 치긴 했지만,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남이 아픈 걸 기회 삼아 내 행복을 좇으려고 했기 때문일까. 그 행복한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4쿼터의 끝이 보이는 시간. 아마도 마지막일 상대팀의 공격. 점수 차가 꽤 났던 탓에 이 공격이 성공한다 한들 우리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 되긴 했지만, 1학년의 패기와 첫 출전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찼던 나는 그 공격을 그냥 흘려둘 수가 없었다. 림을 맞고 튀어나온 공. 리바운드 경합을 위해 높이 뛰어 올라 손을 뻗었고, 공을 잡았다. 그리고,
"상호야!"
휘슬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경기가 중단됐다. 쿵, 하는 소리도 들렸던 것 같은데. 내가 떨어지면서 난 소린가.
"발목, 흑, 발목이요......."
아프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착지할 때 상대 팀 선수의 발을 밟고 미끄러져 그대로 발목이 돌아간 것 같았다. 스스로 설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몰려와서 결국 들것이 들어오고, 그대로 병원에 실려 가야만 했다.
검사를 받는 동안 정말 웃기게도 크게 문제 없을 것 같았다. 며칠 푹 쉬면 금방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 할 정도로 아팠으면서. 어쩌면 회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운 좋게 잡은 기회를 이렇게 부상으로 날리는 게 너무 허무해서. 병찬 형이랑 같은 코트에서, 같은 팀으로 경기를 뛸 수 있는 시간이 이걸로 끝이라는 게 믿고 싶지 않아서.
"발목 인대 파열입니다. 이 정도면 두 달, 어쩌면 더 걸릴 수도 있어요."
검사 결과는 내가 원하는 것과 정반대로 나왔다. 수술도 받아야 하고, 보름 정도 입원도 해야 하고, 두 달 이상 통원치료도 다녀야 한댄다. 운동 하면서 다친 적이 없었던 적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크게 다친 적은 처음이라 모든 게 허둥지둥이었다. 수술은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일단 입원을 먼저 하기로 했다. 부모님과의 전화를 끊고 동기에게 속옷이나 세면도구 같은 것들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깊게 한숨을 쉬며 병실 침대에 누웠다. 비정상적으로 부어오른 발목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부터 두 달....... 재활 하는 것도 아프고 힘들다고 하던데 잘 할 수 있을까. 완전히 낫지 않으면 어떡하지. 크게 걱정이라는 걸 안 하고 살아온 것 같은데 이 부상은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지. 생각이 자꾸만 나쁜 쪽으로 튀어서 생각 그만하고 자자, 마음 먹었다가 또 눈을 뜨고 핸드폰을 켰다. 스포츠 뉴스 카테고리에 들어가 발목 인대 파열을 검색했다. 그래, 다들 복귀해서 잘 뛰고 있잖아. 나도 괜찮아질 거야. 스스로를 토닥이다가 근데 저 사람들은 프로고 나는 아닌데, 그만큼 회복이 안 되면 어떡하지 또 걱정했다가. 의미 없이 기사가 띄워진 화면 스크롤만 내렸다 올렸다 하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동기인가?
"들어...... 병찬 형?"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동기가 아니었다. 양손에 큰 종이가방을 들고 있는 병찬 형이었다.
"괜찮아?"
"네, 네. 형 어떻게 왔어요?"
"아까 현욱이가 너 짐 갖다 주러 간다고 하길래 내가 대신 간다고 했어."
세면도구랑 속옷만 부탁했는데 종이가방이 왜 저렇게 크지 했는데 그것 외에도 다른 것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물 뜨러 왔다갔다 하기 힘들 테니까 물병은 제일 큰걸로, 머그컵은 보온보냉 잘 되는 걸로 가져왔어. 슬리퍼도 사 왔는데 이따 신어 봐. 안 맞으면 내일 교환 해 올게. 속옷이랑 양말은 상호 옷장에 있는 거 다 꺼내오긴 했는데 부족하면 말하고. 그리고 입원 해 있는 동안 심심할 테니까 태블릿도 챙겨 왔어. 아, 그리고 충전기도. 그리고 이건.......
형이 꺼내 주는 물건들을 보다가 문득 형의 어깨에 시선이 닿았다. 회색 맨투맨을 입고 있었는데 목덜미와 어깨가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고보니 머리가 여전히 젖어 있는 상태였다. 경기 끝나고 씻자마자 바로 온 건가. 형은 원래 후배를 이렇게까지 챙겨 줘요? 목 끝까지 차오른 질문을 꾸욱 눌러 삼켰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연락해. 그리고,"
"형. 안 와도 괜찮아요."
"응?"
"드래프트 얼마 안 남았잖아요. 저 신경 쓰지 마요."
신인 드래프트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3학년인 형은 얼리 드래프트를 신청했고. 아직까진 얼리로 나오는 것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아서, 형이 꽤나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병원에 하루 종일 있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
저 얼굴을 알고 있다. 3년 전, 병찬 형의 병문안을 갔을 때. 그 때의 내 얼굴을 병찬 형이 그대로 하고 있었으니까.
"에이. 저도 괜찮아요. 내일 부모님도 온다고 하시니까 형은 이제 안 와도 돼요."
