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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

@meilmeil_0
매일​

"병찬 오빠!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

 

 

선생님들한테나 자주 가는 그 질문은, 21살의 나이에 고 3이라는 다소 희소한 입장인 박병찬이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였다.

 

같은 농구부 동생들에게는, 유급은 농구판에서 자주 있는 일이고, 애초에 그런 것 보단 하루 빨리 자신들의 기량을 높이는 것에 열중해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농구부와 관련없는 박병찬의 반 친구들은 아무래도 저들보다 2년은 넘게 산 자신이 신기했는지 종종 그런 질문을 했다. 뭐, 별 이상한 질문들 보다는 훨씬 귀엽고 풋풋한 질문이지만.

 

하지만 그런 질문에 박병찬은 언제나 없다거나, 오빠는 농구가 첫사랑이라는 다소 무난함을 넘어 재미없는 대답을 했다. 가끔은 반쯤 장난으로 제가 좋아하는 농구 선수의 이름을 대기도 했고.

 

답하기 싫어 둘러대는 건 아니고, 사실이 그랬다. 청순한 외모와 밝은 성격 덕에 인기가 많고 고백도 그만큼 많이 받았지만, 그는 줄곧 농구 외길 인생이었다. 다른 것에 신경을 쓰는 것 보단 농구가 중요했다.

 

그런 박병찬에게도 최근 봄이 오긴 했다. 무더운 여름이 아슬아슬하게 지나 찾아온, 타 학교의 귀여운 연하 애인. 나이 차이나 동성이라는 성별에 고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자신을 그렇게 좋아한다 티를 내는 애가 얼굴을 잔뜩 붉히며 고백하는 모습에 여태껏 자각하지 못했던 마음을 덜컥 깨달아버렸다.

 

그날은 박병찬에게 있어서, 처음 농구공을 만진 순간과 비견될 정도로 뇌리에 오래 남는 기억이 되었다.

 

 

'우와, 진짜야?'

 

 

고백과 함께 찾아온 두근거림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진짜? 정말로? 이 얘가 날? 쿵쿵 거리는 심장 소리가 제 앞의 이에게 전달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뛰니, 박병찬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제 첫사랑이었다. 남들이 이따금 교실에서 이야기 하는 첫사랑의 감각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찾아왔다.

 

연하의 고백에 첫사랑을 자각한다는 건 박병찬 자신이 생각했을 땐 상당히 부끄러운 이야기였으니, 제 연상으로서의 가오와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이 이야기는 제 애인에겐 비밀인 사실이었지만. 아무튼, 박병찬의 첫사랑은 틀림없이 제 첫 애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실을 공공연하게 떠벌릴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첫 연애, 첫사랑이라 해도 이 대한민국이라는 땅은 너무 좁고도 편견이 컸다. 뭐, 박병찬은 솔직히 상관없었지만 이는 제 애인의 바람이었다. 더 큰 대한민국은 아직 멀었다나 뭐라나.

 

그 바람대로, 조형고 박병찬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사실은 본인과 그 애인, 당사자 간의 비밀이었다.

 

 

“오빠, 오빠 첫사랑은 누구였어요?”

 

“아 이번엔 농구 말고요. 농구공, 농구 선수, 아무튼 농구 관련 말고!!”

 

 

그러니 이런 늘상 받는 질문도 평소처럼 없다고 대답하는게 정답일텐데. 줄곧 농구 밖에 없던 그의 인생에 첫 연애, 그것도 첫사랑이라는 것에 들떠버린 나머지 박병찬은 평소와 다른 대답을 해버렸고,

 

 

"내 첫사랑, 음..."

 

 

그 대답은, 조용했던 인천의 한 고등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저보다 최소 2살 어린 연하들의 놀라는 얼굴을 보며 어른스럽지 못하게 크게 웃는 것도 잠시, 박병찬은 곧 물밀듯 몰려오는 질문 세례와 다소 격렬한 반응에 잠시 괜한 말을 했나 후회했다. 누구에요!? 누구!! 예뻐요!? 특징 같은 건요?!

 

하지만 또 동시에 제 애인에 대한 자랑 자체에 만족감도 없잖아 있었다. 박병찬의 눈에는 한없이 귀엽고 예쁜 제 애인. 직접적인 자랑은 아니니까 이런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여태껏 제 애인을 자랑하고 싶었던 상기된 마음에 넘겨짚은 생각이었다. 고등학교란 장소의 소문의 파급력. 그 안에서 단연 돋보이는 외모와 화제성을 가지고 있는 박병찬이라는 존재. 그 두 가지가 합쳐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잘 생각해보면 예상되는 결과를 그날의 박병찬은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다.

 

 

*   *   *

 

 

월요일 이른 아침, 박병찬은 꽤 정신이 사나웠다. 안절부절 못한다고 해야 할까. 평소 결코 텐션이 낮은 편에 속하지 않는 박병찬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부산스러웠다.

 

 

“형.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왜 이렇게 뭐 마려운 개 마냥 이러는데요.”

 

“초원아... 아무리 그래도 형한테 뭐 마려운 개라니...”

 

 

아 표현이 그렇다는 말이죠!! 오죽하면 늘 어울려 다니는 이초원이 직접 이리 물어보겠는가. 뭐 마려운 개. 표현은 좀 그럴지 몰라도 이초원의 말은 박병찬의 현 상태를 정확하게 꼬집었다. 밥을 먹다가도, 아침 훈련 중 잠깐 쉬는 시간에도, 제가 하는 것에 집중을 하는 것 같다가도 이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몸을 들썩이는 게 딱 그 꼴이었다. 오늘의 박병찬은 마음이 어딘가로 간 것 처럼 굴었다.

 

 

“내가 그렇게 티를 냈나...”

 

“지금도 휴대폰에 시선이 가 있는 양반이 무슨 말을... 뭐 애인 숨겨놨어요?”

 

“...그럴리가~”

 

 

와... 예리하네 초원이... 상당히 핵심에 가까운 이초원의 말에 박병찬이 미소를 지어보이며 둘러댔다. 비밀 연애인데, 예상치도 못한 발언에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힐 뻔했다. 최대한 입꼬리를 올리고 평소처럼 너스레 말했지만, 이초원은 오히려 미심쩍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형 설마 소문의...”

