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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얘기해주세요!

@parut_10010110
​파릇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주세요!’ 그에 대한 병찬의 대답은 항상 단호한 ‘안 돼’였다. 그는 저를 향해 일제히 야유를 보내는 학생들을 뒤로한 채 덤덤하게 교무실로 향했다. 내가 그걸 너희한테 말했다가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날 일 있니. 그런 일들이 매번 똑같은 래퍼토리로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첫사랑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병찬은 자신의 자리에 1학년 학생 명단을 올려놓은 뒤 곧바로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인 두 선생님이 나누는 대화를 얼핏 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애들은 올해도 첫 수업 들어가자마자 바로 첫사랑부터 물어보더라고요. 신원조사라도 하려는 건지 뭔지.”

“원래 이맘때 애들이 다 그래요. 단체로 김종욱 찾기라도 하려나 보지 뭐.”

“에이, 수영 쌤. 요즘 애들은 그런 거 잘 모를 걸요.”

“그런가?”

병찬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다음 수업을 가기 위해 이동하는 선생님들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딱 한 달만 지나면 전부 잠잠해질 것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매번 진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4교시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점심까지 남은 시간 동안 잠깐 눈이나 붙이다가 밥을 먹으러 갈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상호 오늘 4교시에 수업 있던가. 병찬은 상호와 나누었던 문자 메시지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가 보냈던 시간표를 확인했다. 수요일 4교시에는 과학실에서 수업이 있었다.

못 자겠네. 그는 미련 없이 덮어두려던 핸드폰을 다시 손에 들었다. 병찬은 ‘상호’라고 저장되어 있는 인물과의 대화를 재차 돌아보더니 쉼 없이 흘러가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쉼 없이 흘러가는 중이라고 말했지, 빠르게 흘러간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눈치도 없이 느긋하게 지나가는 시간이 병찬의 긴장을 더욱 가중하는 것 같았다.

[상호쌤]

[수업 언제 끝나?]

병찬은 짧은 문자를 보내놓고는 시계를 들여다봤다. 평소에는 잘 떨지 않는 다리가 오늘따라 요란하게 떨렸다.

언제 끝나긴. 길어봐야 앞으로 5초 뒤면 끝나겠지. 병찬이 그 생각을 끝마치자마자 4교시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교무실 안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교사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지만 병찬은 여전히 초조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병찬은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가 무섭게 ‘상호’와 대화를 나눈 채팅창을 켰다. 다른 사람이 보낸 문자라는 참으로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겠지만, 병찬의 직감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방금 끝났어요]

나도 알아. 근데 조금만 더 빨리 마칠 수는 없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병찬은 차마 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키며 묵묵히 문자를 남겼다. 상호의 앞에서는 되도록 어른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바람과는 달리 이미 대학을 다니며 헐렁한 면모들을 상당수 들켜버린 것 같기는 했지만.

[점심 나랑 같이 먹자]

아무리 나이로 계란 한 판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지만 첫사랑 앞에서 침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병찬은 상호의 알겠다는 답장에 핸드폰 하나만 손에 쥔 채로 황급히 교무실을 나섰다. 그는 1학년 교무실에 잠시 들러야 한다는 상호의 답장에 활발한 강아지 이모티콘 하나로 답했다.

병찬은 일제히 교실을 뛰쳐나오는 학생들 사이에 우두커니 선 채 상호를 기다렸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시끄럽게 인사를 해도 그게 귀로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1학년 교무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선 끝에 익숙한 실루엣이 잡히자 바로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지 않고 있던 것처럼 굴었다. 병찬이 아는 한 저렇게 체격이 좋은 교사는 올해 새로 부임한 통합과학 담당 기상호뿐이었다. 대학을 다닐 때도 같은 체교과 사람들을 제외하면 가장 몸이 좋은 편이었다.

상호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린 후 병찬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부임한 지 한 달도 안 됐다고 답지 않게 단정하게 차려입은 차림새가 아직은 제법 낯설게 느껴졌다.