재차 오지 말라고 하는 나를 보며 형이 몇 번이나 입을 달싹였다. 이건 위험한데.
"하지 마요."
"뭘."
"뭐든요."
내 말에 종이가방을 꽉 쥔 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갈게. 쉬어."
나 대신 가져온 짐들을 정리한 형이 작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내 두 번째 첫사랑은 대신 접어 줘야만 했다.
부드럽게 미닫이 문이 닫혔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3.
다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아, 재활 하는 시간은 빼고. 그 두 달은 정말 내 인생에서 가장 시간이 느리게 흘렀던 것 같다. 깁스를 푼 후 얇아진 다리를 보고 엄마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었다. 그래도 참, 어려서 그런가. 다시 농구 못 하게 되면 어떡하나 걱정으로 매일 밤을 지새웠는데, 다행히 예상보다 더 빨리 치료가 끝났다. 물론 바로 경기를 뛸 수 있게 되었던 건 아니고, 재활조로 빠져서 따로 훈련해야 했지만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그 후로 병찬 형을 보기가 너무 어색했기 때문에.
부상 이력 때문에 걱정하긴 했지만 그것 빼고는 모든 게 다른 선수보다 뛰어난 형이었다. 1순위는 아니었지만 1라운드에 지명된 형은 그 해에 데뷔전도 뛰고, 수훈 선수로 뽑혀 인터뷰도 여러 번 했다. 당연히 신인왕도 병찬 형이 받았고. 시간이 갈수록 형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씁쓸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제 병찬 형이랑 또 같이 경기를 뛸 수는 없겠지. 다쳤던 그날 마지막까지 형이랑 뛰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호야, 도착했다. 내리라."
"어어, 알았다."
상념을 깨는 엄마의 말에 차에서 내려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평소보다 화려하게 켜져 있는 조명. 처음 입어 보는 정장이 어색해 괜히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가, 자켓 단추를 잠갔다가 다시 풀었다가 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에 앉는 날이 오긴 오는 구나.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교 4학년 때까지 이어진 농구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것 같았다. 이런 표현 다 말로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진짜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며 다 떠오르네.
[엄마랑 아빠 2층에 자리 잡았다. 이따 끝나고 주차장에서 만나자.]
엄마의 메시지를 받고 몸을 뒤로 틀어 2층 좌석을 두리번거렸다. 엄마도 나를 발견했는지 가볍게 손을 흔들기에 나도 함께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놓는데,
'병찬 형......?'
정말 이상하게도 병찬 형처럼 보이는 사람이 2층 뒤에 서 있었다. 여기에 있을리가 없는데. 잘못 봤나. 틀었던 몸을 다시 정면으로 돌려놨다가 다시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무래도 헛걸 봤나 보다. 병찬 형처럼 보이던 사람이 서 있던 자리가 휑하니 비워져 있었다. 아, 구질구질해. 대체 몇 년째인 건지. 올해는 꼭 마음 접는다. 진짜임. 다짐하는 동안 드래프트가 시작됐다.
1라운드 지명이 모두 끝날 때까지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예상하긴 했는데 그게 현실이 되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2라운드는 지명되지 않을까. 그렇게 한 명, 두 명, 세 명....... 손에 땀이 나는게 느껴졌다. 바지에 땀을 슥 닦아내고 불안하게 뛰는 가슴을 진정 시켜야 했다.
"이어서 2라운드 5순위 지명이 이어지겠습니다. 인천 PG 라이너스 감독님 지명해 주세요."
"인천 PG 라이너스 지명하겠습니다. 준향대학교 기상호."
와아아아아!!! 2층에 앉아 있는 후배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옆에 앉아 있던 동기들이 등과 어깨를 마구 치는 게 느껴졌다. 바짝 얼어붙은 걸음걸이로 나가 모자와 유니폼을 입고, 감독님과 악수를 하고, 눈이 부시게 빛나는 조명을 받으며 사진을 찍고. 드래프트가 끝날 때까지 몸이 붕 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드래프트가 끝이 나고, 체육관을 나섰다. 아까 엄마가 차를 어디 대 놨었더라. 두리번거리며 엄마 차를 찾는데, 눈 앞에 꽃다발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축하해. 다시 같은 팀에서 뛸 수 있게 되었네."
왜일까. 너무 기쁜 날인데, 그 기쁜 날에 가장 보고 싶던 사람이 내 눈 앞에 서 있는데. 제대로 보지도 못 하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이고, 이제 어른 된 줄 알았는데 아직 애네."
"형, 병찬 혀엉......."
코를 훌쩍이며 우는 내가 더럽지도 않은지 형이 팔을 뻗어 나를 품에 안아 토닥였다. 저 사람 박병찬 선수 아니야? 하며 사진 찍는 소리, 동영상 찍는 소리들이 들려왔지만 하나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고생했어. 잘 했어, 상호야. 그 동안 항상, 챙겨 보고 있었어.
연신 내 등을 토닥이며 속삭이는 형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한국인은 삼세판이라고 한다.
내 첫사랑은 첫 번째도 실패, 두 번째도 실패.
그리고 이번이 내 마지막,
세 번째 첫사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