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메세지.png

지나친 다정함

@_Sxinj0u
하트

겨울만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딱히 겨울을 닮은 것도 아니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여름을 더 닮은 그 사람은 눈도 오지 않는 이곳의 바닷바람이 차갑다고 느껴질 때쯤이면 질리지도 않고 머릿속을 차지했다.

 

누군가로 머릿속이 가득 채워지는 건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건 짝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독히도 외로운 짝사랑, 그게 기상호가 겪은 첫사랑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첫사랑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었다. 유치원생 시절 선생님에게 품은 얕은 마음도 사랑이라고 칠 수 있다면 말이다.

 

기상호는 연애라는 단어와는 관련이 없었다. 본인이 관심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농구부 부원이라는 타이틀도 한몫했을 것이다. 의도치 않았지만 무섭게 생긴 눈매도 영향을 끼쳤을 게 분명했다.

 

쌍용기 대회에서 기적처럼 우승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열린 합숙은 기상호의 인생을 뒤바꿀 중요한 이벤트였다. 당시의 기상호는 몰랐겠지만,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었다.

 

     

  

 

 

 

 

 

 

 

 

-      

 

 

 

 

 

 

 

 

 

 

 

 

합숙 훈련을 하는 동안 많은 걸 배우고, 또 놀았다. 그 나이대의 학생답지 않게 유치한 놀이도 하고, 또 하고, 또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바람을 쐬기 위해 나와 있던 기상호의 곁으로 여름 바람이 다가왔다.

 

 

“실력 많이 늘었더라. 내 말이 맞지?”

 

“병찬햄. 네… 역시 햄밖에 없어요.”

 

 

박병찬. 기상호는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적힌 게 없는 페이지를 볼 때마다 궁금증은 더 커져갔다. 박병찬과의 경기가 끝난 후 다시 만났을 땐, 아무도 모르게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걸 느끼기도 했다. 이제 겨우 두 번 만난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처음 겪는 만큼 헷갈리기도 쉬웠다.

 

동경보단 조금 더 탁한 마음을 동경이라 착각하고 있을 때쯤, 기상호는 농구를 관두려고 했었다. 잘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발목만 잡을 거라면, 조금이라도 이른 시기에 포기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상호야, 추워? 얼굴이 새빨간데….”

 

“아, 아뇨! 괜찮아요. 쫌만 더 있다가 들어가요.”

 

 

괜히 몽글거리는 느낌이 몸속을 어지럽혔다. 추운 게 분명한 계절에 추위 말고 다른 이유로 얼굴이 빨개지다니, 착각이 틀림없었다. 주머니에 넣고 있어 따뜻해진 손을 뺨에 갖다 대자 꽁꽁 언 얼굴이 조금 녹는 게 느껴졌다.

 

기상호는 박병찬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무릎은 좀 어떤지, 대학은 어딜 갈 건지, 그리고... 졸업식에 축하하러 가도 되는지. 묻고 싶은 건 산더미같이 있었지만 직접 입 밖으로 꺼낼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서, 박병찬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이 언제인지조차 묻지 못했던 기상호는 지상 고등학교의 졸업식이 끝나고 나서야 박병찬의 졸업식은 이미 지나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저 친한 선배의 졸업식이 지나갔을 뿐이었는데 이상하리만치 아쉽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인지 기상호는 알지 못했다.

 

 

 

 

 

 

 

 

 

 

 

 

 

 

 

비록 졸업식엔 가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둘의 연락이 끊긴 건 아니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꼬박꼬박 안부를 물어오는 박병찬에 그때마다 기상호는 설레는 얼굴로 근황 이야기를 했다. 후배한테 같은 나이인 걸 들켜 곤란했던 이야기, 주장이 된 정희찬이 힘들어하는 이야기, 주전 선수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등, 별거 아닌 이야기는 기상호가 3학년이 되고 졸업할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기상호가 준향대에 합격했을 때, 박병찬은 어디서 소식을 들은 건지 빠르게 축하 연락을 보내왔다. 메시지 창을 확인한 기상호는 문장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은 깨닫지 못했다.

