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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 in love alone

@3joong_5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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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청량리. 청량리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내리는 사람이 모두 하차한 다음 안전하게 승차하시기 바랍니다.

 

청량리. 어디 보자, 다음 열차도 광운대행이고…. 이거 아무래도 환승역에 묶여있을 것 같은데. 미래를 직감한 기상호가 실시간 지하철 앱을 누르자 다섯 정거장 전에 머물러 있는 소요산행 열차가 보였다.

 

“하아….¨

 

한숨만 나오는 배차간격이다. 누나는 와 서울 끝자락에 자리를 잡았나. 기냥 편하게 노른자 땅 위에서 살지. 서울 소재 대학교에 합격한 기상호는 아린 다리를 콩콩 치며 누나의 자취방 위치에 한탄하고 있었다.

 

그야 아슬아슬하게 서울에 편입한 바람에 실질적 거리는 경기도와 같은데 ‘상호 넌 서울 살지? 그러면 더 있어도 되겠다! 2차 가자!’ 따위의 말을 들어야 한다면. 서울 중앙에 위치한 학교와 자취방이 왕복 2시간 10분이나 걸린다면. 그 어떤 동생이 제 혈육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구원이라고 지만 집 안 오면 단가.

 

아예 다른 지역에 살거나 3시간에 걸쳐 통학하는 친구들보다야 적다지만 지옥의 1호선은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매일 몰아치는 1호선 빌런들과 출퇴근 시간의 빽빽함 속에서 어떻게 삶의 여유를 찾으라고!

 

기상호가 통학으로 골머리를 앓다 못해 정신을 놓게 된 데는 망한 수강 신청이 단단히 한몫했다. 정확히는 제 피지컬을 맹신해 희망 과목을 담지 않은 기상호 1과 정희찬과 게임을 하느라 수강 신청 날짜를 까먹은 기상호 2의 탓이었다. 하지만 4일 내내 직장인들과 부대끼는 무력한 대학생 기상호 3에게 기상호 1, 2의 잘못 따위는 기억 중추 해마의 0.1mg도 배당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오후 6시 21분으로, 정확히 퇴근 시간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종로 3가에서 1호선을 기다리시는 직장인 여러분. 이거 대학생학대입니다. 대학생학대는 거꾸로 해도 대학생학대, 직장인학대는 거꾸로 하면 대학인장직. 말이 안 되죠? 누가 봐도 대학생의 피로가 압승입니다.

 

대학생과 직장인의 피로를 저울질하던 기상호가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대량 학살과 플레이어로 각성해 사람들을 구해내는 제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 때 명랑한 기계음이 들렸다. 아쉽게도 외계 존재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지금 인천. 인천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내리는 사람이 모두 하차한 다음 안전하게 승차하시기 바랍니다.

 

열차가 진입하자 철로와 바퀴가 부딪치며 들리는 잡음도 커져 왔다. 부럽다. 내도 얼른 집 가고 싶은데. 커지는 소음에 맞춰 미디어 음량을 높이던 기상호가 좀처럼 고정되지 않는 이어폰에 얼굴을 구기며 앞을 바라봤다. 스크린 도어에 반사된 조명이 눈을 찌르다 점점 옅어져 간다. …철로 너머로 사람이 보였다.

 

어라. 방금 누가 인사하지 않았나? 지하철이 사람들을 잡아먹기 전 설핏 보인 인영은 분명 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건넸다기엔 정확히 그를 가리키던 손가락이 있었다. 검고 단정한 생머리에…. 덩치는 조금 더 컸던가? 한껏 올라간 입꼬리나, 흰 피부. 떠올릴수록 또렷해질 듯 다가오던 형상은 다시 흐릿해져 갔다. 대충 잘 생겼던 것 같은데…. 확실한 건 그의 뒷머리가 흰 목을 살짝 덮을 정도로 길었다는 거였다.

 

고민한 시간이 무색하게 기상호는 바로 다음 날 제게 손을 휘저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어제와 같은 6시 27분, 빠른 환승구역 5-3번 승강장 맞은편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서둘러 반대편 승강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맞은편의 기상호를 발견한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이 반가움으로 잔뜩 환해진다. 그래. 뒷머리가 긴 그 사람은 미소 지은 입이 상쾌해 시선을 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안녕.