“상호쌤, 왔어?”

“아, 네. 제 자리에 수업 자료 좀 두고 오느라 늦었어요. 점심 먹으러 가요.”

급식실로 향하기까지는 병찬이 앞장을 섰다. 둘은 평소보다 몇 배는 차분한 말투로 대화를 나눴다. 학생들 앞에서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교사로서의 사소한 신념 비슷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병찬은 팔짱을 낀 채 줄을 선 상호의 어깨를 팔로 툭툭 쳤다. 한창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상호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잔뜩 긴장한 채 차분하게 구는 모습을 보니 괜한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기상호, 이제 진짜 선생님 같은데?”

“무, 무슨 그런 말을 다 해요!”

“그냥.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고.”

능청맞게 답하는 병찬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상호가 머쓱하다는 듯이 목덜미를 문질렀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한껏 찌푸린 눈에 준 힘이 풀렸다. 여기서 더 말을 해도 들어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차라리 말을 아끼는 것이었다.

“그러는 햄도 발령 난 지 얼마 안 됐으면서.”

“나 그래도 상호 너보다는 연차 높다?”

“……네. 그렇죠.”

항상 장난에 걸리기만 하는 것이 내심 불만스러웠기 때문에 일단 뱉어보기나 한 말이었다. 그래도 막상 상대방이 분명한 사실을 앞세우니 뭐라 반박할 만한 말이 없었다. 기상호는 꽤나 많이 뻔뻔한 편이었지만 병찬의 앞에서 냅다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부릴 깡은 없었다.

더는 마땅히 받아칠 말이 없어진 상호가 먼저 입을 닫았다. 병찬은 그런 그의 여전한 모습을 보며 새삼 안심했다. 한참 동안 연락이 뜸하다가 같은 학교에서 교사로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처음에는 어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보다는 반가움이 훨씬 컸다. 다행히도 그건 상호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실없는 대화를 몇 마디 나누었더니 아까의 긴장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표정 위로 몹시 익숙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병찬은 그런 상호를 보며 나란히 웃지 않는 방법을 몰랐다.

식판에 음식을 한가득 받아 자리에 앉으면서도 두 사람의 대화는 끊이질 않았다. 정확히는 평소보다 묘하게 들뜬 병찬이 쉬지 않고 화제를 끌어올렸다고도 볼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기말 준비 시작하겠네?”

“사실 지금 과학 과목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벌써 상의 중이에요.”

병찬은 덤덤하게 말하는 상호를 숙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병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상호가 엄지를 들어 올리며 해탈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자신보다 교사 생활을 오래 한 다른 교사들이 많이 도와주고는 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햄도 곧 바빠지겠네요.”

“응? 나는 시험 때 다 돼서 감독만 보면 끝인데?”

잠시간 병찬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상호가 이윽고 배신감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지필고사 과목에 체육은 없었다. 상호는 곧 병찬이 체육 과목 교사임을 간과하고 있던 자신의 기억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병찬은 머쓱한 듯이 웃기만 했다.

“이런 말 햄한테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체육 되게 꿀이네요.”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지나치게 솔직한 병찬의 대답에 상호는 웃음을 미처 참지 못했다.

“상호 너도 체육으로 갔어도 어울렸을 것 같은데.”

“에이. 저는 꼼수를 잘 썼던 거라 애들 가르치는 건 힘들었을걸요.”

병찬이 상호의 말에 대답하려는 순간,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병찬과 상호 둘 다 5교시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둘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식판을 정리했다. 타이밍 한 번 뭣 같네. 병찬이 먼저 식판을 정리하는 상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정신’, ‘정신적 사랑’ 이들 모두 벚꽃의 꽃말로 알려진 말들이다. 그러나 상호는 창밖에 흐드러진 벚꽃을 바라보며 눈을 반쯤 감았다. 시험지를 손에 쥔 학생들이 온갖 불만들을 토로하고 있을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벚꽃이 피고 지는 동안 상호는 거의 모든 시간을 노트북 앞에서 보냈다. 시험 문제는 대부분 추려졌지만 오류나 오타 등을 확인하는 것이 제법 까다로운 과정이었다. 문제에 오류라도 있으면 난 진짜 죽는다, 그런 생각으로 꼼꼼하게 노트북을 들여다봤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벚꽃을 보며 낭만이 아닌 중간고사 걱정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하게 다가왔다.