 

기상호가 준향대 1학년이 되었을 때, 박병찬은 3학년이었다. 19살이 된 기상호는 24살의 박병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도 성인이긴 했지만, 고등학생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어른스러워진 것 같았다.

 

한창 바쁘다며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을 거절하는 박병찬을 보며, 같은 대학에 왔어도 얼굴 볼 일은 별로 없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기상호는 박병찬과의 우연한 마주침이 3번 이상 지속되자 의아함을 느꼈다. 물론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기상호가 가는 곳마다 꼭 나타나는 박병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캠퍼스 내에 수십 대가 있지만 꼭 계단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마주친다거나, 학식을 먹기 위해 줄을 서 있으면 옆에 있는 사람이 박병찬이라거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잠을 깨기 위해 밖으로 나오면 자연스럽게 커피를 들고 오는 박병찬이 있다거나.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꽤 많은 마주침이었다.

 

의도치 않게 붙어 다니다 보니 점점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박병찬이 4학년이 되고, 졸업을 할 때까지 계속 함께하던 기상호는 이번 졸업식에는 박병찬에게 축하를 건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학사모를 쓰고 환하게 웃고 있는 박병찬을 기상호는 멀리서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를 않는 그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손에 들린 초라한 꽃다발을 건네주고 싶었지만, 왠지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따사로운 햇볕이 드는 곳에 서 있는 박병찬에게 다가갈 자신이 없었다. 그런 기상호의 시선을 눈치챈 박병찬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형 보러 온 거지? 근데 왜 이런 데 있어.”

 

“주변에 사람이 많아가… 졸업 축하해요, 병찬햄.”

 

“상호가 해주는 축하가 제일 기쁘네. 끝나고 같이 밥 먹을까?”

 

 

당연히 좋다고 답하려다 뒤에서 박병찬을 부르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다시 입을 닫았다. 고개를 돌린 박병찬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기상호는, 저 시선이 오로지 나만을 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적잖이 당황했다.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건지 이해가 안 갔다. 동기들과의 대화를 끝낸 박병찬이 고개를 다시 돌렸고, 기상호의 입은 자연스레 거짓을 뱉었다.

 

 

“졸업식인데 식사는 부모님이랑 해야죠. 저랑은 다음에 또 봐요.”

 

“음… 그것도 그렇네. 다음에 꼭 불러주기다?”

 

 

기상호는 어설프게 박병찬의 환한 웃음을 따라 하며 미소 지었다. 머리를 헝클이듯 쓰다듬은 박병찬이 떠나간 뒤, 기상호는 입꼬리가 굳어있지는 않았는지,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는지 한참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나지는 않았다.

 

마치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 

     

 

 

 

 

 

 

 

 

기상호는 평생 박병찬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병찬의 뒤를 쫓고, 지금은 대학교를 졸업한 박병찬의 뒤를 계속 쫓고 있었다. 어색하기만 한 감정을 버거워하면서도 시간은 착실히 흐르고 있었고, 어느새 기상호는 졸업식을 앞두고 있었다.

 

박병찬이 대학을 졸업한 후, 기상호는 그에게 단 한 번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이따금 박병찬 쪽에서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연락이 오면 간단하게 답한 뒤 더 이상의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러자 점차 박병찬에게서 오던 연락의 빈도도 줄어들어 한 달에 한 번, 기상호의 생일이 있는 달에는 한 달에 두 번이 되었다.

 

졸업식 당일, 학사모를 쓴 기상호는 후배들과 이야기하는 동기를 쳐다보다 문득 깨달았다. 박병찬을 향한 제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박병찬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할 때 느껴지는 이상한 감정. 그건 질투심이었다.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것 같기도 했지만, 기상호는 절대 이 감정을 박병찬에게 전할 생각이 없었다.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다던 말이 진짜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카메라를 보고 웃으라는 후배의 말에 마음속의 감정을 인정한 기상호는 이제는 익숙해진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 그렇게 재능 없지도 않아.’