 

 

지금 의정부. 의정부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내리는 사람이 모두 하차한 다음 안전하게 승차하시기 바랍니다.

 

 

들어오는 열차에 기상호가 공중에 손을 휘적거린다. 급박한 마음에 태가 흐트러진 팔이 파도처럼 너울진다. 태어나 처음 팔을 휘두르는 듯 허둥대는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어째 저 햄은 웃음소리도 청량할 것 같다…. 웃는 게 뭐 이리 청순하노. 열차에 올라탄 기상호는 저도 모르게 반대편 문으로 가 남자가 있던 곳을 살폈다. 선로 너머의 그는 기상호의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눈을 마주해왔다.

 

 

출입문 닫습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또 보자.

 

호선을 그리던 입술이 떨어지며 담아낸 말은 단 두 마디였다.

 

입 모양만으로 전해지는 인사가 이리도 기분이 좋았던가. 아니 애초에 퇴근길 1호선이 이렇게 간질거릴 수가 있었나. 누구였을까, 그 사람. 왜 하필 나한테 인사를 했지? 내를 아는 건가? 저래 잘 생겼으면 내가 기억 못할 리가 없는데….

 

아이다. 모솔아다 기상호. 이건 상황이 로맨틱한 기다. 흑심 1도 없는 아재랑 해도 설렐만한 갓반인용 럭키스케베 시츄잖나. 아무 감정 없다는 친구 둘 놓고 하라고 해도 떨린다…며 자기합리화하기에는 건너편 남자가 수지였다. 성별만 다른 남자판 국민 첫사랑을, 철로 2개에 스크린도어 2개에 앞 사람 2명까지 낀 거리에서 480p 화질로 봐도 갑자기 바람이 쏴악하고 불며 옆머리를 넘길 것 같은 사람을 내가 우예 이기는데….

 

그래…. 불알친구도 설레는 상황이라도 메마른 퇴근길 지옥철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면 기냥 꼴값이지. 더구나 상대가 안면도 트지 않은 사람이라면? 기상호는 그저 1호선 빌런을 목도한 시민이 되어 3초간 입 닫고 정적하다 가족들에게 무용담을 전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보통이라면 그런데…. 이게 맞나. 겨우 두 번 본 사람을 이래 오래 떠올릴 수가 있나. 기상호는 결국 지하철에서 침대에 눕기까지의 모든 시간을 그 사람에게 할애했다. 날이 밝아서도 계속 생각나는 그에 기상호는 결국 아침 강의에 지각하고 말았다. 그래도 아까 출근철에 낑겨 쓴 지식인이 있으니까! 지식인이라면 이 현상을 설명해 주겠지! 교수님의 푸근한 인상에 변화가 없음을 확인한 기상호는 냉큼 네이버 지식인으로 접속했다.

 

아싸…! 제가 올린 질문에 벌써 답변이 달려있었다.

 

 

Q 계속 누가 생각나는데….

숨 쉴 때도 그 사람이 떠오르면 어떡해요?

들이쉴 때는 하얀 얼굴이 생각나다가 내쉴 때는 그 사람 뒷모습이 일렁거려요….

이거 뭐죠. 진짜 그 부정맥? 그런 건가요? ㅠㅠ?

 

〓 순환기내과|#부정맥

 

아기상어 20xx.xx.xx 조회수

 

 

A 2개

 

익명 답변

비공개율 21.6% · 최근답변 20xx.xx.xx. 중수

이 새X 얼빠네

님 그거 그 사람 좋아하는 거임 ㅇㅇ

잘되면 유튜브 다이노TV 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 ㅂㅌ

 

ㄴ 질문 작성자

좋아한다는 거 알려주신 건 고마운데 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욕을 하시는지…ㅠㅠ

20xx.xx.xx. 9:12:16

 

…그렇다. 스물하나의 첫 교시 전공 강의실, 기상호는 자신이 답도 없는 얼빠 가능충임을 깨달았다. 여름이었다.