상호는 기나긴 검수 과정을 거친 끝에 비로소 인쇄가 완료된 시험지를 내려다보며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것들 덕분에 한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그는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턱을 괸 채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는 별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조만간 흔적도 없이 모조리 낙하해 버릴 꽃잎들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호 쌤, 지금 가요?”

옆자리에서 조용히 짐을 챙기는 상호를 지켜보던 교사가 나지막이 물어왔다.

“아, 네. 중간 준비도 다 끝났으니까 이만 들어가 보려고요.”

“어휴, 처음부터 고생했네. 조심히 들어가요.”

“네.”

상호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동료 선생님을 경이롭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교무실을 나섰다. 성인이 되고 나서 서서히 체감하게 된 말 중 하나가 웃고 있는 사람이 진짜 광기를 품고 있다는 말이었다.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험상궂은 사람보다 일하는 순간에도 웃어 보이는 사람만큼 두려운 존재도 없는 것 같았다.

부쩍 따뜻해진 바람 사이로 은은한 꽃향기가 불어왔다. 그러나 이번 봄은 답지 않게 날씨가 쉽게 올라가지 않아 아직 뺨이 시려오기는 했다. 상호는 자켓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으로 손을 뻗었다. 핸드폰 화면 위로 ‘병찬햄’이라는 짧은 저장명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간 목을 가다듬은 뒤 통화가 연결된 핸드폰을 귀에 댔다. 어쩐지 목에 꽃가루라도 한 움큼 걸려버린 느낌이 들었다.

“여보세요?”

“상호야. 지금 집 들어가는 길이야?”

“어떻게 알았어요?”

상호가 기가 막힌 타이밍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교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눈에 담자마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상호의 앞에는 한 손을 귀 옆에 댄 채 다른 손을 그에게로 흔들어 보이는 병찬이 있었다. 어쩐지 타이밍이 너무 잘 맞더라니.

상호가 걸음을 재촉하며 병찬의 앞에 섰다. 신기하게도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꽃샘추위가 조금 약해진 것만 같았다.

“먼저 퇴근한 거 아니었어요?”

“아까 8시쯤이면 퇴근할 것 같다며. 체육관에서 애들 좀 봐주다가 왔지.”

분명 대답을 해주기는 했었지만, 병찬이 마중을 나와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실 시험 문제에 신경을 쓰느라 다른 생각들이 끼어들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더 가깝기도 했다. 상호는 황당함과 약간의 머쓱함을 뒤로한 채 병찬과 나란히 길을 걸어갔다.

서늘한 바람에도 교복을 입은 채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옆 학교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굳게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학생들 중에는 밑에 체육복을 받쳐 입은 아이들도 있었다. 병찬과 상호를 본 아이들이 몸을 흠칫 떨더니 저들끼리만 들리는 소리로 무어라 속삭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이 옆 학교 교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직도 애들이 첫사랑 물어봐요?”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궁금했던 것 같다. 얼마나 웃었는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봐서였을까. 이제 새 학기가 시작된 지 꼬박 한 달도 더 됐는데, 설마 하는 생각도 있었다. 병찬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니만큼 장난처럼 물어보는 아이들이 종종 있을 것이었다.

“……아까도 애들이 첫사랑 얘기 꺼내려고 해서 운동에나 집중하라고 하고 오는 길이야.”

병찬이 진심으로 넌더리가 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오죽하면 저렇게 반응할까 싶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대놓고 화를 낼 타입은 아니어서 끈질긴 아이들이 몇몇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최대한 웃음을 참으며 길에 난 화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버스 정거장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건 또 처음이었다.