 

“응? 무슨 소...”

 

 

조심스레 무언가 말하려는 이초원에 박병찬이 곧바로 되물으려 했지만, 그 말은 안타깝게도 갑자기 열린 체육관 문에 의해 중단되었다. 찝찝함을 뒤로 하고 열린 문에 시선을 던지면 조형고의 3학년, 김성훈이 그곳에 있었다. 아, 형. 이초원. 성훈이? 뭐야? 체육관 문을 열자마자 보인 덕에 다른 이들보다 한 발 앞서 들은 소식. 그것은, 박병찬이 애타게 기다리던 것이었다.

 

 

“지상고 왔다니까 빨리 나오시래요. 인사해야 한다고.”

 

“어!? 알았어! 초원아 빨리 가자. 인사해야 한다잖아. 빨리.”

 

“아 잠깐, 형, 그렇게 잡아당기지 마요! 아, 박병찬!!”

 

 

‘지상고’. 그 단어가 나오자 박병찬이 곧장 일어서, 그대로 나란히 앉아 있던 이초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알았다고요! 아 진짜!! 짜증스러운 반응이 잠깐 저를 향했지만 박병찬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드디어 왔다. 지상고. 합동 훈련. 아침부터 고대하던 시간은 박병찬을 흥분시키기 충분했다.

 

심장이 쿵쿵 요동쳤다. 마치 코트에 들어서기 전, 딱 기분 좋게 설레이는 감각. 그러고 보니 아까 초원이가 무슨 얘기 하려 하지 않았던가? 들뜬 마음 가운데 문이 열리기 전 이초원의 의미심장한 표정이 잠시 박병찬의 머리를 스쳤으나, 체육관을 나서자 멀리서 보이는 푸른색 집단에 그 생각은 곧 종잇장 처럼 구겨졌다.

 

뭐, 아마 중요한 건 아닐 테니 괜찮으려나.

 

 

*   *   *

 

 

“오늘부터 일주일 간, 같이 훈련을 하게 된 지상고다. 저번에도 본 적 있으니까 문제는 일으키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그 말과 함께 박병찬이 고대했던 시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조형고와 지상고 간의 합동 훈련. 기간은, 일주일.

 

이를 알리는 선생님, 이규후 감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주본 채 일렬로 나열된 운동부 남학생들의 우렁찬 대답이 조형고 주차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녀석들! 지금 수업 중인거 모르냐!! 물론 곧바로 호통이 날아왔지만. 그 중 가장 큰 목소리의 주범, 박병찬은 제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도 시선은 다른 곳을 바라봤다.

 

 

‘상호다.’

 

 

같은 푸른색 져지를 입은 집단에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유독 튀는 갈색 머리. 언뜻 보면 서늘한 눈가 아래 찍힌 눈물점이 특징인 박병찬의 첫사랑이자 사랑스러운 애인. 기상호.

 

장장 3개월 만에 보는 얼굴에 자연히 눈길이 가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게다가 그냥 3개월도 아니고, 무려 박병찬과 기상호가 맺어진지 3개월이다. 세 달 전 유스 캠프에서 고백을 받아 승낙을 한 후 처음 직접 보는 얼굴. 인천과 부산의 거리는 아직 학생 신분인 두 사람에겐 너무나 잔인했다. 첫 연애가 롱디라는 것도 포함해서. 물론 둘 다 현대 문물의 사용이 능한 10대, 20대였기에 연락할 수단이야 많았지만, 직접 만나는 것보단 못했다.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 이따금 끊기는 통화 음질, 목소리 따위 들리지 않는 텍스트. 그런 것 보다는 실물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박병찬은 지금 그 사실을 확연히 깨닫고 있었다. 맞은 편에 보이는 제 애인의 모습. 3개월 동안 해왔던 영상 통화, 보이스톡, 카톡. 그런 건 다 부질 없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현실이 최고였다.

 

훈련이 끝난 저녁 시간마다 몰래 빠져나와 보고 싶다는 말을 서로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지난 날들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졌다. 미리 면허를 따지 않은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던 과거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물론 면허를 땄다고 해도 인천-부산까지의 거리를 감안하면 그리 수월한 여정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힘겨운 3개월도, 오늘부터 일주일 간 제 애인과 함께 생활한다는 걸 생각하면 단순한 과거가 되었다. 비록 훈련일지라도 같은 숙소에서 먹고, 자고, 체육관에서도 같이 훈련을 한다지 않은가. 게다가 조형고에서 하는 훈련이라니, 예전 일이 생각나 그저 운명처럼 느껴졌다.

 

 

‘또 봐요.’

 

‘그래, 또 보자.’

 

 

3개월 보다도 훨씬 더 전의 기억이 물씬 떠올랐다. 박병찬에게 있어선 정말 특별한 기억 중 하나. 그때의 대화가 절로 곱씹어졌다. 정말 또 보게 되었다. 여기서. 이게 운명이 아니라면 뭘까.

 

물론, 일주일 후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생활이긴 하지만, 박병찬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훈련이기에 당연히 이를 게을리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박병찬은 여기에 약간, 제 사리사욕 또한 채울 뿐이었다.

 

 

*   *   *

 

 

일주일이란 시간은 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짧다. 어른들을 제외하면 이 학교에서 남들보다 2년은 오래 세월을 보낸 저에겐 익숙한 일인데도, 이번엔 특히나 짧게 느껴졌다. 시간이 빠른 건지, 정말 일주일이 짧은 건지 제 안에서 결론이 나질 않았다.

 

조형-지상고 간의 합동 훈련은 어느새 중간에 접어들었다. 일주일의 절반이나 지나갔다는 말이었다. 시간이 야속했다. 하지만, 그 야속한 기간과는 별개로, 그 안의 시간들을 생각하자면, 박병찬은 완전 만족이었다.