 

 

생각해보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박병찬에게 차마 이름 붙이지 못할 감정을 품게 된 게. 저 자신에 대한 의심이 가득했던 시절, 박병찬이 가볍게 내뱉은 말. 박병찬은 아무렇지 않게 한 말일지 몰라도 기상호에게는 의미 있게 다가왔었다.

 

아무리 그래도 7년 동안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억울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기회조차 잃어버린 채 포기하진 않았을 텐데.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바닥만 보며 조용한 곳으로 향하던 기상호는 시야에 들어온 신발에 고개를 들었다.

 

 

“……병찬햄?”

 

“졸업 축하해, 상호야.”

 

“……”

 

“어떻게 형한테 졸업식 날도 안 알려줄, 상호야? 너 울어?”

 

 

기상호는 자신이 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일이 살면서 얼마나 있었는지 생각했다. 분명 많이 울기도 했고 화내기도 했는데, 이번처럼 주체할 수도 없이 감정이 흘러내리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고, 한 번 열린 입도 닫힐 줄을 몰랐다.

 

 

“왜, 왜 울어. 응? 상호야아…”

 

“햄은, 흡, 왜 자꾸, 저한테, 흐으… 잘해줘요?”

 

“…어?”

 

“나는, 난, 좋아하는 줄도, 흑, 몰랐는데…”

 

 

7년간의 속마음이 한 번에 다 터져 나오는 건지 쉴 새 없이 훌쩍거리며 말하던 기상호는 후련해진 마음으로 울음을 그쳤다. 한편으로는 망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비상등을 키고 지나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말할 때는 신경도 안 썼지만 이야기를 끝내고 나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박병찬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역겹다고 이제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하면 어떡하지, 한 대 맞는 건 아니겠지 등등의 생각으로 머리가 터지려 할 때쯤, 얼굴이 빨개진 박병찬이 고개를 들었다.

 

 

“…상호야, 지금, 내가 좋다고 말한 거야? 그런 거 맞지?”

 

“네…”

 

“하아……”

 

 

한숨을 깊게 쉰 박병찬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기상호를 끌어안았다. 향수 냄새가 나는 품에 안겨진 기상호는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듯 보였다. 굳은 채로 가만히 있던 기상호의 어깨를 잡아 눈을 맞춘 박병찬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난, 나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네?”

 

“진짜지? 응? 한 번만 더 말해줘.”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꽂히는 시선을 이기지 못한 기상호가 뜨문뜨문 좋아한다는 단어를 내뱉자 눈에 띄게 기뻐했다. 그런 박병찬의 모습에 덩달아 행복해지는 것만 같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까지 이리도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둘 다 몰랐을 것이다. 한 명은 자신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했고, 한 명은 상대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했으니. 바보 같은 한 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제는 그 누구보다 행복할 일만 남은 연인이지만.

 

 

 

  

      

 

 

 

 

-

     

  

 

 

 

 

 

 

박병찬은 기본적으로 구김살 없는 성격이었다. 그렇게 보였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긍정적이고 항상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박병찬이라고 21년을 살아오는 동안 항상 그랬던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시절, 처음이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끔 만든 사람을 만난 건. 처음엔 아직 1학년인 주제에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쫓진 않았다. 힘들었던 시합 이후 체육관에서 만난 건 우연이었을 텐데, 이젠 그것마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기상호는 박병찬에게 특별했다. 기상호를 만난 이후로 박병찬의 세상은 항상 찬란했다. 언제나 함께 있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그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는 한참 되었었다. 하지만 괜히 섣부르게 마음을 전달했다가 이 소중한 거리감마저 잃을 게 무서워 철저히 숨겼다.

 

그 때문이었을까. 조금 더 빨리 이뤄질 수 있었던 사이가 2년이라는 시간을 더 지나게 만든 건.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다정했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간직한 지 7년 만의 결실이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