 

다이노TV의 도움으로 두 번째 만남부터 가능성을 깨우친 기상호에게 무서운 것은 없었다. 남자와 만났던 6시 27분, 빠른 환승 5-3번 승강장. 남자는 저와 만난 두 번 모두 정확히 그 시간에 맞은편 승강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남자는 오늘도 그곳에 있었다. 제 예상이 어긋나지 않음을 안 기상호가 남몰래 주먹을 쥐며 기뻐했다. 다음날도, 다음다음 날도 그는 맞은편에서 기상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번의 경험으로 확신이 서자 기상호는 환승 통로에 쭈그려 앉아 시간을 허비하거나 부러 타야 할 열차를 보내며 만남을 성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기상호의 노력은 항상 최상의 결과를 불러왔다. 어느새 둘은 가볍게 손을 흔들던 사이에서 서로의 동작을 따라 하는 사이를 지나 타야 할 열차를 보내면서까지 몸짓과 입 모양 대화를 반복하는 사이가 되었다.

 

가볍게 시작한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의 입김으로 얼렁뚱땅 출발선에 섰건만 하루의 시작에 그 사람을 떠올리고 그 시간을 기다리다 찾아가고야 마는 성급한 마음이 멋대로 출발선을 뛰어넘었다. 출발선을 넘은 이상 기상호는 달려야 했다.

 

짝사랑은 서툰데…. 설렘이 땀에 묻어 새어나가면. 그래서 햄이 내 마음을 다 알아버리면 어떡하지. 그냥 철부지 애새끼로 보는 거 아이가…. 그 햄은 누가 봐도 직장인 같던데…. 그러니까 아직은 만나면 안 된다. 마음이 새어나가지 않을 만큼만. 딱 그만큼만 더 익숙해지면 그때는 내가 선로를 가로질러 가는 거야.

 

설렘을 씹어 삼킨 기상호가 소매로 손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무리 닦아도 사라지지 않는 물기가 전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꼭, 눈 오리가 된 것만 같았다. 냉동고에 넣어뒀다 잔뜩 녹아버린 그 눈 오리가. 사인은 정전이었다. 작년이 뭉친 올해의 첫눈은 단 10분도 버티지 못하고 물이 되었다. 갑자기 찾아온 이별에 눈물을 세네 방울쯤 보탰을까 다가온 엄마가 말했다.

“아이고. 눈 오리가 우리 상호가 억수로 반가웠나 보다. 상호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득 담고 있어서 이래 녹아내렸나 보네.”

 

녹아 없어지지 않으려면 차오르는 마음을 어떻게든 밖으로 꺼내야 했다. 그래서 기상호는 마음을 녹여 만든 몸짓을 전했다. 그러면 신기하게 상대마저 소리 없는 대화를 꾹꾹 눌러 전해왔다, 서로의 지하철이 역에 도착하기까지의 10분. 그 10분이 매일의 기상호를 부풀어 오르게 해 6시 27분의 기상호는 최선을 다해 마음을 뱉어내야 했다.

 

“햄. 내일 또 만나요.”

 

그리고 이틀 뒤인 목요일 6시 27분. 남자가 오지 않았다.

 

기상호는 초조해졌다. 저번 대화에서 오래 못 만날 거란 말은 없었는데. 혹시 햄이랑 내 사이가 선로 2개보다도 멀었나.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습니다.’ 문구처럼 수많은 선로가 우리 사이를 수놓고 있어서 헷갈린 거면 어쩌지. 그를 기다린 지 56분이 되었을 때 기상호는 조금 울고 싶었다.

 

만남이 파기된 다음 날, 기상호는 금공강을 무시하고 학교에 나갔다. 만남이 파기된 4일차, 기상호는 6시 27분 종로3가 5-3번 승강장 앞에서 꼬박 40분을 서 있었다.

 

 

스크린 도어가 열립니다. 발 빠짐 주의. 발 빠짐 주의.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으니 내리실 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만남이 파기된 지 일주일, 기상호는 관계를 포기했다.