 

물론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걸 박병찬은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짧은 현실을 만끽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그런 박병찬 안의 결론은 원래도 뛰어났던 박병찬 자신의 행동력을 더욱 부추겼다. 일주일 후에는 다시 인천과 부산, 약 400km의 거리로 떨어진다. 그 전에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자는 것이 박병찬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 지론에 따라 행동한 것은, 다름 아닌 박병찬이 이따금 상상했던 제 애인과의 학교 생활 로망이었다. 서로 다른 학교라 실천할 수 있는 로망!

 

숙소에서 나란히 앉아 밥 먹기, 연습 봐주기와 같은 소소하고도 수수한 것 부터, 팀원들 몰래 손 잡기, 박병찬이 슛을 성공시킬 때 마다 상호에게서 뽀뽀 받기 (이건 당연히 단 둘이 야간 연습을 할 때 뿐이었다.) 등 커플 다운 일들까지.

 

마치 버킷리스트 채우는 것 처럼, 박병찬은 이 일주일을 알차게 사용하기로 마음 먹었고 실제로도 잘 사용하고 있었다. 기상호가 이런 박병찬의 속셈을 제대로 알았다면 합동 훈련은 이용당했다 했을 테지만. 그래도 뭐, 훈련도 충분히 잘 따라가니 상관없지 않을까.

 

오늘도 박병찬은 즐거운 마음으로 체육관으로 향했다. 이번엔 점심 시간에 상호랑 아이스크림 나눠먹으면서 운동장 돌자 해야겠다. 비밀 연애인 건 알고 있지만 이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물론 기회를 보다 손을 잡을 생각도 만만이다. 박병찬은 이 일주일간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합숙 생활 중 긴장감을 주려는지 사흘 후, 합숙의 끝무렵에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그 이름도 ‘박병찬 첫사랑 사건’. 박병찬으로서는 최악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   *   *

 

 

시간은 어느덧 흘러 합동 훈련 6일차를 맞이했다.

 

내일이면 마지막인 합숙에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박병찬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체육관으로 향했다. 덜컹, 끼익. 철문의 두터운 소리가 입장과 동시에 체육관 내부를 울리니, 그 소리에 안에 있던 시선들이 절로 제게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진짜 선생님한테 한 번 건의라도 드려야지. 아무리 외향인 성향의 박병찬이라도 문을 열 때 마다 이목을 받는 건 사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늘 제가 짐을 두던 장소로 박병찬이 발걸음을 옮기면, 그제서야 이상함을 감지했다.

 

 

"...응? 무슨 일 있어?"

 

 

평소 한 번만 머물던 시선이 오늘따라 유난히 길게 따라왔다. 들고온 짐을 내려두고, 그 시선들 중 가장 많은 인원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비슷한 푸른 색 옷들끼리 모인 덩어리의 얼굴들은 전부 박병찬에게 친숙하고도 익숙한 이들이었다. 제 조형고 동생들 초원이와 태영이, 그리고 지상고의 희찬이와 다은, 태성.

 

박병찬이 자신들 쪽을 보면, 안그럴 것 같으면서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착실하게 인사했다. 오 형. 왔어요? 오셨어요. 형. 안녕하세요. 햄!! 님 저리 좀 가셈. 병찬햄 앉아야 함! 문디야 니가 비키라! 저는 아직 말도 안꺼냈는데 벌써부터 소란스러운 게 기운차기도 했다.

 

제각기 나이도 다른데 용케도 모여 앉아 있는 모습에 애들은 친화력이 빠르구나 라는 아저씨 같은 감상을 하다가도, 이들처럼 바닥에 엉덩이를 댄 박병찬이 곧바로 좀 전에 들었던 의문점을 꺼냈다.

 

 

"무슨 얘기 중인데 그렇게 봐. 형아 얼굴에 구멍 뚫리겠다."

 

 

하하. 혹시 몰라 농담처럼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바로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원래라면 초원이가 아 그렇게 까진 안봤어요. 라는 대답을 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이초원 뿐만 아니라, 다들 입만 우물거리고 말을 아꼈다.

 

어... 얘들아? 그 모습들에 당황한 박병찬이 의아한 표정과 함께 목소리를 내면, 다섯명이나 되는 인원들 사이에서 나오는 행동은 다들 한결같았다. 대답 대신 눈동자만 굴리거나 어, 음. 그게... 라는 제대로 된 단어도 문장도 아닌 음만 띄우기. 합숙 기간 동안 봐온 이들의 행동 양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행동에 박병찬만 답답할 뿐이었다.

 

 

"...혹시 내 욕 한거야?"

 

 

결국 강경 수단으로 그리 말하니, 이번엔 꽤나 효과가 있는 건지 제 앞에 둘러 앉은 덩치 좋은 아이들이 하나 같이 펄쩍 뛰었다. 살짝 정색한 것이 효과가 있었나. 곧바로 그럴리 없다는 말이 기운 좋게도 날아왔다. 누가 박병찬을 욕한단 말임! 일단 난 아님. 왜 나를 보는데 빙시야!! 내도 아이다!

 

얘넨 봐도 봐도 안질린다니까. 그래서 상호도 자주 어울리나. 그런 시끌벅적한 지상고 빅맨들의 대화에 박병찬이 잠깐 한눈 팔고 있으면, 박병찬의 맞은 편에서 조형고 농구부의 양심이라 할 수 있는 이태영이 먼저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좀 전과 마찬가지로 입을 몇 번이고 달싹인 후 내뱉은 태영의 말은 꽤 예상 밖의 이야기였다.

 

 

"어... 첫사랑이요."

 

 

첫사랑. 운동부 남고딩들에겐 잘 어울리기 어려운 단어가 이 안에서 튀어나왔다. 예상 밖도 이런 예상 밖의 단어가 없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풋풋한 말에 박병찬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응? 누구 첫사랑? 초원이? 태성이?"

 

 

물론 그 대답에, 갑자기 언급된 두 사람은 기겁을 하며 부정했지만. 아 뭔소리에요! 내는 와 거 넣는데요!! 각각 조형고와 지상고에서 한 성깔 하는 이들 답게 부정의 목소리가 거셌다. 아이고 애들아 형아 귀 안먹었다~

 

왁왁 거리는 둘의 목소리에 박병찬이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그리 장난스레 말하고 있으면, 아 진짜! 라는 약오르는 소리도 잠시, 초원이 아까 태영의 대답에 살을 좀 더 붙여 전달해주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구요.

