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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병은 사랑을 싣고

@ k_basket__

땅거미가 저물어갈 무렵, 매캐한 연기와 강렬한 고기 냄새가 가득한 공간 안에 사람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메뉴판에 적힌 메뉴는 딱 두 가지, 삼겹살과 오겹살. 단출하다 못해 황량한 차림표에 비해 훌륭한 맛과 착한 가격으로 준향대학교 인근에서 유일하게 손꼽히는 식당이었다. 여전히 왕성한 먹성을 자랑하는 한창때의 운동선수들에게는 모임 장소로 이 식당만 한 곳이 없었다.

이제는 어느덧 품이 익숙해진 퍼런 잠바의 매무새를 가다듬은 상호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당에 들어섰다. 코끝을 자극하는 기름진 냄새와 희뿌연 연기 사이로 여전히 익숙한 뒷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둥그런 테이블 위에 초록색 병이 하나둘 놓여있는 모양새를 본 상호가 서둘러 자리로 다가섰다.

 

“햄들요…. 저 왔어요.”

“님! 너무 늦은 거 아님? 벌써 소주 따기 시작했음! 얼른 앉으삼.”

 

이번 모임 장소는 아직 시험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막내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준향대학교 근처로 정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과제와 리포트에 쪄들은 막내가 제일 늦게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당연하게도 지각생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이미 한바탕 식사를 시작한 뒤였고, 불판 위 고기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에 상호 역시 잽싸게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후로 간단한 타박과 애정 어린 잔소리가 쏟아졌지만 우리의 굳센 막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이 얼마 만에 보는 윤기 어린 자태인지. 넉넉지 않은 대학생의 지갑 사정을 생각하면 소고기는커녕 돼지고기도 영접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오늘은 최근에 좋은 성적을 낸 재유햄이 친히 지갑을 열어 불쌍한 중생들을 구제하기로 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뱃속에 기름칠할 두 번 다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저녁이 무르익어갈수록 불판 위 삼겹살도 알맞게 익어갔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기에 자꾸만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여섯 개의 소주잔이 비워지고 채워지길 반복하니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비어버린 소주병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빈 병의 개수가 못해도 열 손가락은 거뜬히 넘길 정도였다. 다들 배도 제법 채운 데다가 술기운이 올라오니 별의별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지상고등학교 시절, 함께했던 영광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다시 돌이켜보면 짜릿하다 못해 믿어지지가 않았던 순간을 함께 공유한 사이다 보니 더 했다. 그러다 아직도 집게를 집고 고기를 구워대고 있던 태성에게 문득 뜬금없는 질문이 던져졌다.

 

“아 그러고 보니 태성햄 아직도 그 누님이랑 사귀나?”

“은재? 가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데….”

“여즉 헤어졌다는 얘기 없이 잘 지내길래, 이러다 나중에 우리 청첩장 받는 거 아이가?”

“아니 청첩장은 무슨….”

 

아이고, 올라간 입꼬리나 내리고 말하소 좀! 어딘가 나사 빠진 사람처럼 헤벌쭉 벌어진 태성의 얼굴로 이제는 말라버린 상추 몇 장이 던져졌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그 감정은 도대체 어떻게 되먹었길래 온갖 사람들을 저렇게까지 풀어지게 만드는 건지. 술기운이 올라 조금은 뻑뻑해진 눈가를 매만지던 상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차이, 나 화장실 좀 다녀오께. 확실히 오랜만에 많이 마신 탓인지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자꾸만 늘어졌다. 나름대로 천천히 넘어지지 않게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별안간 희찬이 저 자신을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전화 왔는데? 병찬이햄? 뭐고, 이 햄이 와….”

“응? 누구? 아, 나 화장실 급하다. 너 알아서 해라.”

