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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ueloon
블르룬

박병찬과 기상호는 뭐랄까, 그저 그거였다. 얘가 오면 쟤가 오고, 얘가 가면 쟤도 가는. 마치 N극과 S극이라고나 해야 할까. 박병찬은 기상호가 신입생일적 때부터 예뻐라 했었다. 고등학생 때는 서로 호적수였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났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제 후배로 들어온 기상호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며 너도 이 학교로 왔냐며 반가워하는 모습에 모두들 어리둥절했었다. 머리 망가진다며 조금 토라진 소리를 내도 결국 웃어버리는 기상호의 모습도 주변인들의 머리에 물음표를 띄웠다.

누군가는 말했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 누군가는 말한다. 몰랐어? 사귀는지? 그러나 원래부터 붙임성이 좋은 성격임을 모두가 알던 박병찬과 이제 막 입학해서는 아무나 붙들고 해앰~따위의 애교를 부리는 기상호의 모습에 그 소문들은,

“다녀올게요!”

“조심히 다녀와.”

기상호가 빡빡머리와 함께 군 입대를 선택함과 동시에 잦아들었다. 아무래도 군대라 함은 결별의 메카가 아니겠는가. 설마 사귀었더라도 헤어진 게 분명하다는 소문이 또다시 알음알음 퍼져갔다. 박병찬은 조그맣게 웃었다. 참 내. 별 소리들을 다 한다 싶어서. 상호랑 내가? 말도 안 되지. 볼을 살짝 긁으며 생각한다. 상호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1학년 내내 소문에 시달리느라 연애는 꿈도 못 꿨는데. 제대하면 좀 챙겨줘야겠다. 는 박병찬의 순진한 상상과 다르게,

“햄!”

“...상호?”

“내랑, 아니, 저, 저랑, 저랑 사귑, 아니, 사귀어, 주세요!”

기상호는 제대와 동시에 꽃다발을 사 들고 와서는 박병찬의 자취방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고 시뻘건 장미100송이를 내밀었다. 박병찬은 기가 머리통을 뚫고 우주로 나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후문에 의하면. 그러나 기상호를 한 번도 연애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던 박병찬은 사람 좋게 웃으며

“꽃은 잘 받을게, 상호야. 근데,”

어떡하지. 형아가 연하는 생각해 본 적이 없네. 완곡한 거절에 기상호는 회색이 된 얼굴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이런. 박병찬은 현관 스토퍼를 내려놓고 황급히 꽃을 식탁 위에 대충 올려놓곤 기상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어버릴 대로 얼어버린 기상호는 뒤늦게야 그 손을 발견했고, 그 자리에서 바들바들 일어나 박병찬의 손을 잡지도 못하고 뒤돌아서 뛰어가 버렸다.

“......음.”

내민 손의 호의가 무색해져버려 박병찬은 허공에 손만 뻗은 사람이 되었지만, 정작 정말로 큰일이 난 건 기상호의 마음이었다. 어쩌지? 상처 받았으려나. 지금이라도 찾으러 뛰어가? 아냐, 그럼 여지를 주는 꼴이 될 텐데. 박병찬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그럼에도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해 그저 한숨만 쉰다. 어쩔 수 없지. 상처를 받았다면 그 상처는 기상호 본인의 것 일 테다. 그렇다면 아물게 하는 것도 스스로 해야 할 일. 박병찬은 의외로 이런 관계에서는 냉정한 편이어서, 그대로 뒤돌아섰다. 스토퍼를 올리고 문을 닫는다. 쾅, 소리 내며 닫힌다. 기상호가 계단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지도 모르고. 기상호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완전히 좌절해선 고작 3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데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소비했다. 기상호의 풋내 나는 첫사랑은 그렇게 용기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매몰차게 군-기상호 입장에서-주제에 박병찬은 꽃다발을 한 송이 한 송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가 무얼 했기에 상호가 고백이란 답까지 내밀었을까. 꽃다발을 풀어낸다. 어림잡아 100송이란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100송이일 줄은. 웃으며 꽃들을 갈무리했다. 말려서 보관이라도 해야 하나? 식탁을 가득매운 정열에 박병찬은 고개를 저었다. 한 송이면 충분하지.