 

그 햄 이제 다른 길로 가는 갑다…. 내가 마지막 인사를 잘못 봤나 보지. 기상호는 더 이상 일찍 일어나지 않았으며 전날 입을 옷을 고민하지도 않았다. 마침 조별 과제 때문에 6시 27분을 맞추지도 못하는데 참 잘된 일이었다.

 

불행의 양은 정해져 있다던데 무난하게 흘러가겠구나 싶던 수업에서 문제가 생긴 걸 보면 제 불행의 양은 무한대였나보다. 피피티를 맡은 사람이 경조사를 핑계로 펑크를 내 새내기와 기상호가 피피티에 뛰어들게 되었고 갑작스러운 피피티 일정은 귀가 시간의 연장을 불러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두 사람분의 이틀 치 여가를 갈아 만든 피피티가 훌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한 번에 하나의 시련만 주지 않았고…. 발표날이 밝았을 때 기상호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맞닥뜨렸다. 발표자가 발표 당일에 무단결석을 한 것이다.

 

수업 시작 10분 전 미리 피피티를 띄워둔 기상호는 새내기 한 명과 함께 나머지 팀원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수업 시작 5분 전 경조사놈이 걸어 들어왔으며 수업 시작 3분 전 발표자에게 15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캄캄한 미래를 직감한 기상호가 1층 프린터기를 향해 달렸다.

 

 

전원이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무사히 대본을 뽑아 단상에 올랐을 때는 수업 시작까지 고작 1분이 남아있었다. 열심히 숨을 고른 기상호는 정시에 맞춰 발표를 시작했고 최악의 조별과제는 발표자의 복장과 발표 주제에 따른 세부적인 목차가 아쉽다는 교수의 평가로 막을 내렸다.

 

하…. 차라리 그 햄이랑 만나기라도 했으면 이렇게까지 속상하진 않았을 텐데. 개노답도 나쁜 말이라고 사리던 옛날의 기상호는 사라졌다. 남은 건 지X견 기상호뿐이다. 지X에는 지X로. 기상호는 교수의 질문과 질타에 열심히 짖어댔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본래 발표자가 무단결석을 하는 바람에 제가 급하게 발표를 진행하게 되어 미숙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발표 주제에 관해서는….”

 

맞불 작전은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정신없어도 <긴급사항비밀문서>를 만들어 연습해 둔 덕분이었다. 어젯밤 침대에 누워 찬찬히 해야 할 일들을 지워나가다 느껴지는 위화감에 확인한 조별 과제 단체톡에는 최종 ppt 파일 읽지 않음 표시 1개가 떠 있었다.

 

결말은 뻔했다. 기상호가 침대에서 일어나 대본과 예상 문답을 쎄가 빠지게 정리해 두고 발표를 마쳤다. 하. 잘해야 C+ 받고 재수강할 뻔했네, 씨X…. 진짜 조상신이 도왔다 아이가…. 누나야 햄아 내 이제 진짜 집 가고 싶다….

 

기상호는 박카스 한 병을 원샷하고 도서관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피폐해진 정신을 되돌리려면 밀린 잠이 시급했다. 마침 다음 수업까지 2시간이나 남았겠다, 따뜻한 도서관에서 긴장한 몸이나 이완시켜야지. 기상호는 테이블 위에 엎어진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은 언제나 옳았지만 이번만큼은 틀린 것 같다. 8시 47분. 지금이 9시라니? 오늘 수업 하나를 통으로 재껴버린 셈이었다.

 

“미치겠다….”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온 기상호는 어둑해진 사위를 보며 다시 한번 절망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누나가 집에 없다는 건가…. 수업 짼 건 안 들킬 테니까…. 꺼내지 못한 마음에 조별 과제까지. 안 그래도 답답한데 이젠 환승역으로 가는 길목마다 숨겨둔 마음들마저 들러붙고 있었다.

 

이제 진짜 녹는 건가. 일주일 하고도 이틀에 조별 과제 땜빵이면 꽤 많이 버텼다 기상호. 꼴에 사람이라고 눈 오리보다는 강하네.

 

“햄 보고 싶다….”