정거장 앞에서 걸음을 조금 늦추던 병찬이 곧장 벤치에 앉은 상호의 앞에 섰다. 뭔가 말하려는 게 있는 것 같았기에 상호는 아무런 물음도 건네지 않고 조용히 그를 기다렸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반투명한 꽃잎이 형체를 갖추던 모습이 지금도 퍽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상호야. 중간고사 다 끝나면 같이 벚꽃 보러 갈래?”

그 순간에 불어온 바람이 너무나도 상쾌했다. 상호는 그 감각이 어떤 것인지 쉽게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다만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으나, 어딘가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시험 끝나면 꽃 다 떨어졌겠는데요……?”

아, 시험 끝나고 애들 성적 산출할 생각에 울렁거렸나 보다.

학생 때와는 달리 시험 전후로 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 같았다. 하나하나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상호가 지나치게 진지한 어투로 되묻자 병찬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초조함에 생각이 짧아졌던 자신이 웃기기도 했고, 쓸데없이 진지한 기상호가 눈치를 살피는 것이 웃기기도 했다.

“벚꽃 져도 가자.”

음, 이건 너무 직설적인가. 잠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병찬은 금세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지금 상황에서 애써 웃지라도 않으면 매우 민망해질 것만 같았다.

상호는 멀뚱한 얼굴로 병찬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가끔 무표정을 짓고 있는 기상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자연스럽게 별다른 의미가 있지 않은 경우도 잦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상호가 첫 음을 조금 끌며 천천히 대답했다.

“네. 같이 가요.”

약간 붉어진 듯한 얼굴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 걸까. 무척 궁금하면서도 당장 물어보기에는 어딘가 망설여졌다. 혹시라도 김칫국 마신 거면 어떡해. 어른이 되어버린 입장에서는 조금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궁금증이었다.

 

어째서 시험 기간만 되면 시간이 이렇게나 빠르게 흘러가 버리는 걸까. 상호는 어느덧 중간고사의 마지막 날이 찾아온 것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행히 상호가 낸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들도 없었다. 이제야 부산스럽던 첫 시험이 곧 끝이 난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상호는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에 불현듯 머릿속에 그려진 사람을 지워내려 고개를 좌우로 휘저었다.

1교시부터 시험 감독 들어가는데 벌써부터 다른 데 정신 팔리면 어떡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우선 제대로 행하고 봐야 했다. 특히 업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상호는 벽에 걸린 시험 감독 표를 꼼꼼히 확인한 뒤 1학년 3반의 봉투를 찾았다. 봉투가 이미 제자리에 없는 것을 보면 다른 선생님이 먼저 가져간 모양이었다. 그는 시작 시간에 늦지 않도록 서둘러 걸음을 내디뎠다. 세상일이 제멋대로만 흘러갈 수는 없다는 것을 새삼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상호 쌤. 내가 OMR 확인할 테니까 시험지 좀 배부해 줘.”

“네.”

조용한 교실 앞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자 꽤 긴 시간 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학생들 사이의 병찬이 눈에 들어왔다. 상호와 눈이 마주치자 곧 병찬이 들고 있던 시험지를 내려놓고 볼펜을 손에 쥐었다. 상호는 자신의 걸음을 조금 재촉하며 교탁 밑에 핸드폰을 두고는 익숙하게 시험지를 배부했다.

학생들이 모두 시험지를 받은 것을 확인한 상호가 교실 뒤편으로 가서 섰다. 때마침 병찬도 OMR 카드 확인이 전부 끝난지라 교탁으로 걸음을 옮겼다. 볼펜을 교탁 위에 두고 팔꿈치를 아슬아슬하게 기대었다. 병찬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교탁 안에 놓인 지금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을 발견했다.

“이거 누구 꺼야?”