 

 

"병찬이 형의 첫사랑이죠 당연히. 지금 조형고 내에서 엄청 도는 소문인데."

 

 

형... 설마 모르고 있었어요? 워낙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여서 그런가, 이 말 또한 그저 모른 척이라 여긴 것인지 툭 내뱉었던 이초원이 끝무렵에 조심스레 덧붙였다. 장본인이 모르던 이야기를 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말을 하던 초원도,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이들의 표정도 점점 굳어가며 제 얼굴에만 주목하고 있었다. 어, 음...

 

 

"...아. 그러고보니 그런 얘길 했던 것 같기도 하네."

 

 

그런 얼굴들에, 선의의 거짓말이 박병찬의 입에서 자동으로 튀어나온 건 무리도 아니었다. 사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니 괜찮으려나. 첫사랑. 제가 말했던 첫사랑. 그 두 단어의 조합에 꽤 전에 그런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박병찬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때 자신은 뭐라 답했더라.

 

 

"혹시 어떤 내용인지 들을 수 있을까?"

 

"엥? 형이 말한 거 아니에요?"

 

"어... 내가 말하긴 했는데... 음. 소문이 원래 좀 왜곡되고 그러잖아~"

 

 

사실 확인이지. 사실 확인. 이건 100% 진심인 말이었다. 더 정확히는, 기억은 있는 것 같은데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제 머릿속에 대한 사실 확인이라 해야 할까. 박병찬이 재차 너스레 웃으며 그리 말하면 처음 화제를 꺼내었던 이태영이 다시 조심히 문장을 얘기해주었다.

 

 

"어 그러니까... 형 첫사랑이 ---"

 

 

하지만 제 후배이자 친한 동생이 제 눈치를 슬쩍 보면서 천천히 말해주는 문장은, 확실히 제가 말한 부분이 어딘가 짐작은 가면서도 사실과는 일부 다른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제가 말한대로 소문이 원래 다 퍼지면서 왜곡된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원래 잘 구겨지는 일이 없던 고운 미간에 일순 주름이 졌다. 여기 상호가 없어서 다행이다. 만약 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소문을 제 애인이 들었으면... 어? 그러고보니.

 

 

"...있지. 혹시 그거, 상호도 들었어?"

 

 

박병찬이 체육관을 한 번 둘러보면, 그러고보니 좀 전 부터 익숙한 갈색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어두운 머리인 체육관에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박병찬이 사랑하는 갈색 머리가. 설마 하는 생각에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박병찬이 제 앞의 무리들에 그리 물으면, 제발 제 추측이었으면 하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어... 들었을 걸요? 아까 같이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볼 일 있다고 나갔으요."

 

 

근데 상호는 왜... 어 병찬햄?

 

평소 상호와 어울리던 정희찬의 대답과 동시에, 박병찬은 달려나갔다. 어찌나 빠르던지. 당시 자리에 있던 모두가 박병찬의 수십가지의 소문 중 하나인 그 달리기 실력을 오늘 다시 체감했다. ...햄 진짜 빠르다. 나도 병찬이 형이 저렇게 빨리 달린거 처음 봐. 나도. 와 짱신기.

 

바람이 싸악하고 불더라니까. 그게 딱 맞는 말이었다. 얼굴 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바람이 싸악...

 

 

*   *   *

 

 

한편, 박병찬은 현재 인생에서 가장 빨리 달리고 있다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다급히 조형고 부지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달려서 그런건지, 초조한 마음에서 나온건지 이젠 알 수 없었다.

 

 

"상호야! 기상호!"

 

 

목적지도 없으면서 무작정 체육관을 나온 박병찬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그 근처를 돌며 제가 찾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비밀 연애고 뭐고, 지금의 박병찬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혹여 저딴 소문에 상처받았을 제 애인이 걱정되어, 그 이름을 하염없이 불렀다.

 

핏기가 이리 가신 건 처음이었다. 그 이야길 듣고 밖으로 나갔다니. 홀로 그런 소문을 마주했을 제 어린 애인의 심정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고 또 걱정되었다. 눈물이 많은 제 애인. 혹시 충격을 받진 않았을까. 그 생각이 스치니 박병찬은 목에 핏대를 세우곤 다시 그 이름을 불렀다. 상호야!

 

 

"...병찬햄?"

 

"! 상호!!"

 

 

몇 번 이름을 외치면 6번 쯤에 대답이 들려왔다. 위치는 체육관에서 약간 떨어진 수돗가. 익숙한 갈색 머리와 그 아래 푸른 져지의 조합이 보이자마자 박병찬은 냉큼 부리나케 그 방향으로 뛰어갔다.

 

 

"상호야. 혹시 아까, "

 

 

체육관에서부터 이곳으로 오는 동안, 박병찬은 뜀박질을 하면서도 제 애인을 만나자마자 할 말들을 고르고 골랐다. 그리고 정한 문장은 이것이었다. 상호야. 혹시 아까 체육관에서 이상한 소문 듣지 않았어?

 

구차한 설명, 괜한 뜸들이기 보다 본론부터 말 할 심산이었다. 제 애인은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르고, 가끔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튀기에. 시간을 끄는 행동들은 그런 박병찬의 애인에게 괜한 생각을 심어줄 수 있기에.

 

그렇게 고심한 말을 꺼내려고 하면, 아까의 일련의 일들 보다도 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박병찬의 말문을 일순 막아버렸다. 상호야... 울어? 제 애인의 눈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상호야, 잠깐. 형아 좀 봐."

 

 

왜 울어. 울지마. 응? 사실 앞뒤 사정을 따지고, 원인을 생각하면 저 때문인게 당연한 건데, 우는 제 애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박병찬의 입에서 자동으로 나오는 말들은 한심하게도 이런 뻔하디 뻔한 멘트였다.

 

그럼에도 박병찬의 착한 애인, 기상호는 저를 원망하는 말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아이, 아니에여 햄. 잠깐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오히려 이런 착한 거짓말, 하얀 거짓말 따위를 내뱉었다.