 

점마는 지한테 온 전화를 나한테 막 맡기네. 여전히 낮은 진동음과 함께 밝게 빛나는 액정을 바라보던 희찬이 조금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테이블 중앙을 향해 핸드폰을 건넸다. 일단 걸려오는 전화를 멋대로 끊기도 애매하거니와 몇 년 전 인사나 가끔 했던 사람의 전화를 자신이 냅다 받기에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불쑥 뻗어 나온 전화기에 일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희찬의 행동이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핸드폰 액정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박병찬’이라는 이름이 떠오른 탓이었다.

 

“이거 뭐임? 왜 이 사람이 전화를 함?”

“몰라요. 상호 점마는 이 햄이랑 아직도 연락하고 있나 본데요?”

“아니 근데 이 사람은 이 늦은 시간에 아한테 전화를 왜 하는데?”

 

태성의 질문에 일순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예전부터 상호가 박병찬을 잘 따른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아직까지도 연락을 이어오는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상대가 받지 않음에도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 오는 모양새가 어딘가 묘하게 익숙해 보였다. 그때 여전히 진동음을 내는 핸드폰을 난감하게 들고 있던 희찬에게 준수가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아 병찬이형. 네 저 성준수예요.”

 

확실히 지금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선 준수가 전화를 받기에 제일 적합했다. 드래프트 전까진 나름 병찬과 함께 준향대학교에서 동고동락한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수화기 너머 상대에게 간략하게 오늘의 모임과 상호의 부재에 대해 설명하던 준수의 시야에 자리에 돌아오는 갈색 머리통이 들어왔다. 이 사달을 만들어놓고 태연하게 걸어오는 꼴이 딱 취객의 모양새라 작게 혀를 찬 준수가 이제 막 자리에 앉은 상호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자신의 핸드폰을 쥔 상호가 웅얼거리는 투로 물었다.

 

“아? 병찬햄? 늦었으니까 데리러 온다구요?”

 

꼭 갓 태어난 강아지마냥 희끄무레하게 눈을 뜨고선 한껏 부정확한 발음으로 식당 이름과 위치를 말하는 꼴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좀 전의 통화가 비교적 짧았던 것에 비해 제법 충격적이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화를 끊은 상호가 젓가락을 다시 집어 들며 말했다. 재유햄 고기 더 시켜주믄 안대요? 하, 이 뱃속에 거지가 든 머스마 같으니라고. 근데 상호 니…

 

“아직도 박병찬 그 사람이랑 연락하고 지냈나?”

 

 

 

◆ ◆ ◆

 

병찬은 상호가 고등학생 시절 알게 된 소중한 인연 중 하나였다. 나이 차이 탓인지 종종 미묘한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그만큼 제게 친절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특히 상호가 대학입시를 앞둔 시점에서는 경험과 연륜으로 무장한 병찬의 조언이 무척이나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히 대화하는 게 즐겁고 편해서, 나중에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러다보니 그냥 연락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려서… 그렇게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새내기 엠티를 가는 버스 안에서도 상호는 제게 연달아 오는 병찬의 연락에 답장을 하고 있었더랬다.

습관이라는 것은 참 무서웠다. 이제 상호의 아침에는 병찬의 모닝콜이 없으면 어딘가 허전했고, 점심시간마다 안부가 담긴 카카오톡 메시지가 핸드폰 화면에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게다가 원체 상냥한 성정 탓인지는 몰라도 고등학생시절부터 병찬은 마치 상호만을 위해 준비된 사람마냥 굴었다. 취향부터 성격, 말투, 행동거지 모든 것이 상호의 마음에 꼭 들었다. 어떻게 싫은 구석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는지, 한때 상호는 병찬이 누군가가 자기를 음해하기 위해 보낸 스파이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그만큼 박병찬이라는 사람이 상호에게 있어 말도 안 되게 안성맞춤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바로 지척에 두고 어떻게 제 마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결국 상호는 남들이 다 새로운 사랑과 두근거리는 캠퍼스 라이프를 꿈꿀 새내기 시절에 저도 모르게 품고 있던 오래된 마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단순한 동경과 호감인 줄 알았던 마음이 실상은 전혀 그러하지 않았음에 상호는 열아홉 살이 되고나서야 혼자서 뒤늦은 첫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상호가 스스로의 마음을 자각했더라도 둘 사이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병찬은 상호에게 다정하게 굴었으며 마치 상호가 제게 특별한 사람인 것 마냥 굴었다. 그래도 상호는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어차피 병찬도 저와 마찬가지로 당분간은 농구에 집중하느라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

