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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는 혼란스럽다

@bubb13_6
포말

기상호는 운은 지지리도 없는데 감만 좋은 녀석이었다.

 

대한민국의 고3이라면 대학 진학을 위해 모두가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할 터였다. 상호는 나름대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고, 상호의 담임 선생님은 실적에 미친 실적 광이었다. 상호는 딱히 가고 싶었던 과도 없었고 그냥 과학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실적 광 선생이 정해 주는 수시 카드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모의고사를 못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일찍이 입시 압박-가족 중 그 누구도 상호에게 압박을 주는 사람이 없었음에도-에서 벗어나고자 수능 최저가 없는 전형만 골라서 넣었다. 물론 과기원도 다 챙겨 넣었고. 어딘가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냥 ‘에어컨 온도가 너무 낮아서 그런 거겠지.’하고 넘겼었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그래,

기상호는 도합 10 광탈의 당사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신도 가혹하시지. 최저 없어서 수능도 안 봤는데…….

 

형 친구 따라갔던 교회에서 떡볶이만 얻어먹고 날랐던 것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누나 돼지 저금통 몰래 털어서 유희왕 카드 사 모은 것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과거에 사소하게 저질렀던 악행들이 스멀스멀 떠올라 상호를 괴롭혔다. 별수 있나… 1년 더 해야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빠른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기상호 재수 확정!

 

 

/

 

 

1년 더 공부하는 건 상호에게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유복했던 가정에 재수 비용을 지원받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고, 원래도 누가 짜 주는 일정대로 움직이는 것에 편안함을 느꼈던 탓에 계속해서 쳇바퀴를 도는 것 같은 삶에도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그저 매일매일 내 하루에 최선을 다할 뿐.

 

이번엔 정말로 대학에 갈 거라고….

 

오전 여섯 시 기상, 샤워 후 아침밥을 먹으면서 단어를 외우고, 학원에 가면서 영어 듣기를 하고, 도착해서는 국어 예열 지문을 푼다. 기상호는 수능 시간표대로 11개월을 살았고, 대망의 수능 날…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러니까 지금 내보고 상경을 하라는 거예요?”

 

“엉. 뭐 문제 있나.”

 

“걍 부산대나 경북대 가면 안 돼요?”

 

“너 옆집 김 씨 할머니 알지?”

 

“알죠.”

 

알다마다. 김 씨 할머니는 우리 아파트, 아니 우리 동네에서 제일가는 큰손으로 유명했고, 일과 학업으로 바쁜 부모님과 형, 누나를 대신해 어린 날의 상호를 돌봐 주신 분이었다.

 

“김 씨 할머니네 손자가 이번에 한국에 들어온다더라. 대학 가려고.”

 

“그거랑 제 상경이 무슨 상관인데요?”

 

“너도 이번에 대학 간다고 하니까 잘 됐다면서 자기 손자 좀 챙겨 달란다.”

 

“저는 그 형이 누군지도 모르는데요….”

 

“모르기는….”

 

아니, 진짜 모르는데.

그리고 김 씨 할머니 부탁이라도 이건 좀….

 

“새 노트북 사 줄게. 풀옵션으로.”

“어디로 가면 된대요?”

 

상호는 물질적인 것에 약했다.

쫓겨나듯 상경을 하게 된 상호는 김 씨 할머니의 배려로 룸메이트 가챠가 필수인 기숙사 살이를 면할 수 있었다. 대신 그 손자라는 형과 함께 살아야 했지만… 쓰리룸 오피스텔에서 자취하게 해 준다는데 그게 뭐 대수인가. 역시 김 씨 할머니. 손이 참 크셔. ㅎㅎ 그렇다. 김 씨 할머니는 동네 제일가는 큰손이었고, 신촌에 위치한 쓰리룸의 전세금을 턱 낼 수 있을 만큼 부자였다. 뭐, 실제로 턱 내신 건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지만. 손자 형 고마워요! 형 아니었으면 제가 언제 또 서울 대학가 쓰리룸에서 자취를 해 보겠습니까. 오시면 잘해 드려야지….

 

그렇게 자취방에 먼저 도착해 짐을 풀고 있던 상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 건 난데없이 울리는 도어락 잠금 해제 소리였고, 상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오, 세상에. 그 형 내일모레 입국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렇다면 지금 도어락을 누르고 있는 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엄마, 아빠, 형, 누나! 불효자 상호는 먼저 갑니다….

 

상호는 꼴에 그것도 무기라고 혹시 몰라 챙겼던 30cm 자를 챙겨 들고 가장 가까운 방의 문 뒤에 숨어서 숨을 죽였다.

하지만 짧은 순간의 적막을 깨고 터져 나온 건 총성도 “꼼짝 마!”도 아닌 쾌활한 목소리였다.

 

“안녕 상호~”

 

“…….”

 

“상호 없나? 할머니가 있을 거라고 그랬는데….”

 

대체 누구길래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냐….

등골이 오싹해진 상호는 어느새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상호야~ 상호 어디 있지?”

 

“…….”

 

“…….”

 

 

“찾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상호는 눈을 질끈 감고 30cm 자를 휘둘렀다.

 

 

찹.

 

 

“어… 상호 환영 인사가 격하네….”

 

 

??

 

 

“이건 뭐 환영 안마 정도로 생각해 두면 될까?”

 

“누구세요…?”