 

물론 박병찬도 바보는 아니고, 눈은 제대로 달려있기에 저 눈물이 절대 먼지 때문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런 변명을 한 상호 본인도 제가 곧이 곧대로 믿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했을 수도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 그 우는 얼굴을 살피면 먼지가 들어간 것 치고는 꽤 오래 울은 흔적이 있었다. 눈가는 새빨갛게 변하고, 살짝 짓물렸다. 콧잔등도 어찌나 빨간지.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대충 가늠되었다.

 

5살이나 어린 애인이 이토록 우는 모습은, 당연히 박병찬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먼 곳에서 부터 올라온 제 애인이 저와 관련된 이상한 소문을 듣고 마음 고생을 하다 끝내 울었다는 생각이 펼쳐지면 더욱.

 

훌쩍거리는 소리가 여전히 수돗가에 울렸고, 기상호의 눈에서도 여전히 눈물이 고장난 수도꼭지 마냥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 이렇게 울면서 먼지가 가당키야 한가. 아무래도 울음을 멈추기 까진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아니 그 전에 탈수로 쓰러질까 걱정이었다.

 

훌쩍, 훌쩍. 킁. 그 후로도 계속되는 훌쩍임. 박병찬도 마냥 보고 만은 있지 않았다. 제 후드 소매를 끌어 눅눅해진 볼을 닦아주고, 애처롭게 떨리는 등도 좀 쓰다듬어 주었다. 상호야. 그러다 눈 붓겠다. 응? 다음날 아예 눈도 못 뜰 것 같은 제 애인에 대한 걱정으로 다정하게 말을 걸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박병찬의 위로가 또 괜한 생각을 불러 일으켰는지, 박병찬이 다정한 말을 하면 할 수록 닦아주고 있던 볼에 흐르는 눈물의 양이 더 늘어났다. 아이고. 홍수났네. 정말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상호야. 형아 좀 한 번 봐줄래? 응?"

 

 

그래도 서러운 것과 정반대로 박병찬 본인이 싫은 건 아니었나보다. 박병찬의 애절한 부탁에, 거의 바닥만 보고 울고 있던 기상호가 이윽고 살짝 고개를 들었다. 아아, 얼굴이 좀 전 보다 더 새빨갰다.

 

눈가도, 콧잔등도 불과 몇 분 만에 더 붉어졌다. 흥분한 탓인가, 아까까진 그래도 양호했던 볼과 이마도 이제는 열이 난 것 마냥 살짝 달아올라 붉은 기를 띄었다. 그 정도로 소문이 충격이었구나. 제가 애인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체감되는 동시에 죄책감이 들었다.

 

따지고보면 이 상황은 박병찬의 말 하나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상호야."

 

 

그 이름을 부르면 어느 정도 올라갔던 고개가 다시 들렸다. 선명하게 보이는 갈색 눈동자가 녹을 것 같았다. 그 눈을 빤히 보던 박병찬은 이내 그 위로 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입술을 올려,

 

 

"계속 울면 형아가 뽀뽀한다?"

 

 

그 말과 함께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예? 제 예상을 벗어난 행동이었는지 그 아래에서 당황스러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여전히 흐르는 눈물에 박병찬은 이번엔 이마에 입술을 올렸다. 상호 아직도 우네.

 

쪽, 쪽, 쪽. 잠, 햄, 잠깐. 저를 저지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박병찬은 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볼, 콧잔등, 눈물점. 그 얼굴에 입술을 댈 수 있는 자리는 죄다 찾아가 뽀뽀했다. 상호 아직도 운다. 형아랑 그렇게 뽀뽀하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며 잔뜩 우느라 살짝 터진 입술 위에도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춰주면, 아까까진 눈물과 함께 울음으로 붉었던 얼굴이, 이제는 다 마른 자국과 함께 다른 의미로 붉은 기를 띄었다.

 

 

"아 갑자기 여서 뭐하는 짓이에요! 쪽팔리지도 않나!! 들키믄 우짜려고!"

 

 

좀 전의 울먹이는 소리는 이제 온데간데 없이, 박병찬에게 호통을 치는 목소리는 성이 좀 나긴 했지만 기운찬 것이 듣기 좋았다. 이제 안울어? 박병찬이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그렇게 물으면 기상호가 그 붉은 얼굴로 외쳤다. 아 이제 안울어요!

 

 

"상호가 또 울면 형아는 계속 뽀뽀할거니까."

 

"알았다니까요... 이제 안우니까 뽀뽀는 그만하시죠."

 

 

여전히 눈물 자국이 잔뜩 난 얼굴로 그리 매몰차게 말하는 제 애인에, 박병찬은 살짝 심통이 나 다시 볼에 한 번 입술을 붙였다. 쪽. 아 박병찬!! 응, 완전히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잠깐의 뽀뽀 소동이 끝나면 수돗가는 이제 훌쩍이는 소리 대신 정적으로 가득 찼다. 그럼 이제, 어떻게 말을 해볼까.

 

박병찬이 정면을 바라보면, 기상호 또한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달싹이는 입이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상호야."

 

"...예..."

 

 

하지만 박병찬은 선수를 쉬이 내주지 않았다. 두뇌 회전이 빠른 박병찬의 애인은 아마 침묵이 유지되는 이 와중에도 제가 왜 저를 찾아왔는지, 이제 무슨 말을 하려는지 분명 여러 차레 생각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기상호는 머리가 좋고, 가끔 엉뚱했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저 비상한 머리가 꼭 박병찬이 생각한 대로 굴러가지는 않을터였다. 혹시 몰라, 이대로 생각하게 하면 혼자 이별로그까지 찍을지. 박병찬의 애인 기상호라면 충분히 가능할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박병찬이 오해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명확했다. 최대한 빠른 타이밍에, 솔직하게 말한다. 홀로 생각하지 않게, 괜한 의심이 들지 않게. 뭐, 선수 필승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형아가 오면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문장을 시작하면, 다행히 기상호에게서 반응이 보였다. 바닥을 보았던 시선이 그대로 타고 올라와 박병찬의 얼굴을 향했다. 좋은 징조였다. 제가 체육관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박병찬이 말했다.