 

“…어.”

 

저거 우리 햄 아이가. 뒷머리가 길고 목이 허연 게 딱 우리 햄 같은데. 술에 취해 비틀대며 계단을 내려온 사람이 습관처럼 5-3번 승강장 앞에 섰다. 가슴을 들썩거리며 크게 숨을 고르던 그가 이번에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누가 봐도 술에 진탕 꼴은 모양새였다.

 

하이고 이제는 아예 졸아뿌네. 눈을 감고 꾸벅거리던 남자가 그만 스크린도어에 머리를 처박았다. 스크린도어를 흘겨보던 남자가 그 너머에 서 있던 기상호를 발견했는지 매끈하던 눈매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아. 저 햄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구나. 그래서 이 순간이 그렇게 따듯하고 특별했구나. 남자는 기상호가 녹게 두지 않았다.

 

지금 동인천, 동인천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내리는 사람이 모두 하차한 다음 안전하게 승차하시기 바랍니다.

 

눈을 비비던 그가 황급히 기상호를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기다려.

 

덜컹거리는 전철 너머로 남자의 신형이 사라졌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드디어 만날 수 있다. 기상호는 가득 쌓인 마음을 빌어 열을 냈다. 햄, 제가 맞죠. 햄도 같은 마음이죠. 맞은편 선로에 제가 꼭 있어야 하는 거예요. 절 보러 건너올 거죠?

 

계단과 바닥을 맞대며 웃는 구두 소리가 들린다. 짝짝거리던 소리가 또각거리는 소리로, 적막으로 바뀌었다.

 

“…상호야! 나 많이 기다렸어?”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역시 기억 못 하는구나. 음…. 네 가방에 달린 강아지 키링 기억나?”

 

“어…? 이거요? 아니. 이거 준 사람이 햄이라고예?”

 

“응. 환승 계단에서 넘어졌을 때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네가 나 부축도 해주고 밴드도 사다 줬잖아. 자기 이상한 사람 아니라고 학생증도 보여주면서….”

 

“아….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그래서 그때 진짜 진짜 고마웠거든, 응, 근데 내가 그것만 주고 감사 인사를 제대로 못 했어. 근데! 네가 반대편에 있지 뭐야? 가방에 강아지 인형 달고. 그래서 계속 지켜봤는데에. 맨날 잔기스 가득한 파란 텀블러나 들고 다니고…. 허구헌날 주머니에서 abc 초콜릿 꺼내 먹구…. 무표정일 땐 날카로우면서 친구랑 얘기할 땐 강아지 같고…. 그래서 너랑 진짜 인사하고 싶었어 상호야아….”

 

“햄….”

 

“근데 아까부터 햄이 뭐야? 난 박병찬인데……. 박, 병, 찬. 그보다 상호야. 우리 빨리 나가자. 형아만 믿고 따라와라, 우리 상호!”

 

“…네? 아니 잠깐만요 햄! 아니…!”

 

입꼬리를 당겨 짓는 개구진 표정에 기상호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역 밖으로 끌려 나갔다. 9시를 훌쩍 넘긴 시간, 거리에 불 꺼진 점포들이 점점 늘어날 시간이었고 그건 돌담길을 따라 주욱 이어진 상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햄, 대체 어딜 가는데요?”

 

“…여기. 전에 회식할 때 와봤는데 돌담길이 너무 예뻐서 상호랑 같이 걸어보고 싶었어.”

 

“…저도 햄이랑 가보고 싶은데 많으니까, 오늘부터 하나씩 다녀보면 되겠네요.”

 

“상호야 그럼 공원부터 가자! 여기서 샛길로 들어가면 공원 나와!”

 

“네? 이 야밤에요? 아니 햄 술 마셨어요?”

 

“으응, 상호야아. 팀장 개X끼가 계속 먹이더라…. 근데 내가 더 많이 먹였으니까 괜찮아! 그러니까 나랑 공원 가자아. 형아 너랑 같이 공원 가고 싶어.”