박병찬은 제 성적 취향을 고민해본 적이 없다. 여지껏 고백해 온 게 모두 여자라서, 라기 보단 농구에 몰두해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단 쪽이 더 어울렸다. 또한 남자에게 남자가 고백하기란 쉽지 않은 것을 아니까. 혹여라도 기상호 이전에 남성인 누군가가 내게 고백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그 사건을 구태여 상상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으니.

“상호...”

연하를 연애상대로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말은 반즈음 사실이었다. 박병찬은 저를 받쳐줄 사람이 필요했다. 제게 기대려는 사람 말고. 아니, 모든 연하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물론 어른스러운 연하도 있겠다만. 마침 집 안에 있던 화병 하나를 깨끗이 닦아 물을 조금 넣고 제일 크고 예쁜 장미 한 송이를 꽂아 넣고, 박병찬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상호, 가, 어떤 스타일이었더라. 아무래도 박병찬의 머리에서 상호는...

‘잉잉’

...이었으니. 박병찬은 피식 웃었다. 기상호는 어린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묵직한 꽃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꽂힌다. 물끄러미 그 꼴을 보던 박병찬은 생각한다. 저게 쓰레기통이 아니라, 꽃병이었다면, 꽤 아름다웠을 것이라고. 나머지 한 송이는 제 손에 있으니 그 한 송이를 꽂아 넣으면 완벽해질 거라고. 그렇게 한참을, 장미와 기상호를 생각하면서.

......어쩌면. 박병찬의 얼굴이 난감해졌다가 다시금 돌아온다. 아닐 거라는 생각을 머금고.

 

*

 

“상호 복학 안 한대?”

“글쎄? 벌써 전역했나?”

“했잖아, 나 얼굴도 봤어. 뭐 꽃 들고 어디 뛰어가던데?”

동방에선 기상호의 얘기가 한창이었다. 책이나 팔랑팔랑 넘기던 박병찬은 한 귀로 흘리려다 속으로 윽, 하고 뭐에 맞은 것처럼 찔려선 식은땀을 흘려댔다. 아, 곤란하네. 나한테 질문 올 텐데. 박병찬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서 온갖 질문이 쏟아졌다.

“상호 전역했지?”

“꽃은 왜 사들고 갔대?”

“막 전역한 군인이랑 사귀기 쉽지 않은데... 누구래?”

“아니, 복학 언제 한대?”

박병찬은 책으로 입가를 가리다 몰래 한숨 쉬었다. 이것도 몰라, 저것도 몰라, 그러고 보니 전역을 했다는 사실 외에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모른단 소릴 하기엔 박병찬은 군대에 가기 전의 기상호를 너무 많이 알았다. 그러니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니 에둘러서 말하곤 박병찬은 자리를 벗어났다.

“상호 전역 했어, 얼마 전에 봤고... 글쎄? 나머지는 나도 물어봐야겠다.”

아, 나 지금 나가봐야겠다. 근데 상호가 꽃을 들고 있었대? 요놈 자식이 나 모르는 새에 썸녀라도 만들었나봐~ 박병찬은 심장이 욱신욱신 거리는 걸 모르는 체 하고 가방을 둘러매고 핸드폰을 만지는 척 하며 급하게 자리를 떴다. 상호가 어디 있으려나~ 괜한 너스레를 떨며 동방을 나온 박병찬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냈다. 아이고, 상호야. 꽃을 사들고 올 거면 좀 안 들키게 한 송이, 뭐 그 정도만 사야지 100송이를 사가지고는! 귀엽긴 귀엽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데, 어라, 아주 익숙한 인영이 보여 박병찬은 소리를 죽였다. 저거 상호 아냐...?

“미안, 미안해. 울지 마, 응?”

박병찬이 동방에서 땀을 흘리는 동안, 기상호는 체대 앞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제대했다고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안 거지? 정성스레 썼다는 편지가 무용지물이 돼서 어떡하지. 저 울음은 또 어쩌지? 그러니 박병찬이 생각나는 것이다. 햄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미안해. 나는 네 고백을 받아줄 수 없어. 그러니 돌아가 줘. 이리 말하기엔 기상호는 마음에 열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편지만 우물쭈물 받아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수밖에.