 

 

"내 첫사랑에 대한 소문이 좀 이상하게 도는 것 같더라고."

 

 

...이상하게요? 응. 이건 진짜, 박병찬의 100%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체육관에서 그 소문을 마주 했을 때 느낀 감정은 정말이지...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진실과 허상의 중간에 있는 왜곡된 문장이 박병찬에겐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내 첫사랑이 뭐더라... 긴 갈색머리에, 애교도 많고, 또... 아 그래. 귀여운 5살 소꿉친구 연상 누나라던가 그러던데."

 

 

제 조형고 동생들에게서 들었던 소문의 문장을 최대한 떠올리며 읊으면, 소문이란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긴 갈색머리에, 애교도 많고, 귀여운 5살 소꿉친구 연상 누나’. 아예 틀린 부분이 없는 건 아닌, 묘하게 구체적인 문장은 정말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상상력 또한 풍부한 박병찬의 애인이라면, 아마 이 문장을 듣고 자신은 그저 대체품이라 여길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을 거라는 것까지 생각하면, 정말, 커플 하나 해체할 수 있는 무서운 소문이었다.

 

 

"어... 아니에요?"

 

 

물론 진실은 모르는 입장에선 그 잘못된 문장이 진실일테니, 박병찬의 말에 기상호가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꽤 놀란 것인지 여전히 물기에 젖어있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몇 번을 꿈뻑꿈뻑 천천히 감았다 떴다. 진짜...? 진짜로.

 

 

"상호야... 일단 형은 소꿉친구 부터가 없어."

 

 

초등학교 때부터 농구에만 집중한 저였다. 뭐, 농구판이 그러하듯 초등학교 때부터 아는 얼굴이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그 또한 박병찬의 2번의 유급과 서로 갈 길이 바쁘다보니 자연스레 소통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니 저와 연락을 하고 있는 소꿉친구라니,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하물며 여자면 더욱.

 

 

"아는 5살 연상 누나는...?"

 

"형이 아는 연상의 여자는 재활 병원 선생님들 뿐이야. 다들 나보다 나이는 훨씬 많으시고."

 

 

제일 젊은 분이 30대였나. 그랬을걸. 현재도 가끔 방문하는 병원을 떠올리며, 박병찬이 한치의 거짓도 없이 사실 만을 말한 것을 시작으로, 그 후에는 마치 스무 고개 마냥 질문과 대답이 몇 번이고 오갔다.

 

긴 갈색 머리... 음. 형은 긴 것 보다 짧은 편이 더 취향인데. 딱 상호 정도의 길이면 더 좋고. 애교는... 상호도 애교 많지? 특히 형한테. 글킨 한데... 큼. 그럼 귀엽다는 건... 상호가 딱 귀엽잖아. 예?

 

소문의 진위 판단인지 박병찬의 기상호 칭찬 타임인지 모를 문답을 그렇게 주고 받으면, 박병찬은 곧 마무리 멘트를 장전했다. 이걸로 제 애인의 안에 있는 모든 의심을 부숴버릴 작정이었다. 알겠지?

 

 

"애초에 형의 첫사랑은, 상호인데."

 

 

갈색 머리에 눈물점이 매력적이고, 애교 많은 귀여운 5살 연하. 딱 제 애인인데.

 

동시에 눈썹을 아래로 내리고, 서운하다는 티를 팍팍 내었다. 박병찬의 회심의 일격. 한때 걱정했던 제 가오나 이미지는 이제 뒷전이었다.

 

 

"...진짜요...?"

 

"응."

 

 

그리고 다행히, 그 일격은 제대로 먹혀들어간 것 같았다. 이전까지 살짝 어두웠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관찰력 좋은 제 애인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는 저 또한 구분이 가능했다. 거짓말 아니죠? 진짜? 물론 아주 약간의 의심은 있는 것 같다만, 이 또한 박병찬의 한 마디에 곧 수긍되었다.

 

 

“상호야. 형은 지금 애들 앞에서 상호에게 키스하라면 할 수 있어.”

 

 

비밀 연애 중지는 오히려 박병찬, 제가 바랬다. 이따위 헛소문이 돌 바에는 그냥 욕 좀 먹고 공개 연애 하고 말지. 은은한 독기를 품은 진심에 기상호는 그 마지막 의심의 꼬리를 내렸다. 믿을게요. 응.

 

 

"그럼... 왜 그런 소문이 도는 거지...”

 

 

충분한 납득에 의심이 없어지면, 그 다음은 궁금증이었다. 왜곡된 소문의 원인, 타당한 궁금증이었다. 한결 편해진 얼굴의 기상호가 이번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혼잣말과도 같은 문장이 제게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뜨끔.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가.

 

여기까지 말했으니 박병찬도 더는 숨길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다 말했는데 마지막에 와서 숨기면 여태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더 최악까지 가면, 아마 이별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까와 같은 우는 얼굴의 상호는, 박병찬은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건......”

 

 

하... 각오를 다지고 입을 열면, 이전과는 달리 말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할 수 없다고 해도 박병찬은 해야만 했다. 애초에 본인이 뿌린 씨앗이었다. 거두는 것도 당연히 박병찬 자신의 몫이었다.

 

 

“...아마, 나 때문...인 것 같은데...”

 

“...예?”

 

 

어처구니 없어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제 애인의 반문에, 박병찬의 입에서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충분히 이해하는 부분이었다.

 

잘 살던 커플의 사이를 갈라 놓을 뻔한 소문의 원천지는, 바로 그 커플 중 한쪽, 박병찬 본인의 입이었으니까.

 

 

*   *   *

 

 

그날 조형고를 뒤흔들었던, 박병찬이 첫사랑과 첫 연애를 하는 것에 들뜬 나머지 경솔하게 입을 놀린 첫사랑 발언 이후, 대다수 학생들의 대화 주제는 한동안 그것이었다.

 

박병찬의 첫사랑, 그 사람은 누구인가.