 

“공원타도 안전귀가”를 외치던 기상호는 10초 뒤 자신이 공원에 입성했음을 알아차렸다. 애교 많은 연상은 무적이구나…. 벌써 세상을 배워가는 기상호였다.

 

“일루 와봐. 같이 춤추자! 나,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꼭 같이 춤춰보고 싶었어….”

 

“그치만 햄 지금 이미 9시도 넘었고 전 춤도 못 춘다고요!”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자, 손!”

 

뻗어진 흰 손이 기상호의 양손을 옭아매자 포근한 온기가 손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아까 이 노래 듣고 있었는데 네가 보여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어. 박병찬의 휴대폰에서 리드미컬한 드럼과 일리언 파이프가 합쳐진 정겨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반복되던 음이 확하고 터지며 후렴이 반복되는 순간 신나는 선율에 맞춰 열심히 등반하던 온기가 기상호의 심장에 박병찬의 감정을 쏟아 넣었다.

 

Said, "Baby, I just wanna dance"

With my pretty little Galway girl

You're my pretty little Galway girl

 

순식간에 차오르는 감정이 저와 같은 고온을 갖고 있어 기상호는 더 열심히 춤을 췄다. 만취자 하나에 몸치 하나. 최악의 조합이었지만 둘은 지쳐 비틀거릴 때까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요.”

 

“응…. 근데 상호야, 우웁…. 형 속이 안 좋다….”

 

…박병찬이 구토를 호소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공원 벤치에 앉아 조금 쉬니 박병찬의 안색이 차츰 나아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둘은 서로의 몰골을 보며 또 한바탕 웃어재겼다. 하하! 상호 왜 이렇게 못생겼어? 햄도 몬…몬생겼거든요? 머리에 붙은 나뭇잎이나 떼고 말하시죠! 한껏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박병찬이 툭 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실 상호한테 편지 쓰려고 연습했는데 잘 안 써졌어….”

 

”어, 어디다가요?“

 

”여기….“

 

상호야 너도 네 마음 잘 모르는 거 맞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걸리니까…. 게다가 우린 기껏해야 한 번 만난 사이잖아?

 

으 박병찬 이건 너무 찌질하다…!

 

내가 사람 틈바구니에서 거하게 엎어져서 절뚝거리고 있을 때 네가 밴드 한 통 사 들고 뛰어왔잖아. 이상한 사람 아니라고 학생증도 보여주고. 그때 진짜 고마웠어.

 

언젠가 다시 보면 꼭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는데 건너편 승강장에 네가 있는 걸 봤을 땐 정말 운명 같더라. 시골 강아지처럼 부스스한 갈색 머리카락에 검은 뿔테 안경, 왼쪽 눈 아래 눈물점까지 누가 봐도 너였어, 상호야.

 

너무 구구절절한 듯…. 이건 빼자.

 

먼저 인사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가 네가 날 이상한 취급하고 그때 괜히 도와줬다고 생각하게 될까 봐 조금 겁났던 것 같아. 그러지만 않았어도 너랑 더 빨리 친해지고 더 많은 추억들을 쌓았을 텐데.

 

스크린도어랑 철로를 사이에 두고 손을 흔들 때마다 아찔하더라. 꼭 네가 널 마주하기 위해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내가 네 또래였으면 너랑 인사하다 주저앉기도 했을걸…. ㅠㅠ

 

박병찬 진짜 찌질함의 극치…. 나이는 허투루 먹었나.

 

근데 상호야. 우리 이대로 시도조차 안 하면 영영 모르지 않을까? 이 사랑이 어디까지 솟아날지. 그러니까 나한테 티 좀 내주라 상호야, 내가 네 마음에 든다면 제발…. 나 혼자서만 사랑에 빠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냥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만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 박병찬 술 좀 깨자. 정신 차리자! 생각을 어떻게 읽어! 술 마실 때마다 네 생각 하기 싫은데 어쩌겠어.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상호야. 그냥 형이랑 사귀어 주면 안 될까? 아. 이건 너무 찌질한데…. 근데 우리 사이에는 분명 뭐 있다니까?? 나 혼자서는 싫어. 우리 상호가 당장 내 옆에 있어야 해. 너 없는 세상은 싫어…. 나 혼자서 사랑에 빠지기는 죽어도 싫단 말이야 상호야….

