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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여

@gayzapangi
구사팔

네임버스

- 양키X너드

- 주의: 약간의 유혈묘사

 

 

 

파아란 하늘.

 

낮에 일어나 움직인 게 며칠만이지? 박병찬은 쨍하고 눈을 찔러오는 햇빛에 가벼이 눈을 찌푸리다가 손으로 작은 그늘을 만들었다.

 

하여간. 잔챙이들을 처리하지 못하는 걸 보니 조형은 아직 풋내기투성이가 틀림없었다. 뭐…. 아직 어리니 당연한 건가.

그는 발치에서 움찔거리는 덩어리를 태연한 얼굴로 걷어차고는 신발에 묻은 붉은 액체를 땅바닥에 스윽 닦아내며 생각했다.

 

다 클 때까지는 동생들을 지켜주는 게 ‘형아’의 역할이니 어쩔 수 없지. 자신이 없으면 제대로 굴러가는 게 없다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는 것 치고는 꽤나 기꺼운 표정으로,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전히 덩어리들은 그의 발치에 있는 상태였다. 덩어리들은… 아니, 피투성이로 쓰러진 사람들은 앓는 소리만 내뱉으며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파한다는 이유로 전부 용납해주면, 애초에 패싸움 같은 건 시작도 안 했겠지. 안 그러냐? 그가 누군가의 머리를 지르밟았다.

 

“깡도 좋아. 고작 이 정도면서 덤벼들고….” 기어가는 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아래를 응시한 그가 말했다.

“다시는 우리 영역에 발 디딜 생각 마. 그때는 이 정도로 안 끝나니까.”

 

그러고는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처참한 상태의 이들을 내버려 둔 채로 뒤를 돈다. 그가 뒤를 보인다 한들 감히 누군가 그를 위협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안다는 듯이. 누군가의 두려움을 사기에는 충분한 자신감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쉬이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지상 고등학교의 모범생 기상호였다. 이곳저곳에서 내로라하는 이들은 발 한 번에 물려버리면서 어째 제 옆에서 낑낑거리는 기상호에게는 쉽게 굴 수 없었다.

박병찬은 기상호 앞에서 유독 유하게 굴었다. 무척 비정상적이기 짝이 없는 기이한 상황이지 않은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모두에게 친근하나 그 누구에게도 너그럽지 않은 박병찬과 편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포함한 모두가, 박병찬의 한 사람만을 향한 유연함에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아주 가끔, 알 것 같기도 했다. 정확히는 속 한구석의 기묘한 짐작에 가까웠지만.

 

아마도 그건…….

 

“병찬 햄. 뺨에 피…….”

“아, 상호구나. 으음~ 이거 내 피 아니야. 뭐, 안에 봤으면 알겠지만.” 그가 붉게 물든 골목 안을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기상호의 얼굴에 약간의 거북함이 물들었다.

 

“왜. 무서워?” 박병찬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맞췄다. 기상호의 대답 같은 건 듣지 않아도 알았다. “아, … 아녜요.” 붉어진 볼과, 눈을 맞추려고 얼굴을 가까이하면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려 피하다가도 힐끗,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건 동정일 것이다. 박병찬이 기상호에게만 유독 너그러운 이유는, 인간이라면 지당하게 가져야 할 동정이었다.

 

“그럼 멋있어서? 막 이름이 찌릿찌릿하고 그런가.” 그가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기상호는 박병찬의 이름을 가진 네이머고, 불가항력적으로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설령 그가 기상호에게 잔인하게 굴어도 그는 박병찬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박병찬은,

 

“이름은 아니고, 심장은… 쪼까 떨리는데.”

 

… 기상호를 동정했다. “아, 그래?” 그가 애매한 미소를 지우며 한 발자국 떨어졌다. 하여간 겁 없는 꼬맹이. 사랑한다고 한들 이렇게 저돌적일 수가 있나? 고작 외네이머 주제에.

 

그래. 기상호는 외네이머고, 박병찬은 노네임이었다. 네임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래서 기상호 같이 공부만 하느라 싸움 같은 건 접해본 적도 없는 범생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랑할 생각조차 없는 노네임. 그는 기상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저 운명이니 뭐니, 말도 안 되는 현상에 휩쓸려 자신을 사랑하게 된 어린아이로 보일 뿐이었다.

 

불쌍하긴. 박병찬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다가 자신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기상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사랑은 무슨. 그에게는 과분한 단어였다.

 

“병찬 햄, 병찬 햄. 오늘, 어, … 저랑 데이트하실래요?” 약간의 쑥스러움은 담고 있지만 자신이 거절당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하는 사람처럼, 직설적인 태도로 물어오는 기상호에 박병찬은 순순히 “… 그래.”라고 대답했다. 이 허락도 고작 동정에서 나오는 것뿐이리라. 적어도 박병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기상호는 내내 건방졌다. 그 외의 단어로는 차마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겁도 없이 그에게 붙어왔고, 웃어댔으며, 너무나도 쉽게 다가왔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골목에서의 싸움 같은 건 한여름 밤의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그를 보고, 배알이 꼴리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상호야. 넌 형이 안 무서워? 그렇게 묻고 싶은 순간도 계속해서 찾아왔다. 매번 눈도 못 마주치고 달달 떠는 사람들만 마주해온 박병찬은 기상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지, 남을 해친 자가 자신을 해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걸까. 그의 발치에서 꿈틀거리는 덩어리가, 기상호 자신이 될 거라고는……. 박병찬은 주먹을 꽉 쥐었다. 머리가 눈밭처럼 새하얗게 변한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 박병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그가 기상호를 눈에 담았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벼이 흔들린다. 눈 밑의 점이 선명하기 짝이 없다. 언뜻 눈이 마주치고, 기상호가 눈부시게 웃는다.