“저기, 울지 마... 응?”

네가 싫은 게 아냐. 난 그냥, 너를 좋아할 수 없을 뿐이야. 여자 아이는 코를 훌쩍이다 손을 내밀었다. 어, 뭐, 손이라도 줘야 하는 걸까? 기상호는 땀에 촉촉하게 젖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제 손에 올려진 기상호의 손에 잠깐 머뭇거리는 듯 하다 훌쩍이며 푸핫 웃어버리고 말았다. 손도 좋다. 근데 이거 말구.

“편지... 쪽팔리니까, 돌려줄 수 있을까?”

“아, 응, 어, 돌려줄게...”

기상호는 머쓱하게 하트 스티커로 밀봉된 편지를 내밀었다. 자꾸만 눈치를 보는 기상호에게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괜찮아. 난 고백한 거 후회 안 해. 그리곤 조금 머뭇거렸다. 그래도 조금 못된 말, 해도 돼? 기상호는 멍한 얼굴로 어...? 하고 답했고 그건 어쩌면 그녀에겐 허락이었을 것이다.

“너도 마음고생 좀 했음 좋겠다.”

환한 얼굴로 말하는 그녀에 기상호는 잠깐 벙쪘다가, 이내 조금 웃었다. 너 되게 용하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가 조금 놀란 눈으로 변했다. 정말?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녀는 조금 미안한 얼굴이었다. 그럼 내 고백은 처음부터 쓸모없었던 거네. 이번엔 씁쓸하게 웃는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으응...”

“대차게 차였고?”

기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왠지 후련한 표정이었다. 날 좋아할 수 없단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난 핑계라고 생각했지. 그녀는 발꿈치로 섰다가, 발가락으로 섰다가 하며 몸을 앞뒤로 움직이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럼 나쁜 말은 취소할게.

“나는 잘 안됐으니까, 너라도, 뭐 지금은 차였다고 했지만, 아무튼.”

너라도 잘 해봐. 그녀는 싱그럽게 웃는다. 내 몫까지, 알았지? 기상호는 왠지 울컥해서 눈물을 참으며 애써 웃었다. 울지 마~ 내가 울어야지 왜 네가 울어? 조금 웃던 그녀는 뒤 돌아선다. 난 간다! 며 뒤돌아서 몇 걸음 가던 그녀는 제 눈가를 소매로 마구 부비는 듯 하더니 건물 뒤에서 황급히 나온 누군가와 부딪쳐 비틀거린다. 고개를 꾸벅이는 그녀의 뒤로 기상호의 눈이 넘어간다. 어?

“...햄?”

박병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선다. 어, 상호야.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기상호가 움찔 한다. 그리곤 뭐라도 잘못 한 것처럼 눈을 내리 깔았다. 박병찬은 너스레를 떨며 기상호에게 다가갔다. 아우, 내가,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니고! 우리 상호, 인기 많다! 천천히 다가오는 박병찬에 기상호는 왠지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 행위에 박병찬은 상처받는다. ...어? 나 왜?

기상호는 길게 묵음을 가지고, 간신히 대답한다. 아니에요, 그런 거. 박병찬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다 봤는데. 물론 이렇게 이야기 하진 않았다. 다 본 것도 아니었고, 이 따위로 말해봤자 해결 되는 건 하나도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상호가 물러 선 만큼 박병찬이 다가간다. 상호야. 네.

“어... 그 날 말이야.”

“.......”

“...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네.”

혹시 상처받았어? 기상호는 우물쭈물하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솔직하네. 박병찬은 웃어버리고 만다. 상호야. 부르면 쉽사리 네, 하고 나오지 않아서, 박병찬은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기상호. 기상호는 제 자리에 박혀 서서 바닥에 투둑, 눈물 방울 두 개를 떨궜다. 아니, 왜 울어. 혼내는 것도 아닌데. 기상호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그리곤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잠깐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다, 상호야.”

“...무슨 얘기요?”