 

…내가 네가 그리던 사람과 다르면 어쩌지?

 

A4 뒷면이 꽉 찰 정도로 빼곡한 글들은 모두 기상호로 차 있으면서도 문단마다 미묘한 차이점이 있었다. 어떤 곳은 평소보다 반듯하게 써진 데 비해 어떤 곳은 잔뜩 휘갈겨져 있었는데, 마지막 문단은 특히 심해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이걸 햄이 쓴 거라고요?”

 

“왜…? 상호도 형아가 우스워?”

 

“아니, 누가 결재 서류 뒤에다 편지 연습을 하는데요….”

 

“기상호 너 손 치워봐. 지금 웃고 있지. 그거 결재 서류 아냐. 이면지란 말야….”

 

“아 안 웃어요! 큽…. 하 박뱅차이 이거 내 생각 마이 했나 봐요?”

 

“상호 생각이야 맨날 했지. 형아는 일해야 된다고 했는데 상호가 계속 들어왔잖아. 오지 말라고 해도 맨날 와놓고선 왜 물어봐.”

 

남자는 기상호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잘생겼고, 그리고 무엇보다 귀여웠다. 곰이랑 악수할 것 같은 덩치가 귀엽다니. 이건 상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물론 저를 보는 순간 신나서 인사하는 모습이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근데 왜 하필 결재 서류 이면진데요. 다른 데에다 하지….”

 

채근하는 듯한 말투에 박병찬이 한쪽 볼에 바람을 넣으며 삐친 티를 냈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고개까지 돌린 모습이 제대로 심술이 난 모양이었다. 기상호에게서 등을 지고 바닥만 노려보던 박병찬이 돌연 자세를 낮추며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당황한 기상호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기상호오! 일로 와서 귀 대봐.”

 

“?”

 

“…결재 서류 뒤에다 써야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 그래서 일부러 한 부 더 뽑았는데…. 근데 상호 바보야? 김부장님 들으시면 어쩌게 그걸 이 도로변에서 물어봐!”

 

기상호를 끌어다 앉히는 데 성공한 박병찬은 조잘대며 회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과장님은 술 먹이면서 얘기하면 어떻게든 잘 풀 수 있는데 부장님은 꼰대 그 자체라 툭하면 엠지세대가 어떻고 하며 트집을 잡는다는 거였다. 최근 상호와 만나지 못했던 것도 전부 부장님이 타 부서의 기세에 눌려 추가 업무를 받아온 탓이라 중얼거리던 박병찬이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상호야, 진짜 문제는 이거야. 상호는 아기잖아? 근데 나는. 나는, 아저씨야…. 출근하는데 옆집 대학생이 아저씨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더라…. 어쩌지. 다른 건 네 취향대로 다 고칠 수 있어도 나이는 고칠 수가 없는데….”

 

“큽…. 아 이 아저씨 안 되겠네! 아저씨. 자기 비하는 나중에 하시고 저 좀 봐봐요.”

 

“…나 상호한테도 아저씨야?”

 

“아이고…. 이 아저씨가 술 취해가지고 기씨 가문 대를 끊을라고 작정을 했는갑다.”

 

“뭐? 상호 외동이야?”

 

“제가 외동이긴 하죠. 근데 형이랑 누나 다 있는 외동 막내.”

 

“막내…? 그럼 상호 형아한테 장가올 수 있어? 진짜? 정말로?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할 수 있어?”

 

“어휴. 당연하죠! 이리 내봐요.”

 

얌전히 손을 내밀며 저를 올려다보는 박병찬에 기상호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공기 중에 퍼지는 웃음소리에 박병찬은 절로 입술을 죽 내밀고 불퉁한 얼굴을 한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기상호가 허리 숙여 박병찬의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4…3……2….

 

하나둘 접히던 손가락이 마침내 새끼손가락 하나만을 남겼을 때 기상호는 제 새끼손가락을 걸어 잠그며 말했다.

 

“아저씨. 우리 연애부터 시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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