 

뭐 이리 유난인가 싶겠지만. 애초에 조형고등학교의 박병찬이란, 본인만 잘 모를 뿐 나름 유명한 인물이었다. 오히려 그 박병찬을 모른다면 십중팔구 갓 들어온 1학년이나 전학생이란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까. 그만큼 박병찬은 학교 내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일단 외모부터 근처 남고생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180cm은 무슨 185cm는 거뜬히 넘는 큰 키. 그렇다고 멀대같이 큰 것도 아니고, 균형이 잡히다 못해 옷 위로도 알 수 있는 확실한 근육이 있는 몸. 얼굴은 뭐, 말 할 것도 없었다. 조형고의 수지가 박병찬의 별명 중 하나였다.

 

그럼 차라리 성격이라도 못나지. 하지만 그건 박병찬을 시기, 질투하는 일부 못난 이들의 추한 바램이었다. 21살이라고 해서, 주위의 아이들보다 2살 더 많다고 해서 박병찬은 결코 제 나이를 방패로 삼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꼰대짓도 가끔 ‘형아’, ‘오빠’ 자신을 이렇게 칭할 뿐이었지 딱히 그 이상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그냥 인칭 대명사 대신으로 쓰나? 수수께끼 같은 소소한 궁금증만 남을 뿐.

 

과하게 굴지 않고 그렇다고 덜하게 굴지도 않았다. 운동부이기에 학급에 완전히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아예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여자애들에게 붙잡혀 화장품의 희생양이 되기도 하고, 남자애들이 하도 조르면 피시방에서 게임도 한 판 해주었다. 3학년 10반 박병찬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박병찬이 여태껏 입을 다물던 첫사랑에 대해 말을 꺼냈다?

 

조형고등학교 최대 이슈였다. 혹은 대형 열애설.

 

원래 사람의 소문이 빠르게 도는 편이라지만 박병찬의 소문은 그보다 더 빨랐다. 어찌보면 농구 코트에서 주로 바람으로 묘사되는 그의 플레이와도 비슷했다. 박병찬의 첫사랑 이야기는 바람과도 같이 반나절도 안되어 교내를 휩쓸었다.

 

 

"박병찬 오빠 첫사랑 소문 들었어?"

 

"에이, 그 오빠 첫사랑 없잖아. 저번에 물어봤을 땐 농구가 첫사랑이라던데."

 

“나도. 난 누구더라... 무슨 외국인 농구선수라고 하던데. 여자도 아니었어.”

 

"아니 혜윤이가 얼마 전에 물어봤다고 했거든? 근데 답이 평소와 달랐대."

 

 

뭔데? 누구야? 박병찬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그런 식으로 일파만파 퍼져갔다. 학업에 지친 고등학생들에게는 교내 인기인+사랑 이야기+소문이라는 조합은 꽤나 자극적인 소재. 그날 조형고 학생들의 입에서는 ‘박병찬’, ‘첫사랑’이라는 키워드가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소문이 으레 그러하듯. 입과 입. 구전으로 전달되는 말은 와전되기 쉬웠다. 말하는 사람의 발음, 표현의 차이도 있겠지만. 원래 사람이란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나 이미지 등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도 한 몫 했다. 예를 들면, 노란색 과일을 말하라 할 경우, 누군가는 바나나라고, 다른 누군가는 레몬이라고 답할 수 있는 것 처럼.

 

그러니까, 박병찬이 제 첫사랑을 ‘갈색 머리에 눈물점이 매력적이고, 애교 많은 귀여운 5살 연하’라 말했어도, 그 문장을 들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전달하냐에 따라 그 문장은 언제나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야 너 그 얘기 들었냐? 10반 박병찬 형 첫사랑.”

 

“아 그거? 뭐였더라. 갈색 머리에 애교도 많고... 귀엽다고 했나? 나이 차이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나도 그거 들었는데. 5살... 연하였던가...”

 

“에이, 그 형이 5살 연하를? 말이 되냐. 연상이겠지.”

 

 

그리고 그 결과. 소문이 돈 지 약 보름. 박병찬의 첫사랑은 어느새 ‘갈색 머리에 눈물점이 매력적이고, 애교 많은 귀여운 5살 연하’에서, ‘긴 갈색머리에, 애교도 많고, 귀여운 5살 소꿉친구 연상 누나’로 바뀌었다. 충격적인 비포 애프터였다.

 

소문이란 참 무섭다. 눈물점은 어느새 사라지고, 연하가 연상이 되질 않나. 수식어는 또 자유자재로 추가되어, 알려주지 않았던 머리 길이와 성별의 정보가 생겨나질 않나.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소꿉친구라는 요소가 나온 건 덤이었다.

 

 

“근데 왜 병찬 오빠, 원래 첫사랑 질문 이런거 대답 안해주잖아.”

 

“그니까. 갑자기 무슨 바람이지?”

 

“아 그거 아니야? 박병찬 오빠 최근 기분 좋아보였잖아. 그 첫사랑이랑 재회해서 그런 걸지도?”

 

 

진짜? 아니 그냥 내 추측인... 야 얘들아 빅뉴스!! 이미 충분히 변질되었는데도 모자른 것인지, 소문은 아직도 제 첫사랑을 못 잊은 박병찬이 그런 그녀와 최근 재회했다는 쁘띠 드라마도 친절히 첨부되어, 여전히 죽지도 않고 왜곡된 형태로 조형고에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끈질긴 소문이 결국 그런거에 별 관심 없던 운동부 아이들의 입까지 오른 걸 생각하면, 소문이란 참 무서운 존재였다.

 

 

*   *   *

 

 

"...결국, 햄 잘못?"

 

"...아마, 응..."

 

 

박병찬의 이야기가 얼추 끝나면, 관찰, 통찰력 스페셜리스트인 제 애인에게서 어이없다는 말투와 함께 가장 핵심적인 요약이 날아왔다. 박병찬의 잘못. 틀린 말은 일절 없는 완벽한 요약이었다.

 

물론 소문이 퍼지고 왜곡되는 과정을 생각하면 오로지 제 잘못 만은 아니었으나, 가장 원초적인 원인을 따진다면 박병찬, 정확히는 박병찬의 방정인 입인지라, 사실상 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는 처지였다.