분명 그러할 것이었는데. 항상 주기적으로 오던 병찬의 연락이 어느 순간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상호는 병찬이 눈에 띄게 자신과의 만남을 피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시험기간과 겹치는 바람에 병찬에게 이유를 넌지시 물어보지도 못했다. 일단 밀려드는 과제와 시험부터 처리하기 바빴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지금, 요 몇 주간 먼저 연락을 보내도 확인도 않고 답장도 없던 게 누군데 대뜸 이렇게 전화해서 데리러 오겠다니.

 

“진짜 웃기는 햄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병찬과의 일 때문에 갑자기 무리해서 달린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미 주량은 넘긴지 오래였고 그저 이 낯선 곳에서 잠들지 않기 위해 간신히 눈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이 상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거의 테이블에 엎드리기 직전인 모습을 보다 못한 희찬이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어깨를 두드려댔지만 상호는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이고 완전히 맛이 가부렀네, 햄들 아무래도 상호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뱅차니햄이 오기로 했응까. 돼따. 희차이 니 먼저 가라. 내 괜찮다.”

 

하이고!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주제에 말은…, 이미 자리는 파했고 다들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던 터라 희찬은 더더욱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때 이제는 아예 엎드려버린 채로 웅얼거리는 상호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달려왔는지 제법 헝클어진 모양새를 한 병찬이었다. 새카만 정장에 코트까지, 식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지만 묘하게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졌다. 결 좋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잠시 숨을 고르던 병찬은 오랜만에 보는 지상고 멤버들에게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하곤 곧장 엎어져있는 상호에게 다가섰다.

 

“상호야, 형아가 데리러 왔어. 집에 가자.”

 

뭐라고 잘 들리지도 않는 말을 연신 중얼거리는 상호를 달래서 일으켜 세우는 폼이 정말로 능숙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호를 대신해 지상고 친구들에게 잘 들어가라는 인사를 건넨 병찬은 제 차가 있는 곳까지 조심스레 상호를 부축했다. 나름대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 이렇게까지 취한 모습이라니, 말 못한 고민이라도 있는 것인지 절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겨울도 아니건만 술도 많이 마신 애가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온열시트에 난방까지 약하게 튼 병찬이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어느새 따듯한 조수석에서 곤히 잠들어버린 누군가의 단잠을 방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눈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골목길에 멈춰 선 병찬이 말없이 제 오른편을 바라봤다. 술기운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누가 지켜보고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이 자꾸만 시선을 끌었다. 갑자기 연락을 끊어서 많이 당황했겠지…, 혹시 실망하진 않았나? 자꾸만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병찬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무엇보다도 근 몇 주간 연락을 끊은 제 자신에게 상호가 화가 나있진 않을지 그게 가장 걱정스러웠다.

 

“진짜 뭐하는 거지 나…. 이 나이 먹고 정말.”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한숨을 내쉬던 병찬이 무심결에 핸들에 고개를 박았다. 이렇게라도 하면 제 머릿속을 괴롭히는 온갖 생각들이 사라지기라도 할까 싶은 마음이었다. 빠앙-,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클락션 소리가 조그마한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이크, 자신이 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병찬이 당혹스러움에 재빨리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바램과 다르게 방금 전의 소리가 생각보다 컸는지, 결국 제가 덮어준 코트자락이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운전해온 것에 비해 한 순간의 실수로 상호의 단잠을 깨우고야 만 것이다.

 

“으음….”

“어어, 상호야 집 다 왔어. 일어나봐.”