“무슨 얘기든.”

너, 나 앞으로 안 볼 거야? 기상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떻게든 해 봐야지. 그치 상호야? 기상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병찬은 기상호의 손목을 붙들었다. 가자.

 

*

 

기상호는 아까부터 식탁에 놓인 화병에 꽂혀져 있는 장미 한 송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장미. 기상호의 대각선 쪽에 앉은 박병찬이 미안하단 듯 뒷머리를 긁었다. 미안해. 100송이 다 꽂을 자리가 없어서 나머지는 버렸어. 기상호는 한 송이라도 살아남은 게 신기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 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넋이 나간 것 같은 기상호에 박병찬은 피식 웃었다. 근데 상호야. 예? 처음부터 장미 백송이는 좀...

“부담스럽지 않겠니.”

웃지 않으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큭큭 웃으며 얘기하면 기상호는 귀 끝까지 빨개졌다. 저, 저가 군대에서 선임 햄들한테 들은 게 100송이라서... 손을 곰실대며 말하는 기상호는 나름 귀여웠다. 박병찬은 저 까까머리를 마구 문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내가 너무 거리감 없이 상호를 대했나보다. 그래서 그런 고백도 나온 거겠지.

“햄.”

“어, 응?”

“...저는 햄 이해해요. 뭐냐, 그, 원래 첫사랑은 안 이뤄진다고들 하고...”

그리고 전 지금 머리도 짧고, 군인태도 못 벗었구요, 아, 그리고, 햄이 여자...좋아할 수도 있는 건데 제가 너무, 그러니까, 너무 잘해주셔서, 제가 거기에 꽂혀 가지구, 근데 막 가볍게 생각하고 고백한 건 아녔어요, 친구들한테 상담도 받았구요, 제가 남자 좋아하는 거. 어쩐지 여자애들한테 마음이 안 생기더라니, 아무튼, 그래서...햄?

“...어?”

“...제 얘기 들으셨어요?”

“들었어.”

“아,”

깔끔한 거짓말을 그대로 믿어버린 기상호는 그래서, 뒤로 주절주절 할 말이 어찌나 많은지 별 말을 다 덧붙였다. 그러나 박병찬은 단어 하나에 꽂혀서 애매한 표정으로 기상호를 바라봐야 했다. 너 내가 첫사랑이야? 묻고 싶은 입을 꾹 다물고 애써 기상호의 말을 경청하는 척했다. 첫사랑?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러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기상호가... 기특해지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왜? 나 왜 이래? 그러나 기상호의 말은 점점

“햄이랑 처음 만났을 때부터, 햄 되게 멋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같이 다님서 나는 소문도 저는 너무 좋았는데, 아, 아니, 그러니깐요, 햄. 제가, 제가 좋아하는 게 햄이 너무 불편하면, 아니, 물론 불편하겠지만요, 제가 마음을 좀 정리해,”

듣기 괘씸한...쪽으로 흘러가서. 박병찬은 저도 모르게 저 입술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래, 정말 단지 그뿐이었다. 다만, 그 방식이 서로에게 옳지 못했을 뿐.

“...햄.”

“어.......그게.”

박병찬은 기상호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대려다 코앞까지 가서는 누가 봐도 실수했다, 는 표정으로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기상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벌떡 일어났다.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마구 닦고, 현관으로 가 신발에 제 발을 마구 구겨 넣었다.

“상호야, 그게,”

“됐어요, 햄. 저는 할 수 있는 얘긴 다 했어요.”

“...나는 하나도 못했잖아, 응?”

“무슨 얘기 할 건데요?”

햄은 제가 쉬워 보여요?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거 아니랬어요. 아니라고 말 하셨으면 끝까지 아니었어야죠. 입술을 부비길 했어 뭘 했어, 그냥, 그 직전까지 갔을 뿐인데 과민반응 하는 거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겠지만요, 저는... 기상호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아플 텐데. 박병찬이 한 걸음 다가가자 기상호는 문고리를 쥐어 잡았다.