 

 

"...미안. 자랑하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그 덕에,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한 것 까진 좋았지만, 박병찬은 현재 대역죄인이 된 기분으로 제 애인의 앞에 서 있었다. 자신의 죄는 확고하게 알고 있기에 그저 5살 어린 애인의 눈치만 한없이 봤다. 곁눈질로 살핀 어린 얼굴은 하도 울어 이제는 부어있었다. 정말 미안해 죽을 것 같다는 감각이 이런 것인가. 죄책감이 저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좀 전의 기상호 처럼 결국 이번엔 박병찬의 시선이 바닥에 꽂혔다. 몇 번이고 생각해도 제 입방정 하나 때문에 저 어린애가 울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부산이라는 그 먼 곳에서 온데다 심지어 합숙 중, 좋은 추억만 쌓아줘도 모자를 판에 마음 고생만 시켰다니, 애인 실격 아닌가.

 

 

“햄.”

 

“응?”

 

 

사고가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으면, 맞은 편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박병찬은 저도 모르게 바닥을 향했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조건 반사 마냥 들어올린 고개. 그 앞에는 제 애인, 기상호가 양 팔을 벌리고 있었다.

 

 

“어...?"

 

 

뭐지? 뜬금없는 애인의 행동에 사고가 절로 굳었다. 양 팔을 벌렸다는 건 안아달라는 건가...? 갑자기? ...왜? 도저히 맥락을 알 수 없어 박병찬이 아무 행동도 않고 그저 얼타고 있으면 곧 그 의문을 해결하듯 기상호가 입을 열었다. 병찬햄. 응...

 

 

"내 오늘 정말 서러웠거든요?"

 

"...미안."

 

"소문 듣고 햄이 내가 그 햄 첫사랑의 대체품인가 하고."

 

"...응."

 

"그럴리 없다 생각하믄서도 눈물이 억수로 쏟아져 나와서, 봐요. 눈도 팅팅 부은거. 얼굴 몬생겨졌다 아이가."

 

"아냐. 귀여워."

 

 

아이, 그 말이 아니라. 갑자기 불만을 이야기하다가도 박병찬이 제 솔직한 심정을 담아 그리 말하면, 당황한 듯 기상호가 목을 가다듬었다. 큼, 아니 어쨌든.

 

 

"내 오늘 진짜진짜진짜 서러웠으니까."

 

그 몫만큼 꼬옥 안아줘요. 빨리.

 

 

그 말과 함께 기상호가 이미 벌린 팔을 더 넓게 벌렸다. 빨리 와요. 햄.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에 응해 품 안으로 박병찬이 들어가면, 긴 팔이 저를 가두듯 닫혔다. 햄도 마주 안아줘요.

 

 

"들키기 싫은 거 아니었어?"

 

 

더 큰 대한민국은 아직 멀었다 그러지 않았나? 아 햄은 뭐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대요...

 

 

"이제 됐으요. 들키믄 뭐. 조형고 박병찬에게 다른 학교 애인 있다는 소문 밖에 더 나나."

 

"갈색 머리에, 눈물점이 매력적인, 귀엽고 애교 많은 연하 남친이자 첫사랑 말이지?"

 

"정보 참말로 많네. 그런 김에 잘생겼다는 정보도 좀 추가해주이소."

 

 

하하하, 좋아. 그 말과 동시에 박병찬이 저를 안고 있던 상호의 등에 손을 올려, 그대로 끌어안았다. 마주 안은 체온은 따스하고, 제 애인은 너무 기특했다. 관찰력이 좋은 박병찬의 어린 애인. 분명 서러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울었던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고.

 

제가 미울 법도 한데, 원망의 말을 해도 되었는데, 기상호는 오히려 먼저 팔을 벌려왔다. 저를 신경 쓴 행동일게 분명했다. 그 착한 마음에 미안하기도 했지만 또 동시에 박병찬은 다시금 깨달았다.

 

아, 제 첫사랑이 상호여서 다행이었다.

 

 

*   *   *

 

 

박병찬에게 그 날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쌍용기가 끝나고 개최된 유스 캠프. 햄, 저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첫 날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고, 거의 끝나갈 무렵에 불려갔던 체육관 뒷편.

 

그다지 색다르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장소에서 받은 고백은 거창한 것도, 로맨틱한 것도 하나 없이 평범했지만 그 평범함이 박병찬의 마음을 흔들었다. 좋아햐, 큼, 아,

 

 

“좋아해요. 햄.”

 

 

혀가 꼬인 첫번재 고백 후, 잠시 목을 가다듬고 나온 두번째 고백. 사실 말이 평범했다지, 고백한 당사자의 입장에선 상당히 얼빠진 고백이었을 것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전달받은 고백 문구는 단조롭고, 심플했다. 단순하다고도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진부한 문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단순하게 짝이 없는 문장에도, 박병찬의 심장은 이상하게도 미치도록 뛰었다.

 

안그래도 고백한다는 생각에 붉어진 얼굴이, 꼬인 혀로 얼굴 만이 아닌 목, 귀까지 빨갛게 익은 건 당시에도, 지금도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다.

 

뿐만 아니라, 부끄러움에 얼굴은 아래로 떨구었음에도 또 자신의 반응이 신경쓰였는지 연신 힐끔대는 갈색 눈동자도 그렇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잔뜩 긴장해 꼼지락 거리는 긴 손가락은 또 어떤지...

 

거기까지 생각을 하니 박병찬은 제 상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상대, 기상호의 행동이, 시선이, 하나하나 제 눈에 밟혔다. 고백 자체는 처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날 때 부터 빠르고, 힘 쎄고, 훤칠한데다 얼굴까지 잘생겼으니 박병찬에게 고백은 사실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수많은 고백 중,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상대를 의식하게 되는 것도, 심장이 미치도록 뛰는 것도 전부 처음. 어쩌면 기상호의 고백보다 더 진부할지도 모르는 감각이었다. 그런 단조롭고도, 심플하고, 단순한 감각에 박병찬은 결국 깨달았다.

 

이것은, 첫사랑이었다.

 

박병찬이 앞으로 평생 안고 갈 제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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