새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핸드폰을 손에 든 병찬이 문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순간 고요하던 교실 안이 어수선해지더니 곳곳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들 중에서 손을 들지는 않았기에 의아해하던 병찬이 설마 하며 상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요.”

상호가 키 높이 책상에 상체를 기댄 채 머리 위로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인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병찬은 사무치는 민망함을 애써 뒤로하고 교실 문을 도로 닫으며 교탁 안에 상호의 핸드폰을 넣어두었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아이들도 금방 처음처럼 조용한 공기를 유지했다.

병찬은 종료령이 울림과 동시에 아이들에게서 OMR 카드를 거두고 교실 문을 나섰다. 오늘따라 마킹 실수를 한 아이들이 적어서 그동안 마음을 조금 정리할 수 있었다.

병찬은 상호가 제 뒤를 따라 교실을 나오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로 단번에 고개를 돌렸다. 상호가 의아해하는 눈치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핸드폰 바꾼 거 왜 말 안 해줬어?”

병찬은 앞선 50분 내내 자신이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을 물어보았다. 뒤이어진 상호의 대답은 병찬이 두 손을 들어 올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번호를 바꾼 것도 아닌데 굳이 말하고 다닐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그야말로 논리적인 한마디였다. 하긴, 그저 친한 형 동생 사이에 모든 일을 토씨 하나 빠짐없이 알려주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상호의 담담하고도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그 생각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상호한테 난 그냥 친한 형인 건가.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자꾸만 욕심과도 닮은 바람들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병찬은 상호의 표정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어째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싱숭생숭한 사람이 둘로 늘어버린 것만 같았다. 주어진 일을 하면서 다른 데 정신이 팔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은 교시 동안은 조금 멍해졌던 것이 아직도 기억나고는 한다. 상호는 지금도 그때 1교시 외의 다른 감독이 없었던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있었다면 아마 크든 작든 실수를 범했을 수도 있었을 상태였다.

학생들이 점심을 먹고 귀가를 하는 와중에도 상호는 교무실에서 컴퓨터를 붙잡고 있었다. 2교시부터 최대한 마음을 다잡고 학생들의 성적을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오늘 안으로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

잠잠하던 상호의 핸드폰이 큰 소리를 내며 진동을 울렸다. 큰 벨소리가 생각지도 못한 때에 울렸기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교무실 안은 상호뿐이었다. 그는 그 사실에 내심 안심하며 제 핸드폰 화면을 뒤집었다. 오늘 하루 종일 상호를 심란하게 만들었던 사람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말았다. 상호는 자신이 무척이나 재빠르게 병찬의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지만 부러 태연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것 때문에 도로 더 티가 날 것 같다는 생각은 뒤늦게 그를 찾아왔다.

상호야. 병찬이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긴장이 돼서 미칠 것 같았다. 상호는 결국 제 이름이 들리자마자 병찬의 말을 전부 기다리지 못하고 선수를 쳤다.

“오늘 벚꽃 보러 안 갈래요?”

병찬이 당황했다는 것이 수화기 너머까지 단번에 전해졌다. 상호는 새빨갛게 익어버린 얼굴을 책상 안으로 숨기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교무실 안에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고개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그럼에도 큰 덩치가 마법같이 숨겨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저번에 벚꽃 다 떨어져도 같이 보러 가자고 했잖아요.”

애들이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아직 다 떨어지지는 않은 모양이더라고요.

……안 돼요?

병찬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작은 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식으로 말해야 좋을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하던 병찬은, 결국 제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내뱉고 보기로 결정했다. 언제는 내가 네 앞에서 완벽했던 적이 있었던가. 문득 병찬은 상호의 앞에서까지 완벽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데리러 갈게.”

지금껏 굳혀왔던 복잡한 생각들이 요란하게 변동하는 순간이었다.