 

아직도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상호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과 어딘가 눈에 익은 차 내부, 코에 맴도는 익숙하고 청량한 향에 다급하게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멋쩍은 얼굴로 웃어 보이는 정장차림의 병찬이 있었다. 한껏 부자연스러운 얼굴하며 3초 이상 눈을 마주치치 못하는 모습이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님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사실 상호는 아직까지 완벽하게 술기운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채였던지라 제 앞에 병찬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 저기, 상호야 이제 집에 들어가야지…?”

“어…? 햄이 왜, 나를,”

 

한동안 갑작스레 먼저 연락을 끊었던 사람이 누군데 이렇게 뜬금없이 눈앞에 나타난 병찬의 모습에 상호는 벙찐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순간 그동안 병찬의 연락에 대해 온갖 신경을 쏟고 일희일비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상호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괜히 점점 심술이 났다. 갑자기 생뚱맞게 왜 자신을 피했던 건지, 그래놓고 이제 와서 다시 제 안위를 걱정하고 데리러 오는 건 또 뭔지. 알코올에 절여진 상호의 사고는 좀처럼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복잡하게 이런 저런 생각에 휩쓸리던 상호는 조금은 욱한 마음에 내뱉듯 제 앞의 병찬에게 물었다.

 

“한동안 연락도 없다가 뭔 바람이 불어서 데려다 준대요?”

“그으…, 형이 평소에도 종종 데려다줬었잖아.”

“카톡도 씹고, 전화도 피하던 게 어디 사는 누구더라?”

“상호야 그건 형이 사정이,”

“무슨 사정이요. 들어보고 제가 함 판단해볼게요. 납득할 수 있는지 없는지.”

 

어느새 야무지게 팔짱까지 끼고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보는 상호의 모습에 결국 한숨을 내쉰 병찬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답지 않게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괜히 도톰한 제 입술만 질근 깨물며 말하길 주저하던 병찬이 결국 약간 잠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말 이렇게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요새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랬어. 연락 못 받은 거 미안해.”

“무슨 생각을 정리했는데요?”

 

와요, 내한테 뭐 말 못할 거라도 있는가보죠? 평소에 보여주던 밝고 웃음 많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흡사 취조실의 형사와도 같은 상호의 모양새에 병찬이 슬그머니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차마 상호의 얼굴을 직접 바라본 채로는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삼 이 일, 속으로 짧은 카운트다운을 마친 병찬이 입을 여는 순간, 상호가 먼저 병찬에게 물었다.

 

“역시 햄 애인 생긴 거죠?”

“나 너 좋아, 뭐?”

 

에? 햄 지금 뭐라고…. 커다란 태풍이 휩쓸고 간 듯, 차 안에는 쥐죽은 듯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서로의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잠깐의 적막 끝에 상호의 두 눈이 점차 크기를 키워갔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은 탓인지 아니면 아직 술에서 덜 깬 건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햄 이게 지금 내가 만들어낸 환청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인거니 상호야… 형아 진짜 죽고 싶다.”

“햄 안돼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상세히 말해주세요. 안 그러면 햄 오늘 집에 못 가요.”

 

이번엔 실수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핸들에 제 머리를 갖다 박은 병찬이 한숨소리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히터는 분명히 아까 껐는데 이상하게도 차 안이 너무 더웠다. 차마 조수석 쪽으로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던 병찬은 그냥 눈을 감아버리길 선택했다. 스스로도 방금 전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물론 상호가 제게 어느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섯 살 어린 연하에게 이런 식으로 개끔찍최악 고백을 꺼낼 만큼의 쓰레기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햄이? 절? 좋아? 하신다는? 말씀?”

“상호야아…. 형 진짜 지금 숨도 못 쉬겠어. 놀리지 말아봐.”

“아니 그러니까 확실하게 말해줘 봐요. 그래야 나도 대답을 할 거 아니에요.”