 

“음? 형아 몰라? 병찬이 형이잖아. 오랜만에 봤다고 기억도 못 하는 거야? 형 진짜 서운하다. 형아는 상호 얼른 보고 싶어서 비행기 표 예매해 둔 것도 취소하고 제일 빠른 거 타고 날아왔는데….”

 

“아, 그… 김 씨 할머니 손자라는…?”

 

“그래 상호야. 이제 좀 기억이 나?”

 

아뇨….

잘생기긴 하셨네요….

 

“어 상호야, 잠깐만. 형 전화 좀 받을게.”

 

자칭 병찬이 형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오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고, 상호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기에 바빴다.

 

그러니까? 저 ‘병찬이 형’이 김 씨 할머니네 손자고? 과거에 나랑 알았던 사이?인 건가?

근데 내가 저렇게 생긴 사람을 잊어버렸다고? 진짜 뭐고….

 

하하, 근데 병찬이 형? 발성이 좋으신 편이시구나….

나름대로 속삭이시는 것 같긴 한데 다 들리네요….

 

 

“응응. 고마워요 할머니. 덕분에 잘 만났어요.”

 

“결혼? 하하, 아직 대학교 입학도 안 했는데 무슨 결혼이에요. 둘 다 졸업하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

 

“네, 제가 조만간 다시 연락드릴게요. 끊어요~”

 

 

결혼? 설마 내가 지금 저 형 신혼집에 쳐들어와서 사는 그림인 건가?

오 제발. 나 갈 데도 없는데 쫓아내면 어떡하지….

 

 

상호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저기… 병찬이 형?님, 혹시 결혼하시나요…?”

 

“응?”

 

“예?”

 

“……?”

 

“…….”

 

 

잠깐의 정적 후 병찬이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상호 너, 진짜 기억 안 나는 거였어? 하나도?”

 

“뭐가요?”

 

“와, 상호야….”

 

??

 

“형아랑 결혼하자고 했잖아, 상호가.”

 

뭐라고?

 

“네?”

 

“그래서 한국 들어온 건데…. 진짜 진짜 하나도 기억 안 나?”

 

“제가 결혼을 하자고 했다고요? 그쪽한테?”

 

“그쪽이라니… 너 자꾸 형 서운하게 할래?”

 

“아, 예, 형님한테 제가 결혼하자는 말을 했다고요?”

 

“응. 너 다섯 살 때. 형아가 제일 좋다면서 둘 다 어른 되면 결혼하자고 아주 난리를….”

 

“아니, 잠깐만요. 저는 기억도 없지만… 누가 다섯 살이 결혼하자고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어요? 그것도 15년 전 일인데.”

 

“내가.”

 

“저희 지금 처음 보는 거 아녜요?”

 

“아닌데?”

 

“글쿤….”

 

이게 아닌데. ;;

 

“아무튼, 나는 상호랑 결혼하려고 온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내가 너 성인 될 때까지 기다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랬는데 이렇게 입 싹 닫고 모르는 척이라니, 형아는 상호만 생각하면서 여자 친구도 한번 안 사귀어 봤는데. 물론 사귀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그, 하… 일단 저도 엄마랑 전화 한 통만 할게요. 괜찮죠?”

 

“어, 해.”

 

 

 엄마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모르더라도 일단 이 상황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상호는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 엄마!”

 

“왜.”

 

“병찬이 형?을 만났는데요.”

 

“오, 벌써 만났어?”

 

벌써?

 

“제가 이 형이랑 결혼?을 해야 한다는데 이게 무슨 소리예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그 얘기를 안 했네.”

 

일부러 안 한 거 아니고?

 

“네가 어릴 때 병찬이 형 좋다고~ 좋다고 쫓아다녔잖아. 꽃반지 엮어다 결혼하자고도 하고.”

 

“…. 진짜로?”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겠니. 병찬이 키 크고 잘생겼잖아~ 싹싹하고. 결혼해 준다고 할 때 잡어.”

 

“아니, 나는 기억도 안 나는데?”

 

“됐고, 병찬이나 바꿔 봐라.”

 

뭐 언제 봤다고 병찬이야….

 

“형, 엄마가 바꿔 달래요.”

 

“어어, 줘.”

 

 

“큼.”

 

병찬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저 병찬이에요. 오랜만인데 얼굴 보고 인사 못 드려 죄송해요.”

 

“아냐 아냐. 우리 못난 막내 데려가 준다는데 내가 찾아가서 절을 해도 모자라지. 시차 적응하기 힘들지는 않고?”

 

아니, 둘이 진짜 아는 사이였어?

설마, 노트북도 계획된 거였나? 진심?

 

“아이고, 아녜요. 그리고 방금 와서 그런지 시차도 잘 모르겠어요. 조만간 상호랑 같이 인사드리러 갈게요. 네, 네. 하하,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하죠. 네네, 들어가세요~”

 

 

누가 진짜 아들인지 모를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에 상호는 소름이 돋았다. 아니, 이렇게 끝낸다고?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자, 들었지?”

 

“…….”

 

“뭐, 네가 기억 안 난대도 다시 좋아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형이 많이 노력할게. 그래도 첫사랑을 잊어버린 건 상호 네가 너무했어. 앞으로 잘 부탁한다?”

 

이건 뭐 할 말이 없네…. 나 빼고 모두가 알고 있는 결혼 약속이라니.

 

“예, 저도 잘 부탁드려요….”

 

 

 

기상호, 스무 살의 나이에 기억조차 흐릿한 15년 전 첫사랑에게 남은 인생 모두를 저당잡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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