 

박병찬은 기상호가 발치에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고작 발치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냥 기상호가 피로 물든 덩어리가 되지 않기를, 더 나아가 누군가에 의해 아프지 않기를, 그를 괴롭게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설령 자신이 입히는 상처라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박병찬은 제 첫사랑이 기상호임을 인정했다.

 

좋아하는 거구나……. 내가, 상호를.

박병찬은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그를,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신이 거절당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는 기상호를,

운명이 제 이름을 새긴 이를, 좋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묘한 울림이 몸속을 맴돌고, 가슴이 부풀어서 터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운다. 이게 좋아한다는 감정이었구나. 한낱 동정이 아니라, 이게 사랑이었구나……. 입 안에서 어색하게 구르는 사랑이라는 발음을 박병찬이 겨우 내뱉었다.

 

“상호야.”

우리, 사귈까.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어조와는 다르게 귓불은 새빨갛다. 기상호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샐쭉 웃었다.

 

“글쎄요.” 장난스러운 대답과 함께 그를 툭 친 기상호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며 박병찬의 걸음을 추월했다가, 이내 뒤돌아본다.

 

“햄, 절 좋아해요?”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어쩐지 애처롭다. 마치 “좋아해.”라고 이야기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간절한 시선이라, 박병찬은 기꺼이 그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했다. 깨달은 지 고작 일 분. 하지만 확실하게 좋아한다.

 

기상호는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간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도 씁쓸한 얼굴로 박병찬에게 제 손목에 적힌 글씨를 보여준다. 몇 번이고 본, 익숙한 글씨로 쓰여있는 제 이름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전 네이머예요.” 그리 말하는 기상호의 얼굴은 힘겨운 듯 보였다.

“알아.”

“병찬 햄은… 제 이름이 없죠.”

박병찬의 혀끝이 씁쓸했다. 기상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그렇게 고대하던 그의 고백에도 기꺼이 승낙하지 못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네이머는 상대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죽게 될 수도 있고, 강렬한 감정은 동화되기까지 한다. 목숨을 인질로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굴레에 빠진 것이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그래,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그가 지독한 범죄자여도, 악취미를 가진 사람이어도, 하다못해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네이머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네이머는 절대 을이다. 하물며 세상에 2.16%밖에 없다는 외네이머인 기상호에게는 사랑이 얼마나 잔인하겠는가.

 

“병찬 햄은 좋은 사람이니까, 나한테 모질게 굴지 못할 거라는 건 알아요.”라고 말하고는, 그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네이머가 아니잖아요. 나는 평생 햄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데…… 햄은 그러지 않을 수 있잖아요.”

 

기상호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박병찬은 알았다. 그건 거의 직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증명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설령 그가 기상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더 나아가 사랑한다는 사실을 방금 알아냈는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박병찬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박병찬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을 쉽사리 마음에 담지 않는 그가 사랑을 느꼈는데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말이다.

 

“상호야.” 그가 기상호의 손목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형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목소리가 한참을 허공에 머무른다. “얼굴에 타투라도 할까? 잘 보이는 곳에 기상호라고 새길까. 아니면,” 그의 눈동자가 으슥한 거리를 훑는다. 돌, 아스팔트 사이로 피어난 들꽃, 자갈과 바닥을 뒹구는 못……. 박병찬이 발밑에서 구르는 못을 주웠다.

 

그러고는 끝이 무뎌져 버린 못으로 팔에 이름을 새긴다. 기, 상, 호. 팔에 새겨진 이름은 꽤 멀리서도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운명 그거, 새기면 되는 거지.” 박병찬이 기상호를 바라보 며 말했다.

 

기상호는 그의 운명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리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까마득한 시절, 그가 박병찬에게 불그스름한 얼굴로 다가와 조잘조잘 말을 걸었을 때부터, 그때부터 그들은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우리는 운명이겠지. 그가 기상호의 손목에 입 맞췄다. 그러고는 여상스레 “어때, 상호야.” 하고 덧붙인다.

 

그제야 확신을 얻은 듯한, 안심한 기색이 만연한 채로 웃은 그가 박병찬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좋아해요. 사귀어요, 병찬 햄.”이라며 잔뜩 행복할 웃음을 짓는 기상호에 박병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찬가지로 웃었다.

그래. 좋아해.

 

박병찬의 목뒤에 있는 기상호, 라는 세 글자는 오직 기상호만이 알고 있는 비밀로 남은 채 첫사랑에 이름을 붙인다.

그가 자신이 무통증 네이머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조금 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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