“저는, 저는, 그냥 다 처음이란 말이에요...”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다고 눈이라도 꾹 감고 기다리고 뭐 그럴 줄 알았어요? 햄 진짜 못됐어요, 알아요? 부들부들 떨면서도 제가 해야 할 말을 다 하고 문까지 야무지게 쾅! 닫아버린 기상호에 박병찬은 천천히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파묻어야 했다. 박병찬의 귀는 어느 날의 기상호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한데 상호야.

“...어떡하냐.”

존나 귀엽다, 상호야...이내 박병찬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큭큭큭 웃는 소리가 고요히 울린다.

 

*

 

싸웠대? 군대 갔다 와서 서먹해졌다나봐. 하긴 남자 놈들 둘이 그렇게 가까운 것도 보기 좋은 건 아니었어. 근데 이번 동아리 엠티는? 둘 다 간다는 것 같은데? 야, 어색한 거 보기 힘든데, 누가 좀 설득해서 한 명은 오지 말게 해 봐. 이런 말들의 홍수 속에서도 박병찬은

‘상호가 왜? 나 싫대? 에이, 안 싸웠어~’

여전한 인싸였고,

‘......햄이랑 싸운 건 아니, 아니, 안 싸웠어요. 그냥 조금...’

기상호는 말 고르는 재주가 없어 소문에 숟가락을 하나 얹었다. 저리 말하고 아 이게 아인데! 소릴 지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는 기상호는

“...햄, 안녕하세요.”

“어, 왔어?”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신나는 엠티를 가는 버스에서 박병찬의 옆구리를 꿰차고 앉았다. 아, 불편한데. 속으로 중얼거린 기상호는 괜히 박병찬을 힐끔대며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못살게 굴었다. 가방을 앞으로 메고 괜히 창문을 보는 척 하며 제 눈치를 보는 것을 박병찬은 알고 있었다. 다만 모르는 척 할 뿐. 오늘 안에 사과 하고 싶은데. 언제가 좋은 타이밍이려나.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상호 탈락!”

“아! 햄! 한 번만 봐 주세요!”

“안 돼! 너 한 번이 지금 몇 번째인지 아냐?”

기상호는 술 게임에 영 잼병이었고.

“아이고~다 죽었네!”

박병찬은 술 게임의 왕이었다. 짬 어디 안 간다더니, 주변에 널브러져있는 친구, 동생, 아주 가끔 형들을 발로 툭툭 치며 길을 내던 박병찬은 애초에 일찍 날아가 버린 상호의 어깨를 잡아 벽에 기대게끔 세워 앉혔다. 기상호, 상호야, 듣고 있어?

“에? 예에... 병찬 햄, 왜요? 어어 내 아직 안 취했으요.”

에? 말~짱! 하다이까여? 햄. 진짜루! 눈이 잔뜩 풀려선 저를 부르는 기상호가 귀여워서, 박병찬은 또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밖으로 새려는 웃음을 참아야했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기엔 아무래도 이건 너무.

“꽐라네...”

적당히 취한 애 붙들고 말로 어르고 달랠 생각이었는데. 술 때문에 온 몸이 빨간 기상호를 박병찬은 번쩍 들어 안고 일명 ‘죽은 자들의 방’에 얌전히 눕혀놓았다. 오늘은 일단 자자 상호야. 나도 사과는 맨 정신에 하고 싶으니까. 그러나 박병찬은 제 야심찬 계획을 수정해야했다.

"햄."

"어 상호야. 자야지, 응?"