 

웅얼거리다 끝내는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말소리에 여전히 핸들에 얼굴을 박고 있던 병찬이 재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전체적으로 붉은 빛을 띄우고 있는 모습이 꼭 상호처럼 거하게 한 잔 마신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지 병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는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두 눈으로 제 어린 연하 애인이 될 예정인 조수석의 남자에게 물었다.

 

“상호야, 형이랑 만나 줄 거야? 아니, 나랑 만나줄래?”

“…이, 이렇게 얼굴로 사람을 꼬시는 행위는 제네바 협약에 의해,”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았던 것 같아. 그때는 몰랐지만…, 근데 나중에 내 마음을 알게 되고나선 좀 머뭇거리게 되더라고. 아무래도 우리 나이차이가 좀 있는 편이니까.”

“21세기에 다섯 살 차이면 궁합도 안보는디요.“

“아이고, 상호야. 못 말리겠다. 정말.”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인거야? 병찬의 말에 이제는 반대로 상호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차마 운전석을 바라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아까부터 불그스름한 얼굴을 한 주제에 너무나도 행복하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병찬의 얼굴이 상호의 눈에 너무나도 폭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그럼 앞으로 맨날 이렇게 폭력적인 미모에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기가…. 박병찬 애인하기 빡세겠네.

 

“근데 햄은 어떻게 낸테 고백 할 마음을 먹었대요? 보통은 확신이 없으니까 주저하지 않나?”

“음…. 상호가 나한테 호감이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아서…?”

“아익! 이래서 경험 많은 연상이 문제라니까는!”

 

정말 진심을 다해 격분한 듯한 상호의 목소리에 결국 병찬이 즐겁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술에 취한 상대에게 그것도 차 안에서 마음을 전하게 되었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었다. 말랑해 보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궁시렁대는 모양새가 왠지 한참동안 달래주어야 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순간이었기에 병찬은 정말 뭐든 감당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제대로 알려주어야 했다.

 

“근데 나 경험 많은 연상 아닌데.”

“에? 그게 뭔 소리대요?”

“나 상호가 첫사랑이야. 처음으로 좋아해본 상대.”

 

진짜 이 햄이 미쳤나…. 방금 전에 고백한 주제에 사람의 마음을 공략하는 방법이 남달랐다. 이제는 술기운보다 다른 이유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양 볼이 주체가 안됐다. 이제야 좀 느껴지는 낯부끄러운 기분에 도저히 차 안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빛보다 빠른 속도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린 상호가 재빨리 운전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일부러 병찬이 자신을 따라 내리지 못하도록 차 문을 잡았다.

 

“햄요, 쪼 앞에 편의점 있는 거 알죠? 거기서 소주 몇 병만 더 사와요.”

“어?”

“2차는 우리 집에서 할라니까, 안주도 내가 좋아하는 거 알아서 딱 사오구요. 그러면 그때 내도 자세하게 말해줄게요.”

“뭘?”

“… 내도 햄이 첫사랑이거든요. 궁금하지 않아요? 언제 반했는지?”

 

그러니까 알고 싶으면 빨리 사가지고 와요. 내는 먼저 올라갈라니까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올라가버리는 상호의 모습에 병찬이 작게 탄식했다. 계속해서 어리게만 봐왔고 실제로도 어린, 이제 애인이 된 친한 동생이 이렇게나 깜찍하게 행동할 때마다 병찬은 정말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엄청 좋아하고 있었는데 이것보다 더 좋아질 수가 있다니, 인간의 마음이란 참 신기했다.

어찌되었건 상호가 제시한 조건은 무척이나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기에 병찬은 다급히 차에서 내려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직 남아있는 밤은 길었고 제가 상호에게서 들어야 될, 또 자신이 상호에게 해야 할 말들이 많았다. 편의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별안간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상호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210611]

[우리 집 비밀번호임여 ㅍvㅍ]

[빨리와영 보고싶어]

 

 

[응 금방 갈게]

[나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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