 

우선 대뜸 만나고 봤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병찬은 제 옆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상호를 연신 흘깃거렸다. 고개가 반대로 돌아가 있기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채기가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벚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선선한 바람이 후끈거리는 뺨을 집요하게 스쳤다. 이 바람도 조만간 꽃샘추위의 기세가 꺾이고 나면 볼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병찬이 다 떨어져 가는 벚꽃을 올려다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도 상호랑 있을 때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해 봄은 유난히 겨울과 가까웠다. 그날은 병찬이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벚꽃을 본 날이었다. 크고 작은 걱정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뒤숭숭한 마음으로 교정을 걸었었다. 관리할 때가 되었는지 느리게 깜빡거리는 가로등. 오전 사이에 내린 빗물에 흠뻑 젖어 떨어져 내린 벚꽃잎들. 그 사이에 상호가 서 있었다. 병찬은 그날 상호를 만났던 것을 지극히 우연적인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햄만큼 끈질긴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런 걱정을 다 해요.’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그 투박한 격려가 그땐 왜 그렇게도 가슴속에 와 닿았던 것인지. 같은 말을 들어도 상호에게서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병찬은 곧바로 인정하고 말았다. 병찬은 상호를 좋아하고 있었다. 일평생 연애라고는 생각조차 해온 적이 없었던 그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첫사랑이었다.

그 후로 몇 년이 흘렀고, 병찬은 상호가 제가 일하고 있는 학교로 발령이 났다는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간만에 상호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아서 간단한 축하 인사로 때울 수밖에 없었던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병찬은 추억을 잠시 접어둔 뒤 제 옆에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상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고도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기에 그는 순식간에 상호를 앞질러 그의 앞에서 멈춰 섰다. 상호가 필수적으로 병찬의 시선을 피했으나 제 표정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병찬은 천천히 익어가는 상호의 얼굴을 마주 보며 이 상황이 몹시도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마워.’

그날 어두운 밤하늘과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에 있던 상호를 다시금 자세히 떠올렸다. 상호는 그날도, 지금도 병찬의 시선을 느낄 때면 삽시간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걸 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걸까. 병찬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상호의 손을 잡았다.

“상호야. 내 첫사랑은 너야.”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너는?”

잠자코 병찬의 말을 듣고 있던 상호가 비로소 그와 눈을 맞추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병찬은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는 자꾸만 제멋대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삼켜내며 지금 가장 묻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상호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주세요.”

병찬이 붉게 물든 미소로 한 마디씩 또박또박 내뱉었다. 상호는 병찬에게 잡힌 제 손과 그의 미소를 재차 번갈아 보며 알맞은 답을 골랐다. 고심 끝에 상호가 표현한 말은 곧 짧은 입맞춤으로 대체되었다.

상호는 어린 시절에 농구를 했지만 고등학생이 되며 관두게 되었다고 했다. 그건 병찬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대학생 시절의 병찬이 상호에게 먼저 다가갔던 것도 농구를 했다는 과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터무니없이 단순했다. 더 이상 농구를 해도 즐겁지가 않게 되었다는 것. 이후 상호는 다른 아이들처럼 의자에 앉은 채 입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공부는 따분했지만, 좋아하는 일이 즐겁지 않아지던 순간보다는 나았다.

상호는 그러다 우연히 고등학생이던 병찬의 경기를 보러 가게 되었다고 했다. 분명 벤치에서 다른 선수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시절처럼, 책상 위의 책과 씨름을 벌일 때처럼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상호는 그날 이상하리만치 거센 고동을 느꼈다. 그는 그날을 계기로 쳐다도 보지 않았던 농구공을 다시 한번 두 손 가득 쥐어보았다. 그게 상호가 병찬과 같은 대학에 진학하고자 결심한 계기였다. 어쩌면 상호의 첫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몰랐다. 둘 중 그 어느 누구도 인식하지 못한 채, 고요하고 은밀하게 말이다.

지금의 우리가 아무리 서로를 사랑한다고 해도 영원히 ‘우리’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수는 없겠지. 아무리 내가 너의 첫사랑이 되었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는 없을 수도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만은 곁에 있고 싶어지는 것이 첫사랑이라는 얄미운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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