...죄송한데. 저랑 뽀뽀한번만 더 하면 안 되까요? 솔직히 말하면 좋았어 가지구...화 괜히 냈나 좀 후회했거든요. 혀 하나 꼬이지 않고 폭탄을 마구 던져대는 기상호가 박병찬은 야속했다. 뽀뽀그거 하면 얼마든지 하지. 근데 상호야, 네가 너무 취했어. 우리 대가리 멀쩡할 때 하자? 응? 그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기상호는 제 상체를 자꾸만 박병찬에게로 쏟아낼 듯 했다. 입술을 쭈우욱 내밀고선. 어휴. 얘를 어떻게 해? 박병찬은 엄지손가락으로 기상호의 입술을 꾸우욱 밀어냈다. 뽀뽀는 양심이 상해도 포옹은 괜찮을 거야. 그런 마음으로 박병찬은 기상호를 끌어안았다.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기상호는 이것도 좋다 생각했는지 제 품에서 자꾸만 앙탈을 부렸다. 이잉 해앰 아아앙~ 박병찬은 피식 웃을 수밖엔 없었다. 제 어깨에 마구 부빗거리는 기상호를 보며 또다시 생각한다. 얘 뭐 먹고 이렇게 귀엽냐. 그리곤 문득 깨닫는다. 나 얘 좋아하네...? 그러나 그리 충격 받지 않는다. 어쩌면 기상호가 고백을 한 날, 그 이후 자신의 마음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 그럴 수도 있단 생각을 해서인가. 아니면 쉴 새 없이 귀엽단 생각을 해서인가? 포슬포슬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박병찬도 기상호의 어깨에 잠시 기대본다. 자, 그럼 이제 어쩐다? 박병찬은 곰곰이 생각하다 그저 웃는다. 내일은 내일의 내가 해결하겠지. 그보다 상호, 너 진짜 귀엽다. 등을 토닥인다.

 

여담이지만 그 방에서 깨어있던 두엇 정도는 경악을 감추느라 고생고생 생고생을 했다고.

 

*

 

이 애매한 날씨의 아침 바다는 다소 추워서 박병찬은 겉옷으로 후드 집업을 선택한 자신을 원망하며 두 팔을 꿰고 돌계단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가슴 안으로도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그래도 더운 것보단 시원한 게 낫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쉰다. 날씨 탓인지 나와 노는 사람들이 없다. 여긴 내 공간인가? 그러니 기뻐져서 슬쩍 웃었다. 뭐, 침묵은 금세 깨지는 법이지만.

“...햄, 추운데 왜 그러고 있어요.”

기상호가 박병찬의 과잠을 들고 나와선 내밀었다. 아우, 추웠는데 잘 됐다. 고마워. 박병찬은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그게 그의 장점이었다. 그게 어떤 사이건 말이다. 기상호는 과잠을 받아들어 제 어깨에 걸친 박병찬의 옆에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가까이 안기엔 좀. 필름이 끊기지 않아서. 박병찬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상호야.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예.”

“넌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기상호가 멈췄다. 그대로 멈 춰 라 !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옆에서 숨 쉬는 것도 잊은 채로 굳어버린 걸 알면서도 박병찬은 제가 무슨 폭탄을 던졌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슬슬 차가워지는 손을 제 입김으로 데웠다. 너무 어려운 물음인가? 바다를 길게 바라본다. 기상호는 그렇게 수 분간을 눈만 또르륵 굴리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냥...그 뭐냐.

“...졸업식 날 오셨잖아요.”

“아, 그 날?”

“.......노란색 프리지아가 햄이랑 너무 잘 어울려서.”

“그랬어?”

“......너무 별 거 없어서 좀 글쵸?”

박병찬은 옆으로 허리를 돌리며 몸을 아래로 조금 낮췄다. 그러니 기상호를 올려다보는 꼴이 된다. 뭐 별 것도 아닌데 이런 것까지 부끄러워 해, 응? 기상호는 저를 올려다보는 박병찬과 눈을 맞추지도 못하고 손을 곰실거렸다. 그냥요, 저한텐 조금...

“.....그, 소중해서.”

박병찬은 능글거리는 웃음을 거두고 허리를 바로 세워 기상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코끝이 닿고, 서로의 숨결이 섞이는 그 거리에서 박병찬은 물었다.

“상호야, 나 고민 많이 했다?”

“뭐, 무, 무슨 고민, 햄, 너무 가깝, 혹시 어제 술 아직 덜,”

“나 너 좋아해도 돼?”

“예, 에, 네?”

“이번엔 안 울 거야?”

“........”

“나 지금 너한테 허락받는 거야. 응?”

그래도 돼? 기상호는 얼굴이 시뻘개져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병찬은 환하게 웃었다. 장미 100송이, 1송이는 내가 가졌으니까, 99송이, 같이 채워보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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